韓國의 옛詩 (7) 漢 詩 (4) 朝鮮 前期 (2)
朝鮮 前期 (2)
題 山水畵(제 산수화) -金守溫(1410~1481) -朝鮮前期 學者·文臣
描山描水總如神(묘산묘수총여신)/산과 물을 그린 솜씨 귀신 같아서
萬草千花各自春(만초천화각자춘)/모든 풀과 꽃들은 봄을 맞았네.
畢竟一場皆幻境(필경일장개환경)/하지만 마침내는 모두 꿈이니
誰知君我亦非眞(수자군아역비진)/너와 나도 사는 것이 한바탕의 꿈.
(*描; 그릴 묘 *畢; 마칠 필 *竟; 마침내 경 *皆; 다 개 *幻; 헛보일 환
*誰; 누구 수 *亦; 또 역)
*山水畵를 보고 지은 詩로, 人生이란 결국 모든 것이 꿈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金守溫 -本貫 永同(영동) -字 文良(문량) -호 乖崖(괴애)·拭疣(식우) -諡號(시호) 文平(문평).
世宗 20년(1438) 進士가 되고, 1441년 式年文科에 급제했다. 校書館正字때 世宗의 命으로
集賢殿에서 <治平要覽(치평요람)>을 편찬하고, 세종 27년(1445) 承文院校理로서
<醫方類聚(의방류취)>편찬에 참여하고, 副司直때는 <釋迦譜(석가보)>를 增修했다.
世宗 31년(1449) 兵曹正郞, 文宗 1년(1451) 典農寺少尹, 世祖 3년(1467) 文科重試에 급제,
中樞院僉知事가 되었다. 1459년 漢城府尹, 1466년 拔英試에 壯元, 登俊試에 급제해
中樞府判事가 되었다. 成宗 2년(1471) 佐理功臣 四等에 책록되어 永山府院君, 그후
中樞府領事에 이르렀다. 學問과 文章에 뛰어나 徐居正·姜希孟등과 文名을 다투었으며,
<四書五經(사서오경)>의 口訣을 정하고, <明皇誡鑑(명황계감) >의 國譯등 國語發展에 힘썼다.
世宗·世祖등 佛敎崇尙하는 임금을 도와 佛經의 國譯과 刊行에도 功이 컸다.
文集에 <拭疣集(식우집) >이 있다. (*乖; 어그러질 괴 *崖; 언덕 애 *拭; 씻을 식 *疣; 혹 우
*聚; 모을 취 *迦; 부처 이름 가 *拔; 뽑을 발 *樞; 지도리 추 *佐; 도울 좌 *訣; 이별할 결
*鑑; 거울 감 *拭; 씻을 식 *疣; 혹 우)
伯夷叔齊(백이숙제) -成三問(1418~1456) -朝鮮前期의 文臣·學者
當年叩馬敢言非(당년고마감언비)/말고삐 붙들고 그르다 말했으니
代議堂堂日月輝(대의당당일월휘)/당당한 충성 일월같이 빛나누나.
草木亦霑周雨露(초목역점주우로)/초목 또한 주나라에서 자랐거늘
愧君猶食首陽薇(괴군유식수양미)/그대여, 그 고사리 먹음이 부끄러우리.
(*夷; 오랑캐 이 *齊 가지런할 제 *叩; 두드릴 고 *敢; 감히 감 *輝 빛날 휘 *亦; 또 역
*霑; 젖을 점 *露; 이슬 로 *愧; 부끄러울 괴 *猶; 오히려 유 *薇 장미 미)
(*伯夷叔齊: 중국 殷나라(BC 16~BC11세기)때 孤竹君의 두 아들)
*周나라 武王이 姜太公을 軍師로 삼아 殷나라를 征服하려고 했다. 그때 伯夷·叔齊가 말고삐를
잡고 臣下로서 天子의 나라를 치는 것은 逆賊이라고 그 不當性을 말했다. 그러나 武王은
殷나라를 征伐했다. 그 말을 들은 伯夷·叔齊는 周나라의 飮食을 먹을 수 없다고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주려 죽었다. 그러나 고사리도 周나라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부끄러운 일
이 아니겠느냐는 내용의 詩이다.
