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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
산악회회보(山の会々報), 1941년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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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지 |
예과특집호로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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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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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권두언 |
다케나카 가나메(竹中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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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
北胞胎山初登報告書 |
원정대의 구성과 장비, 식량, 일지, 지형, 회계, 코스 약도로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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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 |
スキー山岳團體登攀記錄2 |
관모봉등반대동식물반(服部敏), 기상(前川智春, 谷川十三生), 인부(洪璡基, 谷川), 후기(竹中要) |
인부(人夫)는 짐꾼, 안내인 |
63~67 |
登山の新傾向 |
坂本和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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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82 |
小報告集 |
白頭·胞胎(夏): 坂本和英, 島田建郞, 冠帽峯(夏) :米田穰, 雪嶽山(春): 小池謙吉, 合宿(冬) :吉野裕, 田中吉男 |
1935~1941년의 주요등반 |
83~91 |
회무보고 |
산악회 강화 재편성에 대하여, 회칙, 임원 및 회원명단, 후기(久野一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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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경성제대산악부는 학생회인 학우회 해체로, 학우회에 소속되어 있던 산악회도 운영에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학우회 소속이 아닌 독립적인 산악회의 운영을 위해 예과와 본과로 구성된 산악회를 통합하고 재정적인 후원을 고려한 듯한 회원 자격의 확대와 후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당시 70명에 이르는 회원수로 과거보다 크게 성장을 하였지만, 극소수 회원만이 활동하여 초기에 비해 산악회가 정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산악회에 대한 개념이 창립 당시와는 많이 틀려지게 된 점을 전체 회원들의 대다수가 인정하고 있고, 아울러 O.B 와의 사이에 서로 다른 행동노선이 생겨나 이것을 신속하게 새로운 체제로서 변경하고자 하며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회칙을 정하였다고 한다.
“첫째, 종래의 막연한 상태로 되어 있던 지도적인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고자 선배들 이 학보에 등산의 본질을 확실하게 글로 발표 및 지시하여 전회원이 그것을 이해하여 회원 모두가 한마음 일심동체로 목표를 추진하며 둘째, 정신적인 결속을 위하여 단순하게 현역에 있는 회원과 동료뿐만이 아니라 졸업생을 포함한 전회원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기회마다 서로간의 기운을 북돋우며 격려하여 정신적인 결속을 도모코자 하였다. 셋째, 조직적인 기구를 구성하고 간단명료한 회칙을 설정하여 목적달성의 능률을 증진하고자 산악회 기구를 조직화 하고 간명한 회칙을 설정한다. 넷째, 재정 강화를 위하여 회비 외에 입회금 제도도 채용하고, 회비도 회지발행에 모자람이 없이 충분히 걷어야만 한다. 다섯째, 연구회의 설치와 연 1회 발행 회지도 결호가 없이 발간하며 판형을 이전보다 크게 하고 명료한 인쇄가 되게 한다. 여섯째, 예과 스키산악부와 본과 산악부가 별개가 아니라 O.B, 학부, 예과 간의 소통을 최대한 도모하고 모임에 영속성을 부여한다. 일곱째, 산악반이 존재하는 주요한 목적은 일반체육이지만, 본회의 목표는 특히 진일보하여 문학, 과학을 통하여 산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임을 명료하게 한다. 이밖에도 회원됨의 의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뺏지를 제작하기로 하며, 그 해 6월 7일 총회를 열러 새롭게 회칙을 정하였다.”
이에 따른 회칙의 중요 사항을 보면, 회의 명칭은 ‘경성대 산악회(城大山ノ會)’라 칭하며 그 목적으로 제2조에 “본회는 산악에 관한 과학 철학 문학 예술, 기타 일체를 연구하며, 건전한 체력과 등산 기풍을 양성하고 더 나아가 일본문화의 고양을 기한다.”고 하였다. 회원은 경성제국대학 학생과 직원 및 졸업생과 그 외 연고가 있는 자로 하고 있으며 회원으로 하고 통상회원(학생), 특별회원(직원), 종신회원(졸업생), 찬조회원, 명예회원(회와 연고가 있는 자)으로 나누었다. 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산악회 후원사업과 연 1회 회지와 필요에 따른 출판물의 간행 등의 사업을 추진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산악회는 초기에 비해 극소수의 인원들이 활동을 하였고 예과 본과의 활동이 개별적으로 이루지고 있어 새로 통합된 산악회를 독자적인 운영을 하고자 했으며, 이후 주로 인접한 만주, 중국 등지의 학술탐험가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산악회 회원 구성
1941년 회지의 회원구성을 보면 당시에 총 70여명으로 회장 이하 임원 7명 졸업생 28명 그리고 재학생은 학부생 10명, 예과생 25명이었고 개정된 회칙에 따라 최종 등록된 회원은 다음과
같다.
