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는 두 글자는 참으로 큰 뜻을 담은 낱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움켜쥔 그 무엇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이만이 희망이라는 말을 뜻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희망은 현재의 욕망을 키워 미래를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이 아닙니다. 현재 이루지 못한 세속적 염원을 투사시킨 장밋빛 약속에 기웃거리는 것은, 그저 자신의 마음을 허황된 바람으로 채우고 소진시키며, 마침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게 합니다. 반골 기질이 넘쳤던 20세기의 뛰어난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이러한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중세의 그리스도교 철학은 희망을 거스르는 두 가지 죄를 지적하곤 하였습니다. 하나는 슬픔에 지쳐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가치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하느님 나라에 관심을 갖지 앉는 타산적이고 오만한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희망을 지닌 이들입니다. 제1독서에서 말하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순결한 마음은 희망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신앙인은 이 세상의 가치로만 삶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걸어가신 모범에서 자신의 인생길을 새로이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볼링에 한참동안 푹 빠졌었던 작년의 일을 떠올려 봅니다. 그 당시에는 볼링보다 더 재미있는 게임이 없는 것처럼 느꼈었고, 거의 매일 빠짐없이 볼링장에 출석했었지요. 그런데 너무 무리를 했을까요? 볼링공을 던지는 오른손이 불편해진 것입니다. 특히 오른 손목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근육이 놀라서 그렇다고, 한동안 오른손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왼손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분명 왼손 역시 나의 손인데,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숟가락질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줄 알았지요. 왜냐하면 두 살배기 아기도 숟가락질을 하니까요. 그러나 마흔이 넘은 저인데도 불구하고, 왼손으로 하는 숟가락질은 너무나도 어색하고 힘들었습니다.
세수 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왼손만으로 하는 세수는 왠지 깨끗하지 않은 것 같고 또 불편했습니다. 특히 머리를 감을 때이면 평소보다도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오른손으로 하던 일들, 충분히 왼손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오른손은 오른손 나름대로, 또 왼손은 왼손 나름대로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그 어떤 것도 무시하고 소홀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일들을 무시할 때 나에게 큰 불편함을 가져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소홀하게 대해서는 안 되는 물건, 사람에 대해 다시 한 번 의미를 새기고 감사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의 일 역시 그렇습니다. 때로는 주님의 일을 소홀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잘 눈에 띄지 않고, 또 언젠가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나도 모르게 나를 지켜주고 있음을, 그래서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 점을 우리들에게 복음을 통해 말씀해주십니다. 자신은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며, 이분이야말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시지요. 사실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주님의 일을 염두에 두었고, 자신의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올 한 해 항상 주님의 일을 먼저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그래야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을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 알아볼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순간적이다. 또한 고통은 결국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중도에 포기하면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랜스 암스트롱)
배경으로 사라지는 요한
-김귀웅 신부-
얼마 전 예술의 전당에서 벌어진 음악회에 참석하여 멋진 연주를 듣는 호사를
누린 적이 있습니다. 베토벤의 유명한 교향곡 9번 ‘합창’이 연주되었는데,
무척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교향악단의 장엄한 연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북치는 연주자였습니다. 북과 심벌즈, 그리고 트라이앵글
세 개의 악기를 번갈아가며 연주하는 그의 몸놀림이 참 열정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교향곡에 북이 등장하지 않을 때도 무척 많은데, 여기서는 북이 전체의 분위기
를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교향악단에는 많은 악기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화려
함을 뽐내고 멋진 소리들을 냅니다. 그리고 악기들마다 제 특성을 뽐내는 협주
곡들이
연주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북이나 심벌즈, 또 트라이앵글을 위한 협주곡은
들어보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그 악기들을 열정적으로 울리는 연주자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배경 같은 북소리가 교향곡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 세례자 요한은 따르는 이들이 무척 많은
인기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역할이 예수님의 등장을
준비하는 것뿐이라고 하면서 조용히 뒤로 물러납니다. 모두가 화려하게 무대
중앙에 서고 싶지 뒤편의 북치는 주자로 남고 싶지 않을 텐데, 요한은 기꺼이
배경이 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원영배-
지난해 6월 시카고에 사는 대자 마르코의 동생 에드워드가 캔자스시티에서 사제품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만사 제치고 비행기로 날아가 에드워드와 가족을 다시 만난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캔자스 교구 대주교님의 주례로 사제수품식은 거룩하고 아름답게 거행되었고 네 분의 수도회 사제가 탄생하는 축복된 자리에 저도 부제로 봉사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 신부님의 수품 상본을 본 순간 좀 별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수품된 다른 새 사제들은 기도하는 성모님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라 해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묘사된 성화를 상본에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신부님은 네 발이 묶인 파스카 희생양이 도살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그림을 선택했습니다. 아무 장식도 없는 어두운 배경 앞에 하얀 어린 양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처절하게까지 느껴진 사실적인 그림에서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르단 강가의 요한은 세례를 주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세례는 죄를 씻어주는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나기를 염원하며 그분께 대한 갈망을 일깨우려는 목적이 더 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그에게 오실 때 벅찬 환성을 터뜨립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의 일성을 들으며 새 사제의 탄생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감격이 새로워집니다. 예수께서 한껏 몸을 낮추고 시작하신 구원의 여정이 이 시대에도 계속되어 새로운 젊은이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생명까지 내어놓을 결심으로 내딛는 길에 우리도 동반자이며 협력자로 초대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초대를 축복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잘 해서가 아니라 잘 나서
-김찬선신부-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성경 말씀 이해에 있어서 의구심이 들 때마다
여러 성경을 다 뒤지고 개신교 성경도 봅니다.
