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22
11월27일 [대림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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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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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buxklAEkmgA (은성제 요셉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7500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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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세상의 옷을 벗고, 불멸의 옷, 예수 그리스도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또 다시 맞이한 대림 시기, 첫번째 주일 독서들과 복음 말씀을 쭉 읽고 묵상하다가 유난히 눈길이 가는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품위’라는 단어였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서 13장 12~14절)
품위라는 단어를 접하니 많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분의 제자로서,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에 걸맞는 품위나 품격을 갖추고 살아가고 있나?’ 반문해보니 더욱 큰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저뿐만 아니라 적지않은 분들이 품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국민의 지도자요 대변자, 봉사자로서 그에 걸맞는 품위는 기본인데, 품위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모 정당 국회의원들은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품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인간 존재로서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나 예의범절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찌 그리 똘똘 뭉쳐 집단적 천박함과 몰상식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지 안타깝습니다. 너무 신기한 것이 백명도 넘는 그 많은 분들 가운데, 품위는 고사하고 평범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분이라고는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꿈꿉니다. 품위있는 삶, 품위있는 언어, 품위있는 행동, 품위있는 노년, 품위있는 죽음... 그러나 백방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품위는 커녕 추악함과 천박함만 덕지덕지 남게 됩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자신의 신학 사상을 나름 정리합니다.(사상편: 1장~11잘) 이어서 그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의화되 그리스도인으로서 윤리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훈계합니다.(훈계편: 12장~16장)
훈계편에서 바오로 사도는 의화된 그리스도인에게 걸맞는 행동거지,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생활 방식에 따른 새로운 삶, 다시 말해서 성령에 따른 행동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시대’‘결정적인 시점’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강조합니다. 그때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때이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입니다.
주님 재림은 역사의 밤과 낮은 가리는 결정적인 분기점입니다. 따라서 재림이 가까이 다가오면 인류 역사의 밤은 종말을 고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립니다. 그때 모든 죄악은 사탄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선과 의가 구현되는 때이므로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죄와 저주 상태에서 의화와 구원의 상태로 변화됩니다.
새로운 세상, 결정적인 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상의 옷, 어둠의 옷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대신 빛의 갑옷, 불멸의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일일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매사 매 순간 그분께서 나와 동행함을 강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과 나는 따로 따로가 아니라 일심동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갑옷으로 바꿔입는 과정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낡은 옷, 과거의 남루한 옷, 옛사람의 옷을 미련없이 훌훌 벗어던지는 일입니다.
낡은 옷을 벗는 행위는 자신의 지난 죄와 허물을 깨닫는 일, 회개하는 일, 새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의 새로운 탄생으로,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 십자가에 의한 새로운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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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님을 뵙는 기쁨과 설렘, 그리움과 기대로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
내년 봄 화사하게 피어날 수선화며 튤립 구근을 열심히 심고 있습니다. 피정 오신 교우들이 군락을 이룬 청초한 꽃들을 보고 탄성을 올리고 사진을 찍고 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꽃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심는 처지가 되다 보니, 그 작업이 절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화사한 꽃 무리 그 배경에는 누군가의 노고가 있다는 것, 그래서 꽃 한 송이 앞에서도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땅을 갈아엎은 후 고랑을 내고, 고랑 사이에 구근을 일일이 꽂고 나서 흙을 덮어줍니다. 혹한을 잘 넘기라고 볏짚도 덮어줍니다. 그리고는 꽃대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지요.
