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척야산의 전설
송순자
“의인 한 사람이 민족을 구한다.”
국민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한 개인이 소리 없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홍천문화수목원장이신 김창묵 원장님을 보는 순간 놀라웠다. 현재 102세라 하는데 건강해 보였다. 그 산을 둘러보기 위해 매일 서울에서 홍천 척야산까지 출근을 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척야산을 공원화할 때 이미 70세가 되어 편안한 생활을 하셔도 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척야산에 250억의 자산을 쏟아 부어 공원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날씬한 키에 연약해 보이는 외모, 작은 손으로 척야산에 수많은 꽃과 시비와 시문을 만들고 개인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그 마음은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되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모자는 낡을 대로 낡아서 빛바래고 외투는 보푸라기가 일어난 옷을 입고 있었다. 그야말로 모자 하나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겼다.
인자하고 선한 눈매와 작고 꽃잎처럼 얇은 입술은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사람의 외모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강인한 마음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춘천에 오래 살았지만 ‘척야산수목원’이라는 말을 이제야 듣게 되었는데 등잔 밑이 어둠다는 말이 그래서 있나 보다. 가까이 두고도 정보가 없어 어둡게 지낸 것이다.
물걸리 동창마을이 특별한 곳이라는 곳도 이번 탐방을 다녀와서 알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은 1919년 4.3 운동이 있었던 곳이었고 면소재지도 아닌 작은 마을 다섯곳에서 모인 30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동창 만세운동을 펼치던 곳이었다.
항일운동의 역사적 마을이었다. 만세운동을 이끌던 ‘김덕원 의사’를 기리고자
김덕원 의사의 8촌 되는 김창묵 선생님께서 사재를 털어서 공원을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알리고자 하는 일이었다. 그분의 진정한 뜻은 잊혀져 가는 역사 인물에 대하여 널리 알리고자 비문과 비석을 많이 만들어서 설명 없이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분 옆에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아서 여쭈어 보았다.
“이 산의 면적은 어느 정도인가요?”하고 물으니
15만 평이라고 하시었다. 드론으로 측량한 것인가요? 질문하니 개인의 산을 사서 등기를 모아 계산하니 그렇더라는 말씀을 하시었다.
이 산에 심어진 나무들은 외국에서 사들인 나무도 많이 있고 연산홍 철쭉이 무리 지어 곳곳에 화려하게 피어있는데 그야말로 수고하지 않고 꽃길을 걷고 있음에 감사했다.
내 인생의 꽃길이 아닌가 착각도 했다.
김창묵 선생님은 민족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어 지난 시절 겪었던 일을 다시는 겪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신다.
나는 정상까지 꽃길을 걸어가면서 그 당시 독립 만세를 겁 없이 불렀던 동창마을 사람들의 용기에 감탄하고 김덕원 의사의 지도력에도 감탄했다. 5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한곳에 모여 만세운동에 동참한다는 것은 지도자의 진정한 나라 사랑과 마을 사람들을 아끼고 마음 아파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김덕원 의사는 사람 낚는 어부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참으로 대단한 힘이라는 것을 느꼈다.
누구나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도록 가파른 산길을 곱게 닦아놓으셨고 정상까지 올라온 등산객들에게 쉼을 제공해주는 창해 정자가 있었다. 거기에 앉아 용호강을 내려다보는 절경도 일품이었다. 김창묵 선생님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역사와 문화를 생각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척야산’이란 말은 들판을 개척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고려 초기, 사람들이 살기 위해 시작한 동창마을은 피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산촌이었다는 것이다. 농사 기술이 변변치 못한 마을 사람들이 들어와 산허리를 끊어
수로를 내고 물을 대서 논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조선 시대 들어와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동창마을은 현재는 한적한 시골 동네이지만 그 당시에는 활기가 넘치는 번화가였다고 말한다. 내륙과 서울을 잇는 교통요충지였고 조운이 발달하여 정부의 세곡 창고도 있었다고 자료에 나와 있었다.
물걸리 동창마을에 김덕원 의사가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이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일제강점기에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이다.
척박하고 한적한 마을에 수목원을 설립해주신 선생님의 깊은 뜻은 전국에 널리 홍보가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료입장, 연중무휴, 관광안내책자 하나 만들지 아니하고
소리 없이 홀로 엄청난 일을 해내신 선생님의 큰 뜻을 깊이 새겨야할 것으로 생각 되었다. 나는 정상까지 절정에 다다른 철쭉 꽃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는데 어느 곳 하나 꽃길, 천상의 길 아닌 곳이 없었다. 유난히 붉은 철쭉이 많은데 마치 그 당시의 만세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피흘린 것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김덕원 의사의 죽음보다 강한 민족의식과 동창마을 사람들의 피 끓는 만세 소리가 붉게 물든 것으로 느껴졌다.
이봉창 의사,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 김덕원 의사...
김창묵 선생님은 역사의 인물들을 기억하고자 공원화하였다.
수많은 시비와 시문으로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일을 한 선생님도 ‘의사’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계절이 아름답고 척야산 밑으로 용호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야말로 물 좋고 정자 좋은 그런 자연환경이었다. 척야산을 다녀오고 지인들에게 이곳을 알리느라 찍어온 사진들을 카톡에 올리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많은 사람들의 뜻깊고 역사가 있는 척야산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김덕원 의사가 만세운동 주동자로 몰리게 되면서 숨어지내는 3년 동안 한 평의 방에서 짚신을 만들면서 외로운 싸움을 견디어 내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결국 감옥생활을 하고 나와서도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하니 안중근 의사의 묘지를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나라를 위해 싸운 결과는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다 잊혀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것이 안타까워서 김창묵 선생님의 결의로 잊혀진 그분들의 역사 인식과 민족정신을 바로 새겨야 한다는 각오로 공원을 만든 것이라고 하신다.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또 다시 침략을 받지 않으려면 선열의 정신이 후세에게 전해져 민족의 정기를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사재를 털어 이 공원을 만들게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민족의 한을 풀어주었다면
김창묵 선생님은 척야산으로 동창마을 만세운동을 알리고 역사의식을 높이는 일을 하신 것이다. 이 또한 이 시대에 진정한 애국자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첫댓글 좋아요~ 엄지 척!
요즘은 춘천수필홈페이지를 자주 들어오게 됩니다.
읽을거리가 있어 아주 행복합니다.
제가 수필가라서 그런지 수필이 참 재미있습니다.ㅎ
송 선생님~ Good~~^^
네 저도 읽을거리 찾아 카페 들어오는데
아쉽게도 많지 않네요
잘 읽고 갑니다.
한 10년 전에 다녀온 산이네요. 송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니 다시 가보고 싶어집니다. 감사합니다. ♡♡♡
잘도 그렸네요!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