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을 흠모하고 존경한 호치민] '호 아저씨!의 고결한 헌신
호치민은 공무원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하여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공무원의 필독서로 장려하였다. 그의 머리맡에는 늘 목민심서가 놓여져 있었고 조선의 대사상가인 정약용을 흠모하여 茶山의 제삿날까지 직접 챙겼다고 한다. 巨人은 巨人을 알아보는 모양이다. 베트남 인민들은 '호 아저씨!'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호치민을 불렀다. 한 때는 혁명가였던 크롬웰, 로베스 피에르, 마오쩌둥, 스탈린이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 기민하게, 자신의 이상을 배반하고 독재자로 전락한 일들을 반추해보면 호치민의 고결한 헌신은 인간에 대한 절망을 희망으로 안내하는 푸른 이정표임에 틀림없으리라.
다시 호치민을 생각하며
이 글은 '반은 레닌 반은 간디'라고 불리웠던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에 관한 글이다.
『그의 지도력에 대한 찬사는 전세계적이었다. 친구 들 뿐만 아니라 적들조차 그가 사망했을 때 보여준 조의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사이공은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문상하기 위해 완전 철시하였다. 티우 남베트남 대통령조차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타임즈는 긴 조사에서 정치적 이유로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조차도 그에게는 숭배와 경애의 염을 금할 수 없었다고 썼다. 타임지는 그를 표지인물로 채택하였고 이렇게 썼다. "현재 살아있는 민족주의자 가운데 그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 버티고 서 있었던 사람은 없다."』 -Charles Fenn-
호치민(사진)은 1차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에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격퇴시켰다. 그리고 2차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에서는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못했던 미국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주며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베트남을 하나의 베트남으로 통합하는 데 결정적인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견습 요리사라는 밑바닥 생활까지 경험해 본 호치민은 당대의 초강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두 차례에 걸친 피와 뼈를 말리는 반제국주의 전쟁을 전설적으로 영도했으며 모두 승전으로 이끌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세계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을 수 없는 미증유의 대사건이다.
베트남의 주석이 된 호치민이 재임기간 동안 주석궁을 사용하지 않고 남루한 개인주택을 사용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결혼관처럼, '베트남과 결혼했기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산 호치민은 폐타이어로 만든 샌들을 신었으며, 평범한 인민복이 그의 유일한 옷차림이었다고 한다. 호치민은 공무원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하여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공무원의 필독서로 장려하였다. 그의 머리맡에는 늘 목민심서가 놓여져 있었고 조선의 대사상가인 정약용을 흠모하여 茶山의 제삿날까지 직접 챙겼다고 한다. 巨人은 巨人을 알아보는 모양이다.
베트남 인민들은 '호 아저씨!'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호치민을 불렀다. 한 때는 혁명가였던 크롬웰, 로베스 피에르, 마오쩌둥, 스탈린이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에 기민하게, 자신의 이상을 배반하고 독재자로 전락한 일들을 반추해보면 호치민의 고결한 헌신은 인간에 대한 절망을 희망으로 안내하는 푸른 이정표임에 틀림없으리라.
수 년 전에 돈 벌기 위해 부모형제를 떠나 물설고 낯선 이 나라에 와있는 뚜이와 호아라는 이름을 지닌 베트남 처녀를 만난 적이 있다. 지금쯤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 하얀 맵씨가 곱디 고운 아오자이를 차려 입고 푸른 숲속을 평화롭게 거닐고 있으리라.....
궁금해하는 분이 있을 것 같아 알려 드립니다.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알게 된 것은 박헌영과의 만남 때문입니다. 아래의 글은 2009년 2월 2일에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호찌민은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과 총부리를 맞대기 훨씬 전부터 한국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1929년 코민테른이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운동가들을 위해 모스크바에 세운 국제레닌학교에서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 등과 함께 공부했던 것이다. 제3인터내셔널로도 불리는 코민테른은 레닌의 발기에 의해 창설된 마르크스-레닌주의당의 국제적 조직체였다.
호찌민과 박헌영 등은 제국주의의 침탈에 신음하고 있는 자신들의 식민지 조국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우의를 다졌다. 호찌민이 이후 늘 머리맡에 두고 읽고 또 읽었다는 <목민심서>도 바로 박헌영이 건네준 것이었다.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해하는 분이 있을 것 같아 덧붙입니다. 호치민은 한시를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한문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호치민의 한시 모음집인 '옥중일기'에 관한 인용글의 일부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출판된 책입니다.
시집 ≪옥중일기(獄中日記)≫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족적 영웅인 호치민 주석의 작품으로 모두 134편의 한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쓴 한시 두 편(번역편)을 올려본다.
장기를 배우며 호치민
마땅히 시야는 넓게 생각은 치밀하게
때때로 공격은 단호해야 한다.
길 잘못 들면 쌍차(雙車)도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卒) 하나로도 성공한다.
쌀 찧는 소리를 들으며 호치민
쌀이 찧어질 때 그 고통 심하나
찧어진 다음에는 솜같이 하얗구나
세상에 인생살이 이와 같으니
시련이란 그대를 옥(玉)으로 다듬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