기다림이라는 단어 참 가슴설레게 합니다. 오랜 세월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살다 보니 너그러움, 여유, 유유자적, 은근함, 결국 기다림의 영성, 기다림의 미학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기다림이 부족합니다. 어떤 지향을 두고 열렬히 간구하고 또 실제적인 삶 안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면 이제 여유를 갖고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빠름’을 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름’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입니다. “인간에게 큰 죄가 두 가지 있는데 다른 죄들도 모두 여기에서 나옵니다. 조급함과 게으름이 그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때 정말 한 3분만 참았더라면!’ 하는 교도소 수감자들 제가 한둘 만난 게 아닙니다. 이미 깨져버린 사랑,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인연들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결국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함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대단하십니다. 인내의 달인이셨습니다. 성격 급한 저 같았으면 30년 동안 나자렛에서의 숨은 세월을 못 참고 폭발했을 것입니다. 대체 이 아까운 시간 다 흘러가고 언제 공생활 시작할거냐고, 하느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아버지께서 신호를 보내실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사사건건 트집 잡고 늘어지는 적대자들, 저 같았으면 한번 싹쓸이를 하던지 판을 뒤집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대림 시기 첫날을 맞이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 부활에 앞서 그를 준비하는 사순시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대축제 성탄에 앞서, 그를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있습니다.
그냥 기다림이 아닙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주님을 뵙는 기쁨과 설렘, 그리움과 기대로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내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너그러운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결국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고대하는 영적인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우리에게 지침으로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24장 42절)
많은 경우 우리는 외칩니다. 왜 빨리 하느님께서 내 이 큰 고통, 깊은 슬픔에 개입하지 않으시는지?이 비정하고 사악한 세상을 왜 빨리 깔끔히 정리하지 않으시는지? 왜 저 악인들이 떵떵거리며 살도록 마냥 놔두시는지...
하느님은 우리처럼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몇 사람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인류 전체를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동작이 느리십니다. 대신 크고 여유로운 걸음을 걸으십니다. 우리 죄인들이 충분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해 아주 천천히 시험지를 걷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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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ImBWvRUe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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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이 깨어 준비하는 삶일까?>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그리고 복음 내용은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깨어 준비하던 이들은 구원받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를 알지 못한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교회라는 방주에 타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 24,38-39)
깨어 준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은 그러니까 ‘바쁨’입니다. 우선 너무 바빠서 죽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으며 노아의 홍수 때처럼 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신이 없어 깨어있지 못한 이유는 잘못된 ‘희망’ 때문입니다. 희망을 이 세상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죽기 일보 직전에도 용서를 청하러 온 동생에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이런 것이 놀라운 이유는 바로 ‘죽음’ 앞이라는 조건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런 집착을 버리지 못함이 놀라운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주님께서 오실 때를 아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몰라도 매일이 주님께서 오실 수 있음을 아는 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따라서 ‘오늘 죽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다행히 할머니의 돌아가심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어렸을 시절을 지냈고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오늘도 죽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잠이 죽음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고 죽음을 무서워하면 잠도 무서워하게 됩니다.
잠잘 때 기분 좋게 잘 수 있다면 깨어날 때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처럼 기분 좋은 잠을 자려면 하루가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하루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내일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천상의 것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힘들지 않습니다.
저는 대학교 때 이휘재 씨를 질투했습니다. 나의 희망이 이 세상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지금 희망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성공한 삶이다!’라고 생각하니 버티는 삶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희망’인데,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게 만드는 것도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을 희망하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것을 희망하면 이 세상 것들이 쓰레기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갖지 못해도 버틸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나뭇잎을 찾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더니 나뭇잎이 없는 것에 대해 더는 절망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천상의 것을 희망하게 되었고 그때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희망을 바꾸지 않으면 불러도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제의 길로 저를 아주 오래전부터 부르고 계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 노아가 모든 사람을 배로 초대해도 그들의 희망은 이 지상 것에 있었기 때문에 노아의 부르심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사라져버릴 이 세상, 가라앉는 배에 집착하지 맙시다. 우리 희망은 하느님 나라, 천국에 있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희망을 품으면 이제 가지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 주셨으면 나도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주셨기에 하느님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내가 하느님이 됩니다. 이렇게 되니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아무리 실패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많은 실패가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지상 것에 대한 희망을 접고 천상의 것을 희망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이것은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천상의 것을 희망하면 내가 천상에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집에는 하느님의 자녀만 삽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결국 행복해집니다. 행복은 자존감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병에 걸렸음에도 “오, 아름다워라!”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믿으면 내가 사랑이 됩니다. 이는 마치 태양이 태양이기 때문에 뜨거운데 우리가 그 태양 덕분으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사랑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에게서 사랑을 느낍니다. 나는 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준비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 때문에 위로 오르는 사랑의 몸통과 같습니다.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가 없으면 사랑은 커지지 않습니다. 내가 천상을 더 희망하고 하느님임을 더 믿어야 사랑이 더 커집니다. 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없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마치 오징어잡이 배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다. 내가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그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더 어두움으로 들어가는 길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은 이 향주삼덕에 기인합니다. 향주삼덕을 닦는 오징어와 같은 존재만이 결국 방주에 탈 수 있고 천상 시민이 됩니다.