경성제국대학 산악회 회원
구분 |
회원명 |
인원(명) |
기타 |
役員 |
会長 : 竹中要, 副会長 : 大西雅部 理事 : 鈴木城, 早瀨武美, 鈴水賢 , 中島文雄, 坂本和英, 岡田豊美, 松井浩美 |
9 |
임원 |
名譽会員 |
安信能成, 中村両造 |
2 |
회와 연고자 |
贊助会員 |
無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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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別会員 |
竹中要, 尾高朝雄, 天野利武, 多男文男, 阿部O二, 小西英一, 大富OO, 朝野明夫, 大西稚郎, 鈴水誠,, 松本淸, 渡辺正 |
12 |
직원 |
終身会員 |
安保澄, 市野沢和泉, 伊藤武男, 岩崎敏雄, 一瀨格, 泉井一, 占部喜三, 大屋博美, 落合時典, 香山陽坪, 後藤武憲, 島藤一, 杉原逸平, 立石O, 谷川十三生, 服部敏, 平岡苘男, 廣瀨, 稲田眞杉, 藤O正義, 三浦理平, 武藤明 |
22 |
졸업생 |
通常會員1 |
黑田朝太郎, 望月学, 早瀨武美, 久野一郞, 坂元八郎, 海本毅, 高橋俊哉, 中島文雄, 小田知人, 岡田典美, 坂井秀正, 坂本和英, 高瀨O三, 外村政弘, 增井正幹, 村野匡, 吉野裕 |
17 |
本科 학생 |
通常會員2 |
赤尾親助, 久野二郎, 田中吉男, 高橋孝夫, 藤野吉平, 大坂一俊, 小池謙吉, 島田倢部, 杉田三郎, 中山純夫, 早野三郎, 松井浩美, 三浦省二, 米田穰, 蜂谷晴男, 村松綠眀, 武藤覚 |
17 |
豫科 학생 |
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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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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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회의 회원은 창씨 개명한 조선인 회원의 가입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식 회원은 모두 일본인으로 여겨지며, 초기에는 예과와 본과 학생들만으로 운영되었으나 1941년 통합 운영에 따라 교직원 및 관련 외부 인사도 특별회원과 명예회원으로 회를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회원에게 고유번호가 부여되었는데, 회원번호 1번은 다께나카(竹中要)로 조선산악회 창립 회원으로 예과 식물학교수이고 2번이 이즈미(泉井一)이며, 3번 나카무라(中村両造)는 조선산악회 창립 회원이고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다. 이즈미는 조선산악회의 1933년 8월 경도대의 금강산 집선봉 등반 보고회에 참석하고 이이야마와도 함께 등반을 하여 이즈미가 경성제대산악회를 설립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역량에 조선산악회가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1년 회지의 관모봉 등반대의「スキー山岳團體登攀記錄2」 보고서에 인부반(人夫班) 담당으로 조선인 홍진기(洪璡基)가 기록되어 있다. 다케나카의 『半島の山と風景』에 등반일지인 「冠帽連峯集團登攀日記」의 관모봉 등반대원 명단을 보면, ‘食料物品·記錄’ 담당에 ‘洪璡基’ 그리고 ‘人夫·地質鑛物’ 담당에 ‘崔龍澤’ 2명의 조선인이 대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관모봉 등반대가 학술탐사도 겸하여, 탐사대가 고용한 조선인 인부의 통역 등 업무를 함께 담당한 대원으로서 조선인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손경석은 『韓國登山史』의 「6. 서울근교 초등기록과 광역화된 활동무대」에서 “이 때 학생이었던 홍진기(洪璡基), 최용택(崔龍澤)등이 경성제대 예과 산악부원으로 이 원정등산에 참가했다. 우수한 산악가이드라고 할 수 있는 전기남(全己男)의 활약도 다케나카의 『조선의 산과 풍경(半島の山と風景』과 당시 경성대 예과 학보에 상세히 기록되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冠帽連峯集團登攀日記」에 전기남은 산행가이드가 아니라 산림주사 자격으로 보상동에 기거하며 등반대에게 숙소를 제공하였다.(竹中要, 1938, 『半島の山と風景』,古今書院 p.19, p.24)
이 시기에 회원은 아니지만, 독일·오스트리아 산악회원으로 1935년부터 경성제대에 독일어 강사로 근무한 크리스찬 후퍼는 이즈미와 1936년 금강산 집선봉 S1, S2를 함께 등반하였으며 서울근교 암벽등반 등을 통해 경성제대와 조선산악회들에게 ‘돌로미테’ 인공등반방식을 전수한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 산악인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3) 등반활동
경성대산악회의 등반활동은 등산 목적에 따라 크게 두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는 초기에 이즈미가 주도한 암벽등반과 스키 및 동계 등반 그리고 둘째는 1940년을 전후한 북한 지역과 인접국가로의 학술탐사 등반이다. 이즈미는 산악회를 만들었지만, 초기에 등반에 관심있는 회원이 적어 경성중 등반 파티와 조선산악회의 이이야마와 주로 등반을 하였고 이후 회원들과 서울근교와 금강산 집선봉의 암벽등반 및 한라산, 관모봉 등의 동계등반을 이끌었고 만주, 중국, 만몽국 등 인접국가의 학술등반도 활발하였다.