이번에는 “과연”이라는 말과 “이제”라는 말 때문에 성경들을 봤습니다.
가톨릭 성경들은 다 “과연”이라는 말을 넣어 번역을 하였지만
개신교 성경에는 이 말이 빠져 있고
영어 성경도 딱히 이 말에 해당하는 말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
이전에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하느님의 자녀라는 느낌이 있고,
전에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었는데
이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과연 사자 새끼’, 또는 ‘과연 진돗개 새끼’라고 하면
그동안 봤을 땐 비리비리하여 도무지 사자와 진돗개다움이 없었는데
사냥을 하는 걸 보니 사자나 진돗개다울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때
우리도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녀인 것일까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그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순결해야지 하느님의 자녀이지
하는 짓이 악마와 같으면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돌아가신 우리 수사님이 형제들에게 종종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보고 사람, 사람 하는데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에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됨됨이나 행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느님의 자녀이지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행실을 닮은 악마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됨됨이와 행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기에
하느님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 서간의 뒷부분은
우리의 됨됨이와 행실이 예수를 닮아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음을 얘기하는데 비해
앞부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은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 (태어)나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난 것은 우리가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고 그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이것이 잘 살아나지 않는데
영어를 보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밋밋한 사랑이 아닙니다.
“Think of the love that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성부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퍼부어주신 사랑을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아낌없이 그리고 넘치도록 퍼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어찌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을 수 있겠냐는 뜻이지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보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하는 하늘의 소리가 있었는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들이니
예수님처럼 살므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라는,
그런 뜻이 오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당에 많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부님께서 열심히 강론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날 강론의 주제는 “누군가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라.”는 것이었지요. 즉, 용서에 관한 내용을 가지고 신부님께서 강론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가 벌떡 일어서서 제대로 걸어옵니다. 그리고 제대 위로 올라가서는 신부님의 오른쪽 뺨을 힘차게 때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부님께서는 깜짝 놀랐고 또 화가 많이 났지요. 그러나 마침 자신이 이런 강론을 하고 있는데, 신자들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날 주제에 맞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다른 왼쪽 뺨을 내밀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왼쪽 뺨까지 때릴까 싶었지요.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이 사람은 그 왼쪽 뺨마저 세차게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신부님께서는 화를 내면서 이 사람에게 달려들어 아주 혼 줄을 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큰 소리로 말합니다.
“아니, 신부님께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신부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밀라면서요?”
이 말에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성경에 오른쪽 뺨과 왼쪽 뺨만 있을 뿐이지, 그 다음 가르침은 없다.”
그리고 더 혼을 내주었다고 하네요.
설마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들의 부족했던 모습들을 다시금 반성하게 됩니다. 즉, 우리들은 진정한 용서를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까지 내밀라는 것은 신부님처럼 그 다음 행동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끝없는 용서를 행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스스로 제한을 두면서,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거야.’라면서 용서하는 것을 멈추려고 합니다.
이 모습을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몸을 통해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진정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어린양은 바로 속죄제물을 의미합니다. 죄 지은 사람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동물을 제물로 바쳤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속죄제물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무 죄도 없는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시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라고 하면서 우리 역시 이 모습을 쫓으라고 하십니다. 속죄제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해 바쳐야 하지요. 이처럼 우리도 나만을 위해서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있을 때 용서란 더 이상 내게 불가능한 단어가 아니게 됩니다.