그런데 그 희망과 믿음과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나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분 품에서 자라난다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16년 전 방송 출연하였던 아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가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혼자 어린 자신을 키우던 그 모습을 아들이 더 늦기 전에 눈에 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들은 다행히 어렸을 때 수술받아 한쪽 눈만 0.2의 시력을 가졌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해 준 희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아들은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이제 아버지의 눈이 되어주겠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 아들에게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들은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살 희망도 가질 수 없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을 수도 없으며 그래서 아버지나 친구들을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믿어주었고 희망했으며 사랑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희생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쏟아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머물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쏟아지는 교회에 머물 줄 아는 것이 깨어 준비하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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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뉴저지 가톨릭방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방송미사 녹화를 부탁하였습니다. 아직 9월인데 대림 1주와 2주의 미사를 녹화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미리 준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기에 기꺼이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2023년 대림 제1주일은 다른 해보다 3달 먼저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시작합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을 ‘대림(待臨)’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교회는 그 메시아가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 메시아는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이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은 2,000년 전에 오셨던 메시아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다시 오실 메시아를 깨어서 기다라는 것입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는 데에도 참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붉게 익은 대추 한 알에도 참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 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수학,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미는 진, 선, 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 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깨어 있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 있는 걸까요? 가치의 차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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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4,37-44: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의 주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주님의 오심을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결정적으로 오시는 분을 맞을 수 있도록 깨어 있는 자세로 사는 것이다. 이는 바로 형제애와 평화가 실현되어야 할 공동체, 즉 찬란히 빛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 교회이다. 교회의 기능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와 전 인류의 일치 표지이며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기록은 절대 끝나지 않는 주님의 오심, 즉 그리스도의 최초 오심으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오시는 분(사도 1,4 참조)을 맞으러 가는 여정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주님과 만남을 한순간도 그냥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 엄습 되는 잠이나 피곤함의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이 점에 대해 말한다. 예수께서는 노아 시대의 일을 회상시키면서(37-39절)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신다. 첫째, 하느님께서 불시에 찾아오시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매일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 너무 빠져있으면 안 된다는 것, 둘째, 홍수 때처럼 주님의 오심에 따르는 위협적이며 위험스러운 상황에 관한 점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파괴와 저주의 사건이기도 하였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위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하였다.(창세 7,11-23 참조) 오시는 하느님 앞에서의 심판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즉 인내로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처럼 당신께 개방되어있고 당신의 말씀을 온순히 따르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을 거절하여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잘 받아들여 온순히 따르고 실천했는지 아닌지가 그때 드러날 것을 가르쳐주신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이 언제이든 간에 두려움과 깨어 있음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서워함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42절). 이 말씀은 여러 군데서 반복되고 있다. 이는 밤을 지키는 야경꾼들같이 잠을 자다가 도둑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3-44절) 도둑이 오는 때는 언제인지 모른다. 항상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어 기다림은 주님께서 우리 삶 속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오시는 그 모든 오심을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마지막 오심에 대해 더 잘 준비하는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두 번째 오심에 놀라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 오심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Enarrat. in Psalmos, Ps 95,14)라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는 잠자지 말라는 권고에서 더 나아가 잠에서 깨어나라고 한다. 우리의 과거 생활이 그리스도라는 빛 속에서의 삶이 아니라, 밤에 묻혀있는 잠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에 들어와 계신 지금은 그 밤에서 벗어나 대낮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위한 근본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로마 13,11절) 이 말씀은 이미 이 순간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그분과 만남을 통해 점점 더 실현되어 가는 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은 우리의 삶과 역사 내에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오심의 종합이며 완성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얼마나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깨어 있고, 주님을 맞아 드릴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밤의 잠에서 깨어나 빛 속에서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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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정수용 이냐시오신부님]
<어려운 기다림 vs 쉬운 기다림>
