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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비화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자비화
영국인들이 개발한 남인도 최대의 무나르 차밭 |
아쇼카대왕은 아버지 빈두사라왕이 정복하지 못했던 동인도 칼링가왕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킴으로써 인도를 통일한다. 마우리아왕국의 군사력은 막강하여 대적할 나라가 없었고 코끼리부대의 위용은 지축을 흔들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인도 전역의 통일은 아니었다. 데칸고원 밑의 남인도 정복은 포기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아쇼카대왕은 국력이 미약했던 남인도의 세 왕조를 정복하지 않았을까? 당시 남인도에는 코친을 수도로 하는 체라왕국과 마두라이를 수도로 하는 판디아왕국, 탄조르를 수도로 하는 촐라왕국이 있었던 것이다. 고다바리강과 크리슈나강을 건너면 바로 남인도인데 아쇼카대왕은 정복을 멈추었다. 아쇼카대왕의 마음에 중대한 변화가 해일처럼 소용돌이 친 까닭이었다. 칼링가전쟁에서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목격한 아쇼카대왕은 칼을 버리면서 부처님 법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을 맹세했던 것이다.
정복을 포기하는 대신 남인도에는 아쇼카대왕의 명을 받은 전법사 라키타를 보냈다. 라키타는 한 왕국에 머무르지 않고 남인도의 세 왕국을 넘나들었다. 다행히 세 왕국의 왕들은 전법사의 활동을 보장했고 사원 건립을 허락했다. 불교가 융성해지는 기반을 보장해 준 것이었다. 아쇼카대왕은 부처님 법이 남인도에 전파되는 것으로 만족했다. 굳이 남인도 땅을 정복할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영국, 남인도 최대의 무나르 차밭
수동식 가위질로 차를 따는 노동자. |
일행은 까르마이 꾸탐 사원 터 가까운 숙소에서 1박 했다. ‘반쪽 부처님’을 참배한 아쉬움은 절로 수그러들었다. 일행은 아침 일찍 무나르 차밭으로 향했다. 무나르의 ‘무’는 3이란 숫자이고, ‘나르’는 강의 발원지라는 뜻이라고 길잡이가 설명한다. 그러니까 무나르는 세 개의 강이 발원하는 고산준령인 것이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서행한다. 고도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방향은 인도남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셈인데, 벌써 멀미를 하는 사람이 속출한다.
해발 2000미터의 산자락 전체가 초록빛 융단을 깔아놓은 듯 장관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차밭 풍경 너머에는 남인도 사람들의 슬픈 식민지 역사가 차나무처럼 깊이 뿌리박고 있다. 영국이 자국의 홍차 수요를 위해 1880년부터 차나무를 무나르에 재배하기 시작한바 차와 노동력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던 것이다. 무나르의 차나무 수명은 40년이라고 한다. 40년이 넘으면 뽑아내고 다시 어린 묘목을 심는다고 하는데, 과연 한쪽 산자락에서는 어린 차나무들이 푸른 천을 펼쳐놓은 것처럼 자라고 있다.
점심을 무나르 산중의 휴게소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나서도 서너 시간을 달렸지만 아직도 차밭이 굽이굽이 전개되고 있다. 차나무 세상의 별천지에 온 것 같다. 장시간 이동에서 오는 피로를 푸느라 버스에서 잠시 내려 휴식을 취해본다. 때마침 찻잎이 막 피어나고 있다. 이곳은 1월 초순인데 우리나라 절기로 치자면 곡우 안팎 같다.
찻잎을 따는 노동자들이 차밭에 일렬횡대로 줄지어 수동식 기계로 가위질을 하고 있다. 가위질할 때마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차밭 골짜기를 울리고 있다. 노동자의 하루일당은 8000원에서 9000원, 채취량으로 지불할 때는 1kg당 20루피(약 400원)라고 하니 값싼 노동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이 없어 노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차 따기는 15일만 쉬면 찻잎이 계속 올라와 1년 내내 지속할 수 있단다. 차밭의 관리인 듯싶은 사내가 우리 일행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나는 인도 사내를 본 순간 또다시 달마대사를 떠올리고 만다. 달마대사를 닮은 사람과 벌써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선가(禪家)에서의 차는 달마대사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설화이지만 달마가 졸음을 참느라고 눈썹을 뽑아 동굴 밖으로 던졌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눈썹이 차나무가 됐더라는 얘기다. 달마의 제자인 혜가 역시 그 차나무 잎을 달여 마심으로 해서 졸음을 극복했다고 한다. 찻잎에 정신을 맑게 하는 각성(覺醒)의 성분이 있으니 면벽 좌선의 수행자인 달마와 혜가가 차를 마셨다는 것은 전혀 생뚱맞은 얘기는 아닐 터이다.