2009년에는 화해와 용서가 흘러넘치는 이 세상이 되었으면, 그리고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이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와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살 맛 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결혼은 30%의 사랑과 70%의 용서다.(R.J.스티븐슨)
거듭 태어나다
-김찬선신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어
이제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아버지께서 우리를 버린 자식처럼 사랑을 주지 않으시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사랑을 베푸셨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회개하신 셈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면
전에는 그리고 본래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었는데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자격 없는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여주셨기에
이제 자녀가 되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입양아인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세례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성사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을 내가 알건 모르건,
그것을 내가 인정하고 부정하건,
우리는 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얼마 전에 아주 기막힌 사연을 들었습니다.
핏덩이 때 자기를 남의 집에 준 어머니가 나타난 것입니다.
어머니는 잘못으로 임신하여 남자도 모르게 아이를 낳았고
집안도 너무 어려웠고 자기도 키울 능력이 없어서
밖에서 아이를 낳아 아이가 없는 어느 부자 집,
자기를 키워준 부모님의 집 문 앞에 몰래 갖다 놓은 것입니다.
그랬지만 어머니는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에도 자식을 잊을 수 없어,
아니 갈수록 아이가 더 보고 싶어
아예 근처로 이사 와서 아이를 지켜보며 살아온 것입니다.
너무도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며 자기가 어머니인 것을 숨긴 채
이웃으로 같이 산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친근하고 왠지 끌리는 것이 있었지만
그분이 어머니인지 모르는 채 지냈는데
자기를 키워준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나자
어느 날 자기가 어미임을 밝힌 것이고 그래서 알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당황하였고 한동안 그러했지만
이내 어머니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친 엄마를 만난 새로운 행복과 겹 사랑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적절한 예인지 모르지만
우리도 한 동안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인지 모르는 채 지내다,
아오스딩 성인이 고백하듯,
늦게서야 님을 찾아 알게 되고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임을 알게 되고 받아들이게 된 것,
이것이 오늘 세례자 요한이 얘기하는 물의 세례가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 존재와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랑에 의해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면서 죄를 짓는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순수한 자녀로
다시 말해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는 자녀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만 하며 살아가는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입니다.
감사의 눈물
- 이건복 신부-
상담을 하다보면 자주 죄책감에 빠져 힘들어 하는 분을 만납니다. 이미 고해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음을 알고 있지만, 많은 분이 죄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합니다.
신학교 때 참으로 존경하는 은사 신부님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 때론 너의 죄 지은 모습도 사랑하신다. 그러니 네가 하느님께 가져야 할 마음은 감사하는 마음이고 보은하는 마음일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잘난 점 못난 점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는 말씀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감사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죄의 상처가 남아 있는 분이 계시다면 상처의 눈물보다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 좋겠습니다. 상처의 눈물은 아픈 마음의 결과이지만 감사의 눈물은 하느님 은총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기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느님의 숭고한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하느님이십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임종 직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죽기 직전에 말해 둘 것이 있소. 양복점 김씨는 나에게 2백만 원을 빚졌고, 푸줏간 주인 이씨는 50만 원을 빚졌고, 이웃집 박씨는 내게 3백만 원의 빚이 있소.”
그의 아내는 자식들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습니다.
“자, 보거라.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놀라운 양반이냐, 죽어가면서까지 누구에게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기억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형제님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힘주어서 또 말합니다.
“그리고 여보, 주인집 양씨에게는 내가 천만 원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기를 바라오.”
그 말에 아내가 소리치면서 말합니다.
“오오, 얘들아. 어떻게 하니? 너희 아버지가 드디어 헛소리를 시작하시는구나.”