여러분은 다음 중 가장 참기 힘든 것이 무엇이신지요? 1)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 누르지 않기. 2) 버스 정류장에서 남은 도착 시간 확인하지 않기. 3) 전자레인지 문 열지 않고 타이머 끝까지 지켜보기
세 사례의 공통점은 다들 짧게는 몇 초 길어도 몇 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일들을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내가 따로 누르지 않아도 엘리베이터 문은 닫힙니다. 시내버스는 도착 시간을 확인한다고 해서 더 빨리 오지 않습니다. 전자레인지 역시 내가 입력한 시간이 다 지나야 '땡' 하는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는 일을 힘들어할 때가 많습니다. 뭐든지 빨리빨리 처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우리 시대 사람들은 일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순간을 힘들어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고, 버스 도착 시각을 계속 확인합니다. 전자레인지는 아직 10초가 남았어도 먼저 문을 열어 작동을 종료시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기다림의 시기가 시작했습니다. 대림시기는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전례적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4주간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 신앙인의 삶이라는 사실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일상에서 아주 짧은 순간 기다리는 것도 어려워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더 잘 기다릴 수 있을까요? 물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음식이 데워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결코 같지 않습니다. 앞서 예를 든 경우는 상황이 바뀌고 일이 완성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렇게 12월 25일, 혹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실 때까지 수동적으로 시계와 달력만 보며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닙니다. 신앙적 의미로 우리의 기다림은 매 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니 깨어 있어라."(루카 24.42)라고 말씀하시지만, 이 말은 졸음을 참으며 억지로 견디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보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완성을 이루실 때가 언제일지 모르니 잘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24.44)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가장 먼 저 할 일은 지금 나는 무엇에 취해있는지부터 깨닫는 것입니다. 돈입니까? 허영입니까? 자만입니까? 깨어 준비하며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 지금 내가 취해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고, 능동적으로 주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결코 힘든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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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는 봄날의 햇살을 기다립니다. 한여름 숨막히는 더위에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을 기다립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기다림을 경험합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이날을 시작합니다. 이 기다림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제1독서는 메시아 임금에 대한 기다림을 예언합니다. 그날에 하느님의 심판이 메시아 임금에게 전해질 것인데, 많은 백성 사이에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으로 모두 모일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분의 길”,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라는 표현은, 신앙인이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덕목으로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을 제시합니다. 한편 제2독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구원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잠에서 깨어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삶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 재림이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 들에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맷돌질을 하던 두 여자의 이야기처럼 당신의 재림도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니 늘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 안에서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을 재확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과 실천으로 늘 깨어 준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만남을 기다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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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김명겸 요한 신부님]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준비의 시작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그것을 준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즉 우리는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심판과 연결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억하는 것은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며 삶을 내 멋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하느님 앞에 내 삶을 펼쳐 놓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편안함과 만족은 세상의 모든 기준을 사람에게 맞추려 합니다.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다가 그것이 잘되지 않으면 또 다른 방식을 찾아서라도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 방법은 기술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무한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존재는 신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고 싶어 할수록 인간은 신을 믿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절대 권력자가 되어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아마도 그런 마음 때문에 홍수 이전 시대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계시지 않으며 하느님에 의한 홍수도 당연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준비하는 것은 내가 피조물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계를 지닌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에 모든 것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의 한계를 삶의 순간마다 바라보고 그것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깨어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다면 하느님께서도 마지막 날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선택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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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다림>
마태오 24,37-44 (깨어 있어라)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림>
오시는 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던 내가
오신 님께
낯설지 않도록
오시는 님을