*成三問 -本貫 昌寧 -字 謹甫 -號 梅竹軒 -諡號 忠文 -死六臣
太宗 18년(1418) 武官 成勝의 長男으로, 出生時 母親이 꿈에서 '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이름을 ‘三問’이라고 지었다. 世宗 17년(1435) 生員試에 합격, 1438년 式年文科 及第,
1447년 文科重試에 壯元及第했다. 經筵 侍講官, 司諫院 右司諫, 集賢殿 副提學, 禮曹參義,
同副承旨, 右/左副承旨등을 역임했다. 그후 王命으로 申叔舟와 함께
<禮記大文諺讀(례기대문언독)>를 편찬하고 經筵官이 되어 世宗의 寵愛를 받았다.
(*諫: 간할 간 *諺: 언문 언 * 筵: 대자리 연 *寵: 사랑할 총)
1442년 朴彭年·申叔舟·河緯地·李石亭등과 三角山 津寬寺에서 賜暇讀書하고, 한글創製를 위해
鄭麟趾·崔恒·朴彭年·申叔舟·姜希顔·李塏등과 함께 遼東에 流配되어 있던 明나라의 翰林學士
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音韻을 質疑하고, 다시 明나라에 가서 音韻硏究를 겸하여 敎場의
制度를 연구, 1446년 9월 29일(陰曆) 訓民正音을 頒布하는데 큰 功을 세웠다.
(*彭: 성씨 팽 *緯: 씨 위 *賜: 줄 사 *顔: 낯 안 *恒: 항상 항 *塏: 높은 땅 개 *遼: 멀 요
*翰: 편지 한 *瓚: 옥 잔 찬 *韻: 운 운 *頒: 나눌 반)
1455년 世祖가 端宗을 몰아내고 王位에 오르자, 世祖 2년(1456) 6월 明나라 使臣이 귀국하는
歡送宴에서 武人인 父親 成勝과 兪應孚등이 國王양쪽에서 칼을 들고 지켜 서있는 雲劍의 機會에
척결하고 端宗復位를 계획했다가 謀議에 가담했던 金礩이 실패를 우려하고 이를 密告해 成三問,
朴彭年, 兪應孚, 李塏, 河緯地등 全員이 處罰되었다. 逮捕되어 親鞫을 받고 다른 主謀者들(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과 함께 灼刑되고, 軍器監앞에서 車裂刑을 받았다. 이어 成三問의 父親이며
武官인 成勝도 主謀者의 한 사람으로 極刑에 처해지고, 三聘·三顧·三省 세 동생과, 孟詹·孟年·孟終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처형되었으며, 女子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礩: 주춧돌 질
*灼: 불사를 작 *裂: 찢을 열 *聘: 부를 빙 *詹: 넉넉할 담)
肅宗 17년(1691에 死六臣의 官職이 復舊되고 愍節이라는 賜額을 내려 鷺梁津에 愍節書院을 세워
神位를 모시게 했다. 그 밖에 洪州 魯恩洞에 있는 그의 옛집 綠雲書院, 寧越의 彰節書院,
義城의 鶴山忠烈祠, 昌寧의 勿溪世德祠, 連山의 忠谷書院등에 六臣과 함께 祭享되었으며,
英祖 34년(1758) 吏曹判書로 追贈되었다. 文集에 <成謹甫集>이 있다. (*愍: 근심할 민
*彰: 드러날 창 *贈: 줄 증 *謹: 삼갈 근)
北征(북정) -南怡(1441~1468) -朝鮮 世祖때의 武臣.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백두산 돌들은 칼을 갈아 닳았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두만강 물줄기 말이 모두 마셨네.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남아 이십에 나라를 태평케 못한다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뒷날에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랴.