자기에게 유익한 말은 들으려 하고, 자기에게 손해되는 말은 듣지 않으려는 모습. 어쩌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간직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스스로는 유익한 말만 듣기를 원하면서도, 남에게는 그런 말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듣기 싫어하는 손해되는 말은 물론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당연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지요.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어떤 이견을 말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떠 올려 볼 때,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긍정적으로 증언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인기에 신경을 쓰면 그 당시의 누구보다도 더 인기 있는 유명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는, 그래서 스스로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면 이렇게 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욕심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내 자신을 생각해볼 때 이렇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로 나아갈 때, 우리들은 남들처럼 행복하지 못한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주님을 가리키는 삶
-이중섭 신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하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사제가 미사 때
그리스도의 성체를 들어 높이며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 1장 34절에서
요한은 다시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의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생애 전체는 예수님을 증언하고 가리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가리키는 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습니다.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역시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증인이 되어 하느님의 어린양을 가리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주님을 가리키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최양업 신부님(1821-1861)이 지은 사향가(思鄕歌)를 소개합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중략)
갈 길이야 있건마는 찾아가기 어렵도다(중략)
다윗성왕 본을 보며 오주예수 표를 배워/ 고난으로 전장 삼아 고공(苦功)으로
성을 삼고/ 애덕으로 정병 삼고 겸덕으로 기병 삼고/ 의덕으로 병기 삼고
지덕으로 군량 삼고/ 묵상으로 병서 삼고 성경으로 방패 삼고/
절덕으로 기(旗)를 삼고 용덕으로 말을 삼고/ 망덕으로 투구 삼고
인덕으로 갑옷 삼고/ 신덕으로 선봉 삼고 십자가로 창검 삼세.”
어린양
-주영길 신부-
어릴 적 아무 뜻도 모르고 부르던 성체성가가 생각난다. ‘천주의 고양이며 인자하신 예수`….’ 그때는 막연히 하느님도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키우시는가 생각했다. 참으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발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양(羔羊)은 ‘어린양’을 뜻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고쳐 부르니 아이들이 혼동할 일이 없으리라.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전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한눈에 알아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한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혜안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1,33)
여기서 ‘어린양’은 이집트 탈출을 앞두고 잡아먹었던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탈출 12,5 참조)을 뜻한다. 그때 어린양의 피는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열 번째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구해 냈다. 그리고 어린양의 고기는 광야를 여행할 이스라엘 사람들의 양식거리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파스카 어린양을 잡으며 하느님께서 베푸신 크신 은총을 새로이 기념하였다. 이제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을 살리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내다보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을 고백한다. 이는 우리가 받아 모신 하느님의 어린양처럼 우리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는 어린양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는 누구라도 피하고 싶고, 하기 싫은 역할일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자리에서 어린양의 역할을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누구인가?
-오상선신부-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요한 1, 31.32)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
1. 나는 누구인가?
신학교 처음 들어갔을 때, 교수 신부님이 "나는 누구인가?" 열 가지로 정의해 보라고 하였다. 이름자부터 누구네 몇째 아들, 어느 학교 출신 등 주섬주섬 섬겨봐도 열 개를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또 그 열 가지로 표현된 나는 진짜 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우리 인생의 화두는 <나는 누구이며, 또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두 가지 존재론적인 질문을 찾아나서는 여정이다.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잘 아는 사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2. 우리는 누구인가?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보다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우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에 대한 답을 명쾌히 내려주고 있다.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고 답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니???
내가 하느님의 딸이라니???
이 얼마나 기가막힌 일인가?
이 얼마나 가슴벅찬 선언인가?
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에로의 초대인가?
성탄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께서 내가 누구인지를 벅찬 감동으로 가르쳐주시는 기적이다.
3. 그분은 누구신가?
요한은 자신도 처음에는 그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고 거듭해서 증언한다. 그런데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다고 선포한다. 그분은 곧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라고...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가 곧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감으로써 자연스레 얻게 되는 은총이리라. 이제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분은 곧 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 파견된 아버지의 겸손한 종이요 그러기에 나의 맏형인 것이다.
4.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
나는 이제 나의 맏형인 예수 그분처럼 세상의 죄를 없애는데 일조를 해야만 하는 소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저로 하여금 세상의 죄를 없애러 오신 당신 아드님을 닮아
세상에 죄를 더하는 자 되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자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자녀로서 불리기에 손색없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메시아와의 만남
-이철구 신부 -
우연히 기대하지 않았던 누군가를 만나는 행복은 우리 삶 안에서 그리 많이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누군가를 만난다면
우연한 만남보다 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분이 나의 전생애를
걸어도 아깝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분이라면 그보다
더 큰 행운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메시아를 만난다면,
우리는 생애 전부를 걸어 그에게 투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우리의 메시아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우리에게 오라 하십니다. 결단은 나의 몫입니다. 우리가 만난 메시아는
참된 구원자이며 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메시아, 참된 구원자이신 그분의 손을 잡도록 합시다.
그분의 따스한 온기 안에 담긴 사랑에 나의 결단으로 응답합시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양승국신부-
<제대로 된 이정표>
등산을 다니면서 체험하는 바입니다. 열심히 앞만 보고 산을 오르다 보면 길을 잃어버리거나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해라도 떨어지면 상황은 심각해집니다. 길 잃고 헤매다가, 해 떨어지고, 체온 떨어지고, 비상식량 떨어지고, 그러면 꼼짝 없이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지요. 생명의 위기상황 앞에 직면합니다.