닮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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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나를 기다리시는 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탄축일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립니다.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해 보면, 첫째로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우리의 구원자로 탄생하셨고 실제로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계시니 그날을 경축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세주를 목마르게, 4천 년을 기다렸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주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대림초를 4개로 하는 것은 바로 4천 년을 4주간으로 상징화하기 때문입니다. 4개의 초는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초의 색깔은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하여 점점 밝은색으로 불이 밝아짐으로써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기쁨을 표현하고 동시에 우리의 마음도 맑고 또 밝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죄의 허물을 벗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정작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문이 닫혀있었고 자기들만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오시더라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심판자 주님을 기다립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24,30).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미사 안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날이 준비된 사람에게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날입니다. 속량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루카 21,28)
구세주 빨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하실 분으로 빨리 오시면 좋으련만 지금 당장 심판자로서 오셔도 당당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코린 1,8)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1코린 1,9)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정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레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 예수님 안에 머물러, 오시는 주님을 당당히 영접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비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당을 찾게 된 동기가 이웃에 사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부부의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성당에 가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고 어린 자녀에게 일직 신앙에 눈뜨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느님 말씀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전교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 때문에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히게 하여라.”(마태 5,16)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신 탈랜트를 잘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자기 그릇대로 빛을 발하는 것이 주님을 잘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빛을 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 의미는 우리의 일상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희망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뜨거운 감동을 주셨던 그 기쁨을 기다립니다. 묵시록 3장20절에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하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사실 성당에서는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고 영혼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저런 핑계로 그분을 모시지 못할 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미사 안에서 성경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내가 밖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입니다. “님은 내안에 계셨지만 나는 님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리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을 조배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당신 앞에서 무릎 꿇어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기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지 않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에 앞서 언제나 기다려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들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끝 날, 종말이 언제 오든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시는 그분이 계신데…그날을 대비하여 지금 깨어 준비하면 됩니다. 그날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49,18)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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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제로 살아가며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음을 자주 깨닫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는 생각에 눈물의 기도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제 생활을 20년 넘게 하면서 주님께서 저를 특별히 선택하셨음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만약 저 같은 사람이 짝꿍을 만나 결혼했다면 잘 살았을까요? 저의 부족한 능력과 저도 파악하기 힘든 성격을 볼 때, 마누라와 자식들 모두에게 큰 시련을 줬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을 저를 맡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품 안에 있어야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겠지요.
이제 사제가 되어서는 특히 여성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극성스러운 여성 몇 분을 보내주셨습니다. 저 좋다고 쫓아오시는 그분 덕택에 여성이라면 근처에도 가기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넘어가니, 여성의 유혹도 없어졌습니다. 아마 이러면서 웃으실 것 같습니다.
‘이제는 네가 뭘 하겠니? 나 아니면 먹고나 살 수 있겠어?’
불러주신 그분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특히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주님밖에 모릅니다. 미리 알면 시간에 맞춰 잘 준비하겠지만,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순간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열심히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새해라고 하는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이 땅에 강생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지요. 이 기간에 주님 오심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12월 25일이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성탄 대축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 판공성사도 보고, 구유와 성탄 트리를 만들면서 예수님 오심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시 오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언제일까요?
만약 노아 시대에 대홍수가 날 것을 사람들이 미리 알았다면 너도나도 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면 될까요? 다시 오시는 날에 땅을 치며 후회하는 것보다, 주님의 합당한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지금 당장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준비하며 사는 삶을 통해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구원에 더 가까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단호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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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위대한 깨어 있음>
바오로 사도는 지금이 어떤 때인지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때는 어떤 때이고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어떤 때와 같은 때입니까?
때에는 여러 때가 있고 그 여러 때 가운데 지금은 어떤 때이고, 사람에 따라 지금이 어떤 때인지 다릅니다.
