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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화평의 비밀/ 갈라디아서 5:22-2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RtOwz2O_koE&t=1s
류영모목사님이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은혜가 되어서 나눕니다. 남자들이 제일 신나하고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얘기 셋이 있다지요. 첫째 군대 얘기, 둘째 축구 얘기, 셋째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랍니다.
남자들만이 살았던 군대 생활엔 많은 추억거리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용돈을 많이 갖다 쓰는 졸병이 있으면 고참들이 심부름을 시킵니다. “라면 사와라, 빵 사와라” 그런데 그냥 사오라고 하면 강탈이 되니까 천원짜리 한 장을 줍니다. “이거 가지고 가서 라면 다섯 개, 빵 다섯 개 사오고 2천원 남겨 와.” 이런 엉터리 교환법이 통하는 곳이 옛날 군대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엉터리 교환의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모든 저주를 갖다 주고 온갖 복으로 바꿔오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고 영원이 바뀌는 곳입니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즐거운 교환’ 행복한 교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생의 저주가 하늘 복으로 교환된 곳이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성도들의 즐거운 교환 장소입니다.
· 우리는 그 분 앞에 죄를 가지고 나아가 용서를 안고 돌아갑니다.
· 상처를 가지고 나아가 치유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 가난을 가지고 나아가 부요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 죄책감을 가지고 나아가 자유함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 염려를 가지고 나아가 평강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 열등감을 가지고 나아가 자존감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 영벌을 가지고 나아갔다가 영생을 얻어가지고 돌아옵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교환입니까? 이 얼마나 행복한 교환입니까? 우리는 십자가 앞에 불목을 가지고 나아가 화목을 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복을 만들어내고 화평을 만들어냅니다.
화평과 평화는 똑같은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샬롬입니다. 평화가 있는 곳은 행복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지난 3000년 동안 지구상에는 3,300여 차례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옛 소련의 군비경쟁이 한창이었을 때 양국이 가진 핵탄두는 지구를 41번이나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전쟁을 위해서 엄청난 돈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미국을 천조국이라고 부릅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미국이 1년에 군사비로 지출하는 돈이 한국 돈으로 약 1천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평화는 하나님과 평화, 자신과의 평화 그리고 타인과의 평화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중요한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평화가 깨진 상태가 저주이고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가 복이기 때문입니다. 욥 22:21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해야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 자신과의 평화 그리고 타인과의 평화 이 세 가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입니다. 모든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전제됩니다. 만약 다른 평화를 소유했어도 하나님과 평화롭지 못하면 그는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었는데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지 못한다면 그에게 영생은 있으나 생활이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진정한 평화를 이뤘다면 영적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평화하고 다른 사람과도 평화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 5:9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까?
평화라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팍스(pax)와 샬롬(shalom)입니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법,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마는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넓은 땅을 정복했고 지배했습니다. 로마는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고, 결국 그 힘과 물질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샬롬은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하는데 내적인 평화로 힘이나 권력이 아닌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평화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평화는 팍스가 아닌 살롬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에서 세 번째 열매인 화평, 평화에 대하여 나누겠습니다.
1. 성령으로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본래 하나님과 사람은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날이 서늘할 때면 동산을 거니셨고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뛰어나갔으며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과 사람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평화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께서 평소와 마찬가지로 동산을 찾아오셨지만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벌거벗은 부끄러움 때문에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죄의 결과는 수치심과 두려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의 결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진 결과로 사람들에게는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결국 사람의 육신은 늙고 병들게 되고 육신의 죽음 후에는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우리가 사망 가운데 거하며 지옥 형벌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영원한 천국도 주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그런 구원의 계획을 알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사람들의 생각에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전 1:18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숨겨져 있고,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풍성함이 있지만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여기 한 알만 먹으면 불치병을 고치는 좋은 약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그 약의 효험을 믿지 않고 먹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과 영생의 능력이지만 십자가의 도를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능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지혜나 능력으로 하나님의 평화의 방법인 십자가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사람들이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드려 하나님과 평화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 속에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허락하시고 십자가의 도가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어지고 그분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면 그것이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신 증거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런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한번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깨어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관계는 깨지지 않아도 평화는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행하는 일들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얻고 십자가가 깨달아진 것처럼 구원 이후의 생활도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구원 이후의 생활을 스스로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해 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자녀가 한 집에 살아도 자녀가 부모의 뜻을 어기면 서로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이후에도 성령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사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더 깊은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성령으로 자신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여러 해 전에 ‘아일랜드 여왕’이라고 불리는 큰 여객선 한 척이 침몰된 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승객 가운데 130명의 목회자들(구세군 사관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 겨우 21명만이 생명을 구했습니다. 익사자 109명은 한 사람도 자기 구명대를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많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턱없이 구명대가 부족한 것을 본 용감한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구명대를 벗어 다른 사람에게 입혀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하나님과 평화 했으며 자신과 평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평화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으며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오히려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것입니다.
자신과의 평화는 자신의 가치를 알 때 이루어집니다. 자존감이 높을수록 자신과의 평화 지수는 높습니다. 자존감이 높다는 말은 자신을 그만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건강한 자존감은 성령으로 충만할수록 높아집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자신이 사랑 받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말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라도 구원하실 만큼 존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 자신의 가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내 몸은 그냥 사람의 몸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통장의 가치는 통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통장 속에 들어있는 돈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내 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거하시니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그러니 그런 귀한 존재와 평화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살아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내가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는 성경적으로 나의 존귀함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에 속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나를 판단합니다. 그들은 내가 가진 능력이나 외모를 가지고 나를 사랑스러운 존재 혹은 사랑 받지 못하는 존재로 평가합니다. 그들은 눈빛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들의 가르침은 거짓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대부분 마귀적입니다. 진정한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내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도 아깝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돈이나 학벌이나 배경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능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능력이 부족해도 주님은 “너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의 어여쁜 자”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목숨과 바꾼 하나님 앞에서 정말 필요하고 존귀한 사람입니다.