*詩의 제목은 ‘오랑캐를 치다’로 大丈夫로서의 氣像을 노래한 것이다. 이 詩로 뒷날 睿宗때에 柳子光이
誣告해 그는 南怡가 謀叛하기 위해 ‘男兒二十無得國’이라고 썼다고 했다. 이때문에 南怡는 反逆罪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그때 나이 28歲였다. 柳子光은 關東으로 귀양가서 장님이 되어 죽었으며, 그의
아들도 北方으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怡: 기쁠 이 *睿: 슬기 예 *誣: 속일 무 *叛: 배반할 반)
*南怡 -本貫 宜寧 -諡號 忠武
朝鮮 開國功臣인 南在의 五代孫이며, 父親은 南份, 母親은 南陽 洪氏이다. 父親 남빈은 조선 第3代王
太宗의 딸 貞善公主가 宜山君 南暉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第7代 世祖에게 南怡는 姑從四寸의
아들인 셈이다. (*份: 빛날 분 *暉: 빛 휘 *姑: 시어머니 고)
南怡는 13세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世祖 때에 左議政을 지낸 權擥(권람)의
딸과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夫人을 일찍 死別하고, 固城 李氏와 再婚했다. 그러나 姑婦葛藤이 심해
이혼했다. (*擥; 가질 람 *姑; 시어머니 고 *葛; 칡 갈 *藤; 등나무 등)
癸酉靖難으로 王位에 오른 世祖는 南怡와 龜城君 李浚등 젊은 宗親들을 重用해 元老大臣들을
牽制하려 했다. (*靖; 편안할 정 *龜; 땅 이름 구 *浚; 깊게 할 준 *牽; 이끌 견)
南怡는 世祖 6년(1460)에 世祖가 武人들을 등용하기 위해 실시한 庚辰武擧에 及第해 官職에 올랐으며,
世祖 12년(1466)에 실시된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했다. 世祖 13년(1467) 김용달(金用達)과 함께
抱川, 永平일대 도적떼의 토벌을 지휘했고, 그해 ‘李施愛의 亂’이 일어나자 이준(李浚)이
도총사(都摠使)가 되어 이끈 토벌군에 軍官으로 참여했다. 鎭北將軍 康純의 휘하에서 先鋒將으로
활약해 北靑戰鬪에서 功을 세우고, 그 일로 행 부호군(行 副護軍)이 되었으며 堂上官으로 임명되었다.
‘李施愛의 亂’을 평정한 후에는 행 호군(行 護軍)이 되어 鍾城에 주둔하며 穩城, 慶原, 慶興등의 고을을
다스렸으며, 軍功을 인정받아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포상되었다. (*辰; 별 진 *擧; 들 거 *
拔; 뽑을 발 *摠; 다 총 *純; 순수할 순 *鋒; 칼날 봉 *穩; 편안할 온 *愾; 성낼 개)
1467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 同知事)가 되었다. 이어 明의 요동군(遼東軍)이 南滿洲일대에 거주하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을 토벌하기 위해 朝鮮에 派兵을 요청해오자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윤필상(尹弼商)이 이끄는 北伐軍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음력 12월 27세의 나이로
工曹判書가 되었으며, 王宮의 호위를 담당하는 겸사복장(兼司僕將)의 지위를 겸했다. (*僕; 종 복)
世祖 14년(1468) 5월 서현정(序賢亭)에서 열린 宴會에서 술에 취해 世祖에게 李浚만 偏愛한다고 失言해
義禁府의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날 풀려났으며 兼司僕將의 지위에서 罷職되었다. 그해 7월 世祖가
李浚을 20대의 나이에 領議政으로 임명하면서 南怡도 工曹判書와 五衛都摠府 都摠管의 지위를 겸하게
했으며, 8월에는 兵曹判書로 삼았지만 한계희(韓繼禧)등 대신들의 반대로 9월에 兵曹判書의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兼司僕將이 되었으며, 祖父와 마찬가지로 의산군(宜山君)으로 봉해졌다.
(*罷 마칠 파 *繼; 이을 계 *宜; 마땅 의)
그러나 睿宗 1년(1468) 10월 병조참지(兵曹參知) 유자광(柳子光)의 告變으로 逆謀의 혐의를 받고, 그해
음력 10월 27일에 강순(康純), 변영수(卞永壽), 변자의(卞自義), 문효량(文孝良)등과 함께 저자에서
거열형(車裂刑)으로 處刑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다음날 車裂刑으로 처형되었으며, 딸은 한명회(韓明澮)의
奴婢가 되었으나 이듬해 外祖父인 권람(權擥)의 功이 참작되어 赦免되었다. 이 사건을 ‘南怡의 獄’이라고
한다. (*睿; 슬기 예 *裂; 찢을 열 *澮; 봇도랑 회 *擥; 가질 람 *怡; 기쁠 이)
南怡는 純祖 18년(1818) 음력 3월 10일에 右議政 남공철(南公轍)의 請에 따라 康純과 함께 赦免되어
官爵이 復舊되었으며, 純宗 3년(1910) '忠武'의 諡號가 追贈되었다. 京畿道 華城市 飛鳳面 南田里에
南怡의 묘소로 전해지는 南怡將軍墓가 있고, 강원도 春川市 南山面의 南怡섬에도 그의 假墓와
追慕碑가 있다. (*轍; 바퀴 자국 철 *諡; 시호 시 *贈; 줄 증 *假; 거짓 가 *慕 그릴 모)
- 韓國의 옛詩 (8) 古代 - 향가(鄕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