수험생에게는 지금이 놀 때이거나 공부할 때이고, 재산을 굴리는 사람에게는 지금이 땅이나 주식을 사고팔 때이고, 청춘 남녀에게는 지금이 사랑을 만날 때이거나 결혼 적령기이고, 늙은이나 중환자에게는 지금이 생명과 죽음을 놓고 싸울 때이고, 신앙인에게는 지금이 회개의 때이거나 구원의 때 곧 주님께서 오실 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지금이 어떤 때라고 생각하는지 다를 것이고, 각기 자기가 중요시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자기 정체성이 신앙인의 경우, 지금은 늘 회개의 때이고 구원의 때이며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그래서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바오로 사도는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고,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됐다고 하고, 주님께서는 지금이 바로 당신이 다시 오실 때이니 우리에게 지금은 그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대림의 때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잠에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때이기에 우리는 오늘 두 단어 곧 잠과 주님을 더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이란 단지 물리적인 잠만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대림 시기에 기도하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더 많아서는 안 되겠지만 영적인 의미에서 잠이란 주님께 대한 의식이 잠든 것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까지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더라도 이제는
그 잠 곧 주님을 의식하지 않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물리적으로 깨어 기도만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어둠의 행실 곧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를 그만두라고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술을 많이 마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라도 주님께 대한 의식은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술꾼이어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저는 기도나 술을 먹지 않을 때 주님께 대한 의식이 깨어 있는 것보다도 술을 먹었을지라도 주님께 대한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 더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저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들은 얘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대전에 있을 때 그곳 본당의 열심한 신자들은 술을 많이 먹고 난 뒤에도 집으로 바로 가 잠자지 않고 꼭 성당에 들러 조배하고 가 잠을 잤다고 합니다. 물리적으로는 술에 취했지만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는 취해 곯아떨어지지 않는 위대한 깨어 있음이지요.
그러므로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도 다윗의 서원을 상기합시다. 내 집안에 들어가지 않으오리다 * 침대에도 오르지 않으오리다. 이 눈에서 잠을 거두오리다 * 눈두덩에서 단잠을 거두오리다.(시편 132, 3-4)
어제 많은 분이 문자로 저의 축일을 축하해주셨는데
제가 문자를 하지 않기에 일일이 감사하다는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적절치 않지만 이곳에서 대신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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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의 기쁨, 대림의 희망, 대림의 평화>
- 늘 깨어 있어라! -
참 기쁨은 대림의 기쁨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입니다. 참 희망은 대림의 희망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입니다. 참 평화는 대림의 평화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대리는 평화입니다. 이런 대림의 기쁨이, 이런 대림의 희망이, 대림의 평화가 맑은 정신으로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며 살게 합니다. 대림시기 새벽 성무일도 다음 초대송 후렴으로 기쁘게 하루를 시작한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오실 임금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이어지는 찬미가도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와 함께 우리 마음을 기쁨과 희망의 빛으로 환히 밝혔습니다.
“맑고도 맑은 소리 메아리친다, 어두움 물러가라 울려퍼진다.
깊은잠 깨어나라 밝혀주시듯, 예수님 하늘에서 비춰주신다.”
이어지는 아침기도 첫 후렴도 참 흥겨웠습니다. 해마다 대림시기 짧은 기도로 끊임없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그날이 오늘입니다. 주님이 오실 그날의 기쁨을 앞당겨 살아가는 대림시기 우리들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아름다운 전례가 대림의 기쁨을, 대림의 희망을, 대림의 평화를 한껏 고무합니다. 대림의 여정입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요, 주님을 찾아 가는 우리의 순례 여정이요 이런 깨달음이 역동적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마중 나가는 우리들이요 주님과의 상봉시간도 날로 가까워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대림에 앞서 온통 깨어 살 것을 촉구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러니 그날과 그 시간에 대비하여 늘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에 대비하여 집중적 깨어 살기 영적 훈련 기간이 오늘부터 시작한 대림시기입니다. 이어지는 노아때의 홍수의 비유도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려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때나 오늘이나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노아만이 깨어 살다가 이런 재앙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똑같은 외적 환경에서 내적 삶도 참 판이함을 봅니다.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며, 맷돌질 하는 두 여자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 합니다. 바로 내적으로 깨어 살았던 자만이 구원 받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복음의 결론 말씀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막연히 깨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전사’로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로마서의 말씀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회심으로 이끌었던 말씀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대림시기에 잘 드러맞는 권고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절박한, 절실한 심정으로 깨어 준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답게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러 나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빛의 갑옷을 입혀 주시고, 당신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학인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이듯,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주님의 학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환시가 우리의 삶이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배움의 여정’임을 일깨웁니다. 참으로 평생 주님을 공부하는 수행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주님께 대한 공부뿐입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주님께 배우고자 주님의 산, 불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주님의 집, 요셉 수도원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대림의 꿈은 평화의 꿈입니다. 오실 대림의 주님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평화의 꿈이 바야흐로 오실 주님을 통해 실현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며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으리라.”