회의 설립 초기, 이즈미는 경성중 등반파티와 함께 서울근교 및 금강산 집선봉에서 활동을 하였고 이후 등반에 관심이 있는 회원들의 입회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리더인 이즈미는 1932년 동경대스키산악부의 금강산 집선봉 동북릉 S1, S2봉 등반과 1934년 12월의 교토대 동계 백두산 등반에 크게 자극을 받고 뒤이어 1934년 금강산 집선봉과 1935년 12월에서 1936년 1월의 동계 한라산 원정을 결행하는 하였다.초기 활발한 활동을 하다 1935년 12월 한라산 등반에서 사망한 마에가와(前川智春)의 등반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마에가와(前川智春)의 등반 경력
연도 |
내용 |
1933. 1 |
스키를 시작 |
1933. 4 |
암벽등반을 시작 |
1935. 1 |
1주일간 금강산 스키행 |
1935. 4 |
도봉산 선인봉 마에가와 코스 초등 |
1935. 8 |
금강산 집선봉 S3 서남릉 초등반 |
1936. 1 |
제주도 한라산 초등반 후 행방불명 |
마에가와의 등반 경력에서 초기 산악회의 활동을 짐작해보면, 1933년 회가 설립되면서 암벽등반 활동이 있었고 1935년에 이르러서는, 도봉산 선인봉과 금강산 집선봉의 코스 초등 기록에서 보듯이 독자적인 등반 역량을 갖추었으며, 1935년 12월에서 1936년 1월에 있었던 한라산 동계등반으로 보아 이 시기에 해외 원정을 염두해 둔 훈련등반까지 등반 역량이 발전했음을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이즈미가 재학생으로서 활발히 회의 등반을 이끌었던 때로, ‘알피니즘’에 충실한 등반 활동으로 의미있는 초등반을 성취했던 시기이다.
1941년 경성대 산악회 회지의 등반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주로 동계등반을 위한 스키 기술의 습득과 설악산, 관모봉, 백두산으로의 원정등반을 기록하고 있다.
예과 스키산악부 등반기록
No. |
대상지 |
등반코스 |
기간 |
대원 |
기타 |
1 |
삼방스키장 |
스키 |
1939. 12. 25~1940. 1. 1 |
小田和人,三輪了,吉野裕, 岡田豊美,久野二郎,赤尾親助,山形建二 12월 29일~ 坂元八郞中島文雄久野一郎坂本和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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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백두산 |
혜산진-신무성-천지 왕복 |
1940. 7. 14~7. 20(전체 약 20일) |
學部班:鈐水賢,早瀨武美,竹本敎 豫科班:竹中要,坂本和英,三輪了,岡田豊美,島田建郞,三浦省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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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관모봉 |
관모봉 |
1940. 7.15~7. 20 |
田中, 松井, 小池, 米田穰 |
예과 |
4 |
설악산 |
남측 약수리-한계령 |
년도 미상, 3. 20~3. 25 |
赤尾親助, 小池謙吉, 米田穰, 三浦省二, 田中, 大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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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금강산 삼방 |
스키 |
1941. 1. 2~1. 13 |
田中吉男,,米田穰, 松井浩美, 坂本和英, 家入一郞外村政弘,高橋孝夫,久野二郎,藤野吉平,三浦省二,大塚一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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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중요 초등반으로 1935년 4월 금강산 집선봉 S1·S2 연등, 1935년 7월 태백산맥종주(오대-설악), 1935년 1월 북수백산 차일봉 동계 등반, 1936년 12월에서 1월의 제주도 한라산 원정등반 및 빙벽등반 훈련을 겸한 1940년 12월에서 1월의 관모봉 등반이 있다. 등반대의 대원을 보면, 이즈미를 리더로 마에가와(前川智春), 핫토리(服部敏), 이토(伊藤武男) 등이 등반을 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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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기 위해 손경석, 2010, 『韓國登山史』, 竹中要, 1938, 『半島の山と風景』 등을 참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