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다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높은 학력을 가졌으면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많은 부자이면서도 불행을 호소하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기에
만족이나 행복은 반드시 소유에 비례하지 않으며,
지성이 그것을 보장해 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가난하다"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느끼느냐 행복하게 느끼느냐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인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조건 속에서도 만족함을 발견해 내고,
어리석은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조건 속에서도 눈물 흘린다.
행복 하려거든 감사함에 눈 떠야 한다.
헬렌켈러는 태양 빛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당연하지'가 아니라 '고마워 하기' 가 필요하다.
자녀가 말썽을 피워도 '걱정할 아이가 있는 것'
그 자체를 고마워해야 한다.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집 청소가 엉망이라도
'아내가 밥하고 청소하는 게 당연하지'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연하지'라고 생각하니까 반찬 투정한다.
바가지 긁는 그 아내가 있는 것 자체를 고마워해야 한다.
행복은 고마워하는 일상에서 찾아온다.
내가 살아 있는 사실에 감사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함에 감사하다.
남들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길지라도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갖는다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따분한 인생을 산다.
할 일이 없어 누워있는 사람보다는
거리에 나가 남이 버린 휴지라도 줍는 일을 하는 사람이
몇 배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지나간 일에 매달려 잠 못 이루지 말고
잊을 것은 빨리 잊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한 성자에게
당신은 가진 것이라곤 없는데
어찌 그렇게도 밝게 살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 때 그 성자는 대답하셨다.
"지나간 일에 슬퍼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근심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당장 일에만 전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가지고 근심 걱정하고,
이미 지나간 일에 매달려 슬퍼한다."
그렇다.
공연한 일에 매달려 근심 걱정하지 않고
잊어야 할 것은 빨리 잊어버려 마음을 비우는 것은 행복의 길이다.
슬펐던 일을 자꾸 떠올려 우울한 마음에 사로잡히지 말고,
화나게 했던 일, 기분 나빴던 일을 회상하여 분해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못 된다.
체념도 하나의 슬기로움인 것이다.
행복이란 만족한 삶(知足可樂)이라고 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있으면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일을 하든 그건 행복한 삶이다.
우리의 불행은 결핍에 있기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결핍감에서 온다는 말이 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상대적인 결핍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플라톤의 행복철학이 밝힌 삶의 질은 이렇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 째,연설을 듣고도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가 그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니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다.
재산이든 외모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곧 적당히 모자란 재력과 재능을 지니고 열심히 사는 것이
희랍의 삶의 질이었다.
17세기 중국의 문인 김성탄(金聖嘆)에게
어떤 정도로 세상사는 것을 원하는가고 물었다.
'한 가난한 학도가 돈을 빌리러 왔으면서 말을 못 꺼내고 머뭇거린다.
이때 뒤란으로 데려가
나지막이 얼마가 필요한가 하고 물어 마련해주고
지금 꼭 가야 할 일이 없으면 한잔 하고 가게나
하고 붙잡을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했으니 이는 명나라의 삶의 질이다.
조선조의 삶의 질은 스스로의 분에 만족하는 자적(自適)이었다.
조신(曺伸)의 자적시에서 완연하다.
'아 나는 가는 곳마다 자적하네
몸이 천하므로 작은 벼슬도 영광이요
집이 가난하므로 박봉이라도 원망않네
거처하는 곳은 무릎만 들이면 되고
음식은 배만 부르면 좋고
술은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그만
혼자면 자작 둘이면 대작
시는 잘지어 뭣하리 내뜻이나 담으면 그만
글도 노곤하면 그만 읽고 자고 마니
이것이 모두 나의 자적(自適)이로세.'
* 자적: 무엇에 속박됨이 없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즐김.
아침이면 태양을 볼 수 있고
저녁이면 별을 볼 수 있는
나는 행복합니다.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깨어날 수 있는
나는 행복합니다.
꽃이랑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눈,
아기의 옹알거림과
자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사랑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입,
기쁨과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해 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나는 행복합니다.
[김수환 추기경 /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중에서]
내 하루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
한 해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
그리고 내 생애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되도록
감사를 하나의 숨결 같은 노래로 부르고 싶습니다.
(이해인)
행복한 주말 되세요!!
행복을 전하는 세잎크로버!!
첫댓글 "만족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가난하다"
아멘!!!
만족하기 힘든 것은
항상 상대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만족하고 행복하다가도 주위의 친구나 이웃이 나보다
더 좋은 집, 차를 샀을 때와 같은 경제적인 상대적 결핍감을 느끼거나
상대방의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갔거나 반려자가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축하해 주기 보다는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한 우울함?
여기서 평화가 깨지지요.
중요한 것은 상대가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닌만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삶에 충실히 살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