3. 성령으로 타인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은 자신의 삶에 큰 유익이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카네기 공과대학 졸업생들 중 성공한 사람들 1만 명의 성공비결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15%만이 남보다 뛰어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성공하고, 85%는 원만한 대인관계 때문에 성공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면 다른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평화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성령충만 하셔서 온유하고 겸손하셨듯이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면 부드럽고 온유해집니다. 저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성품은 스펀지와 같아진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단단한 돌과 스펀지를 한 통 안에 넣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스펀지는 돌의 모난 부분을 다 받아드립니다. 돌이 튀어나온 부분과 닿는 스펀지의 부분은 돌 때문에 푹 들어갑니다. 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돌의 모난 부분을 받아드립니다. 돌과 스펀지는 한 통 안에서 함께 평화롭게 있습니다. 그러다 통에서 꺼내놓으면 스펀지는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대부분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불화는 말로 만들어집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평생원수가 됩니다. 말 한마디 잘하면 원수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합니다.
행 2장에 보면 성령께서 120문도에게 임하자 그들에게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말의 변화입니다. 혀가 돌아가면서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막 16장에 보면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가운데 '새 방언'을 말하는 표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방언은 외국어를 말하거나 아니면 성령의 은사 중 방언을 말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변화된 언어생활을 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다스리시면 사람의 속이 변합니다. 사람의 속이 변하면 말이 변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차면 그 사람의 말에 분노가 묻어나옵니다. 마음속에 즐거움이 가득하면 역시 말에 즐거움이 묻어나옵니다. 성령께서 충만히 역사 하시는 사람은 성령님의 영향력이 말과 행동을 통해서 묻어나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는 상대를 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상대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상대에게 반응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상대를 사기꾼으로 본다면 상대를 경계할 것입니다.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본다면 상대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사람을 자신의 시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성령님 때문에 사람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 꽃 같은 일곱 눈을 가지셔서 사람을 볼 때 정확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감사한 면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눈만 가지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눈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십니다. 아기를 키우는 엄마를 보십시오. 아기가 똥을 싸면 그 똥이 더럽지 않아서 만지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의 눈은 더러운 똥까지도 용납할 수 있는 사랑의 렌즈가 끼워져 있어서 아기의 똥까지도 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가 평화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가끔 인간관계에서 평화가 깨질 때보면 상대의 표정 때문이 문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성령으로 충만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상대를 사랑의 눈으로 본다면 표정 정도야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가 될 때는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입니다. 내가 성령충만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는데, 성령을 소멸하면 소화시키지 못해서 불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표정도 문제 될 것 없습니다.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은 희락의 영이기 때문에 내 속에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속이 기쁘니 표정도 밝아지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 마귀가 충만하면 마귀는 슬픔과, 분노와 아집의 영이니 그 사람의 표정도 그렇게 바뀌게 됩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죽을 때에도 얼굴에서 광채가 났으며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오니 그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성령충만하면 표정도 달라지는 것이고 인상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대인관계의 평화는 나의 그릇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삐지기고 화를 냅니다. 마음이 좁아서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평화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달라집니다. 성령께서 그를 지배하는 만큼 그의 마음의 그릇이 넓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그릇이 넓어진 사람은 용납되지 않던 사람도 용납하게 되고 그래서 좀 더 폭넓은 평화의 관계가 이뤄집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누군가와 불목하는 것이 너무나 불편합니다. 신자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찌르기 때문에 먼저 찾아가고 먼저 손을 내밀게 됩니다. 정말 성령충만한 사람은 상대에게 먼저 사랑의 손을 내밉니다.
어느 마을에 앙숙인 두 가게가 있었습니다. 양쪽 가게 두 주인은 사사건건 다투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성령을 받았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 받은 가게 주인이 기도하고 있는데 손님이 물건을 사러왔습니다. 그 손님은 사려던 물건을 보더니 물건이 좋지 않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성령 받은 가게 주인의 마음에 앙숙인 가게에 가면 좋은 물건이 있을 것이니 그 가게로 보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성령 받은 가게 주인은 그 생각대로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앞 가게에 가시면 더 좋은 물건들이 있을 겁니다. 저 가게는 물건도 좋고 값도 쌉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그 가게 주인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동안 앙숙이었던 저쪽 가게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게 주인은 손님을 이쪽으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됐고 함께 교회에 가게 됐다고 합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하겠습니까?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찬양 사역자 최용덕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최집사님은 많은 찬양을 작사 작곡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어떤 후배하고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그 자존심 때문에 결국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저를 전도했는데, 내가 저보다 더 나은데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후배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나에게 어떤 선배님이신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선배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하세요.”라고 용서를 구하더랍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화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날 밤 최용덕집사님은 눈물로 한 찬양을 지었습니다. 그 찬양이 바로 <오늘 나는>이라는 제목의 찬양입니다.
1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짓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미길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마음 주님께 맡긴 채로.“ 2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 마음 주님께 맡긴 채로.” 저와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성령으로 평화를 만듭시다. 성령충만하셔서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내가 먼저 사랑합시다.
신앙생활의 열쇠가 되는 말씀이 슥 4:6입니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성령으로 사랑할 수 있고, 성령으로 기뻐할 수 있고, 성령으로 평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이 신앙생활의 비밀번호입니다. 비밀번호가 있는데 다른 번호를 아무리 눌러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먼저 성령충만을 사모하시고 부르짖어 기도하시고 성령충만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과 평화롭게 하실 것이고, 자신과 평화롭게 하실 것이며, 이웃과 평화롭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