얼마나 많이 회자되고 있는, 얼마나 고무적인 평화의 주님인지요! 하느님의 염원이, 우리 인류의 궁극적 염원이 이런 평화의 꿈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평화의 전사로, 평화의 일꾼으로, 평화의 도구로 살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대림시기만이라도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은총의 대림시기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대림의 기쁨, 대림의 희망, 대림의 평화를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적 야곱 집안인 우리 모두를 격려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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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니 깨어 있어라.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2.44)
<보다 더(radical)를 살자!>
평화를 빕니다. 교회 달력인 전례력으로 오늘은 '새해 첫날이자, 새해 첫 번째 주일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가해)에는 '보다 더(radical)'가 이루어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다 더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한 해!' '보다 더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한 해!' '보다 더 용서하고, 화해하는 한 해!' '보다 더 영과 육이 함께 건강한 한 해!' 이런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안에 충만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대림(待臨)시기입니다. 교회는 이 시기에 '두 기다림'인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대림시기는 오늘 복음(마태24,37-44)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깨어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은 어느 날에 올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대림시기 때 우리는 독서로 메시아의 도래를 예고하는 말씀인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고 외칩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 교회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외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13,11-12)
오늘 독서와 복음은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이유와 그 구체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새해입니다. 어제의 모습은 다 벗어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작년보다 더를, 어제보다 더를 살려고 항상 애쓰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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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QEhQInQS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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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 44)
재림(再臨)이 있기에
대림(待臨)이 있습니다.
보라색 대림초에
또 다시 불이
켜졌습니다.
간절한
기다림으로
새해를 맞이합니다.
깨어있고
준비하는
기다림은
우리 마음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세상의 종말(終末)은
새로운 삶의
희망찬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구원은 새로워지는
희망의 깨어있는
체험입니다.
체험은 기다림으로
깊어지고
드디어
오실 분을
만나는 기쁨으로
새로워지는
삶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기다림이고
하느님 입장에서는
재림과 탄생입니다.
간절한 기다림
간절한 탄생입니다.
참된 기다림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기다림의 시작은
새로운 생활의
시작입니다.
생활이 바뀌지 않는
기다림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참된 기다림은
참된 신앙입니다.
믿기에 기다리며
바라기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다리는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달라집니다.
삶을 바꾸는
기다림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기다림 없는
탄생은 아프고
기다림 없는
여정은 암담합니다.
기다림은
빛나는 빛입니다.
마음을 밝히고
세상을 밝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기다림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가난한 기다림을
봉헌합니다.
새해의 기다림은
달라진 우리의
생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절제된 생활
기도의 생활
감사의 생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빠져있는
깨어있음은
가짜입니다.
기다림의 빛은
변화의 빛입니다.
우리의 생활 안으로
오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생활의 맑은 빛을
밝히길 원하십니다.
새해의 희망찬
기다림의 빛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환하게 빛나길
기도드립니다.
기다림의 빛은
생활의 빛입니다.
생활의 빛은
깨어있는 실천
준비하는 공동체의
신앙임을 믿습니다.
또 다시 구원의
기쁜 새해를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기쁜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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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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