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35/김삿갓의 ‘죽시竹詩’]그렇고 그런 세상?
연전에 섬진강변 헌책방 주인이 ‘그냥 갖다 보라’며 준 책이 『김삿갓시집』(김병연 지음, 황병국 옮김, 범우문고 44)인데, 며칠 전 새벽 왜 그 시집이 떠올랐던 것일까? 그것도 수록된 110여편의 시 가운데 유독 ‘죽시竹詩’를 다시 읽었다. ‘죽竹’자는 우리말 ‘-대로’라 해석해야 한다. 졸필이지만 내처 붓펜으로 달력 종이에 써보며 음미를 했다. 마지막 구절 <그렇고 그런 세상然然然世/그런대로 살아보세過然竹>가 더욱 와닿았다. 일단 짧은 시 속에 ‘대나무 죽’자가 11개나 들어 있고, 풀이를 보면 쉽고 재밌다. 아버지께 보여주니 그냥 웃으신다.
이 땅에 사는 50대 이상은 김삿갓(본명 김병연. 1807-1863) 시인이 누구인지는 대개 알지 않을까. 아들세대들은 금시초문, 모르기 쉬울 터이지만. 재밌는 사람이라고 촌평하기는 너무 많이 ‘가슴이 아픈’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란때 항복한 역적인 줄을 모르고 ‘죄가 하늘에 사무친다’는 탄식하는 글로 과거에 급제하다니? 어찌 하늘을 우러러 보겠느냐며 일평생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며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즉흥시’들을 무수히 남긴 불운한 시인.
此竹彼竹 化去竹 차죽피죽 화거죽
風打之竹 浪打竹 풍타지죽 낭타죽
飯飯粥粥 生此竹 반반죽죽 생차죽
是是非非 付彼竹 시시비비 부피죽
賓客接待 家勢竹 빈객접대 가세죽
市井賣買 歲月竹 시정매매 세월죽
萬事不如 吾心竹 만사불여 오심죽
然然然世 過然竹 연연연세 과연죽
풀이를 굳이 하자면 이렇다.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대로/바람 치는 대로/물결 치는 대로/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며/옳은 것 옳다, 그른 것 그르다, 저대로 부치세/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하고/살림살이 사는 것은 돌아가는 대로 하세/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살아보세>
한 세상 사는데 어디 ‘내 마음대로吾心竹’ 되는 일이 있던가. 그러니 시시비비가 어떻고 따따부따할 것도 없이 ‘그렇고 그런 세상’ 아무생각 없이 살아봄이 어떠냐는 김삿갓은 체념 내지 관조를 넘어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일까. 기묘한 결합부터 탄복이 절로 나온다. 김삿갓은 요즘 유행하는 ‘3행시’는 누워서 떡먹기였을 듯하다. 한자, 한문과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위선적인 양반들을 욕보이는가 하면 가련한 기생들의 어깨도 다독여준다.
40여년 전에 김용제(친일문학가였던 듯)가 소설로 쓴 ‘김삿갓 이야기’를 엄청 재밌게 읽은 기억이 너무 생생해, 언젠가 출판사 후배에게 다시 찍어내보라고 했는데, 국회도서관에서 어렵게 책을 찾아 만들었는데, 별 재미를 못봐 미안해 했던 적이 생각났다. 그 후배는 지금도 책을 만들고 있을까. 물론 김삿갓 하면 또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그 사람은 끝내 국민들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잘못했다; 역사에 죄를 지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그를 한국 현대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렀건만,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고 유해가 몇 달이 넘도록 자택에 안치되어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가 즐겨부르는 '십팔번'노래가 '떠나가는 김삿갓'이었다고 한다. 죽장에 삿갓쓰고 저승길을 허이허이 가는 중일까? 가련할손!
아무튼, 요즘의 내 심사心思가 시쳇말로 하면 이런저런 일로 속이 시끄러운 판이어서 김삿갓의 죽시가 생각난 것같다. 사람이 속이 시끄럽지 않아야 ‘살 맛’이 나는 법이거늘, 무단히 별 것도 아닌 일들로 속이 시끄러우면 쌓이는 것은 오직 스트레스뿐. 무엇보다 집안이 화목하고 우환憂患(아픈 사람)이 없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영원한 진리일 터.
문득, 원본 <삼국지三國誌>의 첫머리에 실린 시같지 않은 시도 생각나 모처럼 떠들어봤다. 대지팡이(호신용, 대나무 마디에 칼이 들어있다) 짚고 삿갓 하나 눌러쓴 채 전국을 여러 번 누볐던 김삿갓도 이 시를 봤다면 빙긋이 웃지 않았을까 싶다.
滾滾長江東逝水 浪花淘盡英雄
是非成敗轉頭空 靑山依舊在 幾度夕陽紅
白髮樵夫江渚上 慣看秋月春風
一壺濁酒喜相逢
古今多少事 都付笑談中
굼실굼실 흘러가는 긴 강은 동쪽으로 가는데, 무수한 영웅들이 파도꽃와 물결 속으로 사라져갔네, 시비와 성패야 고개를 돌려버리면 그뿐일 것이나, 변함없는 청산의 붉은 저녁놀은 무릇 기하였을까. 백발 어부와 나무꾼이 강가에서 반갑게 만나 가을달과 봄바람을 즐기며 막걸리 한 잔이면 무엇이 부러우랴. 고금의 크고 작은 일들이야 그저 허허허 웃으며 흘려버리면 되는 것을. *필자 의역
공통된 한자漢字가 ‘부칠 부付’자이다. ‘그저 내버려둔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살아볼 일인지는 나같은 장삼이사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첫댓글 우천이 삼국지 서시의 감동을 일깨우네ㅎ
(오랜만에 동네 산을 태산인 양, 멀리 보이는 한강을 長江인 양.... 나름 다시 새겨보네!)
*
(인간의 흥망성쇠를 아는지 모르는지)
장강은 (그저 말없이)도도하게 동으로 흐르고
여린 꽃같은 물거품에 옛 영웅 모두 쓸려가 버렸네
시비 성패가 고개 한번 돌리니 다 空이로구나
청산은 늘 그대로인데
석양이 붉게 짐이(세월의 흐름이) 무릇 기하이더냐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을 무심히 내려다 보는)
백발 성성한 어부와 나무꾼에게
가을달 봄바람이 어찌 새삼스러우랴
同志, 知己를 만나 탁주 한병에 즐겁게
고금의 크고 작은(치열했던) 영웅담을 담소에 부쳐보네(훗날 사람들이 안줏거리 삼아 얘기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