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릉빈가(迦陵頻伽)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상상의 새,
깃이 아름답고, 소리가 매우 맑다고 한다.
迦 부처 이름 가
陵 언덕 릉(능)
頻 자주 빈
伽 절 가
[유의어]
가라빈가(迦羅頻伽)
묘음조(妙音鳥)
비천(飛天)
빈가(頻伽)
빈가조(頻伽鳥)
선조(仙鳥)
호성조(好聲鳥)
호음조(好音鳥)
가릉빈가는 범어(梵語)의 가라빈가(kalavinka)를 번역한 것으로서, 한자음으로는 가릉비가(伽陵毘伽), 가라빈가(歌羅頻伽), 갈라빈가(羯羅頻伽), 갈라빈가(羯羅頻迦), 갈비가라(羯鞞伽羅), 갈라가라(羯羅伽羅), 가비가라(迦毗伽羅), 갈수가라(羯隨伽羅), 가란가(加蘭加)라고도 하며, 줄여서 빈가(頻伽)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새는 극락정토에 깃들이며 인두조신(人頭鳥身)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자태가 매우 아름답고, 소리 또한 묘하여 묘음조(妙音鳥), 호음조(好音鳥), 미음조(美音鳥)라고도 하며, 극락에 깃들인다 하여 극락조라 부르기도 한다.
머리와 팔은 사람의 형상을 하였고 몸체에는 비늘이 있으며, 머리에는 새의 깃털이 달린 화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래의 형태는 봉형(鳳形)에서 발전한 형상이라 생각되며, 또 일설에는 인도의 히말라야산 기슭에 산다고 하는 불불조(bulbul鳥)라는 공작의 일종이라고도 전한다.
이러한 반인반수상은 여러 지역과 각 시대에 걸쳐서 묘사되던 것으로, 그 형상을 비교해 볼 때 다같이 영적인 인격신(人格神)으로서 동물형상을 의인화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가릉빈가 형상은 중국에서는 한나라 이후에 등장하며 그 뒤 고분벽화, 또는 분묘의 화상석각(畫像石刻)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나라의 고동기(古銅器)에서는 매우 상징적인 인두조신상이 보이는데, 머리는 여인의 모습에 깃 달린 관을 쓰고 있고 몸체는 비늘처럼 표현되었으며 양 날개를 펼쳐 둥근 원을 그린 모습이다. 또, 한나라 와당(瓦當)의 우인상(羽人像)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인 덕흥리(德興里) 벽화고분과 안악(安岳)1호분에 가릉빈가와 유사한 형상이 보이는데, 특히 덕흥리벽화고분의 형상은 머리의 표현을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빈가조의 형상을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
또한, 수나라의 고졸(古拙)한 형식에서 훨씬 발전된 당나라의 가릉빈가문 형상은 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의 유구(遺構)인 경주월성지(月城址), 황룡사지(皇龍寺址), 창림사지(昌林寺址), 보문사지(普門寺址)와 탑동(塔洞) 부근 일대에서 발견되는 와당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
와당에 나타나는 가릉빈가문은 대개 세 가지 형식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새의 형상이 정면을 향하며 양 날개를 활짝 펴서 위를 향해 원을 그린 모습이다. 이 형상에는 머리 위에 특이한 초화형(草花形) 화관을 얹고 연화좌(蓮花座)에 서 있는데, 주변의 보운문(寶雲文)이라든지 표현형식이 불교적인 의장요소가 짙다.
두 번째는 창림사지에서 출토된 와당에서와 같이 반좌향한 자세로서 상체의 인신(人身)은 두 팔을 높이 치켜든 모습이다. 이 형상의 특징은 머리 위에 얹은 화관이 또한 작은 새의 날개 모양으로 되어 있고, 양 날개는 약간 펼치고 있는 자태이다. 그 가장자리에는 12엽 연판(蓮瓣)이 촘촘하게 둘러져 있어 매우 화려한 형태를 보여준다.
세 번째는 와당 내구(內區)의 전체에 꽉 차게 가릉빈가문을 배치하고 그 가장자리에 24엽의 연판무늬를 아주 촘촘하게 장식한 모양이다. 가릉빈가문은 정면을 향하여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양 날개가 활짝 펴져서 가득차게 원형을 그리고 있다. 머리에는 새의 깃털이 초화형으로 장식되어 있다.
석탑에서는 주로 통일신라기의 유물에서 나타난다. 쌍봉사철감선사탑(雙峰寺澈鑒禪師塔, 국보 제57호)에는 상대석 위의 탑신과 굄돌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만들고 그 안에 주악상인 가릉빈가를 부조하여 넣었다.
또,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보물 제137호)에서는 하대석 윗면 각 면에 날개를 펼친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밖에 역시 쌍봉사철감선사탑비의 비좌(碑座) 상면의 잔편(殘片) 일부에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고려시대 것으로는 연곡사(鷰谷寺) 동부도·서부도·북부도의 안상무늬 안에 새겨진 가릉빈가문을 볼 수
있는데, 그 양식은 대개 통일신라기의 여운이 짙게 나타난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사람들은 가릉빈가를 음악신 또는 음악의 창시자로 믿고 있는데, 인도 음악의 기원 전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도 고대 전설에 의하면, 설산(雪山, 히말라야산)에 신기한 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무시카(Musikar)라고 불리는 악기를 연주하는데, 일곱 개 구멍 마다 각기 다른 소리가 나며, 계절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소리의 높낮이와 곡조의 조화가 미묘하여 환희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릉빈가는 천년을 사는데, 수명을 다해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불을 피워 놓고 주위를 돌며 각종 악곡을 연주하며 열락의 춤을 춘다. 그러다 불 속에 뛰어 들어 타죽는다. 그러나 곧 따뜻한 재에서 한 개의 알이 생겨나 부화하여 과거의 환상적 생활을 계속하다가 또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는다. 이렇게 하면서 생사의 순환을 계속한다. 환상적인 가릉빈가에 대한 전설은 대대로 전해져 지금도 인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가릉빈가가 갖추고 있는 인수조신(人首鳥身) 형태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인도 기원설, 그리스 기원설, 그리고 한대(漢代) 화상석에 보이는 우인(羽人. 날개가 있는 신선의 일종)기원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릉빈가의 형태에 관한 한 다원발생적인 측면보다는 동서문화의 교류와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서기 전 4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 길을 따라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파급된 그리스 문명은 현지 문명과 융합하여 제3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다라 미술이고 간다라 불상이다.
동서문화의 교류와 융합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가릉빈가도 고대 인도신화 전설의 기초 위에,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천사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제3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가릉빈가는 서역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늘날 사찰 곳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