이윽고 일행은 해발 1370미터에 위치한 차 만드는 공장인 크리슈나 회사를 견학하기 위해 하차한다. 1만1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크리슈나 회사에서는 연간 2400만 톤의 차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1개 차회사의 생산량이 우리나라의 여러 지역의 총생산량과 비슷하다.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은 달달한 짜이를 대접받고 나니 홀연히 피로가 사라진다. 일행 중에는 회사 구내상점에서 차를 선물로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크리슈나 회사의 정원에 자라고 있는 차나무의 차씨를 몇 개 채취하는 것으로 선물을 삼는다. 국내로 돌아가 이불재 뜨락에 심어볼 참인 것이다.
무나르 차밭 안에 형성된 마을. |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해안의 포탈라카산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다시 마두라이 쪽으로 가는 산길을 달린다. 차밭은 줄어들어 있지만 대신 산자락에는 보라색과 흰색의 야생화가 눈에 띄게 많아진다. 쿠른지꽃과 종(bell)꽃이다. 이곳 역시 아직은 무나르 지역이다.
마침내 일행은 인구 1만 명 정도 사는 마을로 들어선다. 하룻밤 묵기 위해서다. 협곡에 자리한 도시형 마을인데 한쪽 언덕에는 이슬람교인, 다른 쪽 언덕은 힌두교도와 기독교도가 살고 있다. 우리 일행이 머물게 될 숙소는 중간 지점에 있다. 숙소 지척에 운 좋게도 까따깔리 공연장이 눈에 띈다. 께랄라 지역에서 10세기경에 발생한 까따깔리는 중국의 경극과 일본의 가부키와 함께 동양의 3대 무언극으로 알려져 있고 인도의 5대 전통연극인 것이다. 중국의 경극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로 치자면 처용무와 그 성격이 비슷하지 않나 싶다.
공연장에 들어가 보니 석유냄새가 코를 찌른다. 자세히 보니 역시 께랄라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는 ‘깔라리 삐아뚜’라는 전통무술도 함께 공연하는 듯하다. 깔라리 삐아뚜의 마지막 단계는 둥근 원에 석유를 묻혀 불을 붙인 뒤 화염 속을 오가는 무술인 것이다. 그러나 일행은 시간이 없어 깔라리 삐아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무언극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전통극의 특징은 어디나 흡사한 듯싶다. 우리 처용무도 처용의 가면을 쓰고 춤을 추어 역신을 쫓는다는 내용이고, 까따깔리도 악마가 남자를 유혹하지만 남자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내용으로 춤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유사한 것이다.
께랄라 지역의 전통무언극 까따깔리 배우가 분장하는 모습. |
다음날에도 일행은 아침 일찍 서두른다. 마두라이로 가려면 웨스트가트 오브 인디아 산맥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버스는 차밭에 펼쳐지는 안개를 헤치고 달린다. 또 몇 시간을 달려야 점심이라도 먹을 자리를 찾을지 모른다. 큰 산맥을 하나 넘자, 완만한 구릉지대가 나타난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를 보니 이 지역을 말라이콧타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말라이(malai)는 타밀어로 구릉, 콧타(kotta)는 지방이란 뜻이다. 부처님이 여기까지 왔다는 기록도 보인다.
‘성의 동쪽 멀지 않은 곳에 낡은 가람이 있다. 뜰이나 건물은 황폐했으나 기초는 아직도 남아 있다. 아쇼카왕의 아우인 대제(大帝)가 세운 것이다. 그 동쪽에 스투파가 있다. 기단은 이미 붕괴되었으나 복발은 아직 남아 있다. 아쇼카왕이 세운 것이다. 그 옛날 여래가 이곳에서 설법하는 가운데 대신통력을 나타내어 무수한 사람들을 제도했다.’
또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포탈라카산을 설명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가면 스리랑카로 가는 포구가 있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말아야산 동쪽에 포탈라카산이 있다. (중략) 관자재보살이 왕래하며 머무르는 곳이다. 보살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신명을 돌보지 않고 강을 건너 산을 오른다. (중략) 관자재보살은 때로는 자재천의 모습으로, 외도의 모습으로 나타나 기원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 이 산에서 동북쪽으로 가면 해안에 성이 있다. 남해의 싱갈라국으로 가는 통로이다.’
일행은 다행히 조그만 마을로 찾아들어 점심 먹을 곳을 잡는다. 대숲이 우거진 곳의 식당인데 원숭이들이 달려와 끽끽 소리치며 일행을 환영하는 듯하다. 이곳 역시 관광지인 듯 외국인들이 간간히 보인다.
[불교신문 2885호/2013년 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