그런데 산에 자주 다니면서 요즘은 요령이 좀 생겼습니다. 길이 애매해지면, 전반적인 산세나, 계곡의 흐름이나, 나무들의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대충 산길의 방향을 잡는데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이정표’처럼 고마운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하산 길에 한참 길을 헤매다가 ‘매표소’ 몇 Km 라고 정확하게 적힌 이정표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됩니다.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는 정말 고마운 존재입니다.
어떤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제시해준 제대로 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대로 된 안내자 하나 없이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위험하게도 이정표 하나 없는 험한 산길, 폭설이 내린 깊은 골짜기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기 저기 암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짜 메시아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해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불안한 표정의 백성들은 이리 우르르 몰려갔다 저리 우르르 몰려갔다 하며 오합지졸처럼 행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깎아 지르는 낭떠러지인줄도 모르고 직진만 하다가 부지기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어둠과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백성들 앞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라도 무척 달랐습니다. 헛된 맹세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지했습니다. 말과 행동에 신뢰가 갔습니다. 백성들도 제대로 된 예언자임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자신을 향해 다가오시자, 세례자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확하게 안내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에게로 쏠립니다. 세례자 요한만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 마침내 나타나신 진짜 주인공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는 순간입니다. 그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이제 제대로 방향을 잡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한 훌륭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수도자의 삶, 사제의 삶은 어찌 보면 이정표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는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해도 성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 삶의 배경이 자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 안에서 구원에로의 화살표를 발견합니까? 우리의 생활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생명에로 향하는 이정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김태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에 해당하는 호칭으로, 아니,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명인 십자가의 희생을 예언하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른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오늘날 계약을 맺을 때 먼저 서로의 동의가 확인된 다음 계약서에 서명 또는 도장을 찍는다. 이 서명 또는 도장은 서로 약속한 것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만의 특유의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서로 동의하고 동의한 것을 굳게 지키기로 맹세하고자 하면 계약을 맺고자 하는 상대방과 같이 특별한 예식을 행하였다. 동물을 죽여 반으로 잘라서 양쪽에 놓고 그 사이로 둘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계약서 서명과 같았다. 피가 흐르는 제물 사이로 둘이 지나가면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의 피를 생명의 근원으로 보았고, 이 피가 서로간의 동의를 표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특별한 계약을 맺었다고 믿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 제물이 되셨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피를 흘리셨고, 그 피로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미사 때마다 바치는 천주의 어린양을 되새겨 본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아멘.”
-김재호 신부-
찬미예수님!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허락해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상에 나신 주님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지어지게 되는 대목과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 되어지는 모습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 이름은 ‘하느님이 살리신다’ 혹은 ‘야훼는 구원자이시다’,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이름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일러준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사람들에 의해 주님께 바쳐졌습니다.
모든 과정들이 율법대로 지켜졌습니다.
즉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의도대로 그렇게 진행되어져 갔습니다.
이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자마자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되어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태어난 아기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을 관찰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이셨지만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 아버지께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바치는 예수님.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지만 주님께서 주신 아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봉헌하는 마리아와 요셉.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아니 저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렸을 적, 친구들이 새로 산 장난감이나 새로 산 신발, 옷 등을 보고 ‘그거 내 좀 빌리도...’,
‘그거 함 신어보자..’라고 했을 때, 주저 없이 내 뱉은 소리가 있습니다.
‘치아라..내꺼다. 억울하면 니도 사라’....
‘내 것이기 때문에, 내꺼기 때문에 빌려줄 수도 없고
잠시 신어보라는 말도 못하는 그런 철없던 한 어린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모습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그런 모습들이
나에게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조금 씁쓸해 지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러한 모습들이 없습니까? 물론 어렸을 적에
한번쯤은 그러한 모습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그러한 모습들이 나에게 남아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내 마음 속에 ‘내 것이라고, 내 꺼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손에 꼬옥 움켜쥐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들 입니다.
그렇기에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 다시 되돌려 드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것만을 생각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되는 2006년에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 하면서 나의 모든 삶이 주님 안에서
아름답게 가꾸어 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주님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
-이찬홍 신부-
서로 다른 마음 자세로 살아가는 두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들의 특징은 그렇게 착하고 바를 수가 없습니다.
집에서는 늘 부모님께 순종하며 부모님을 도와 드립니다.
학교에서도 모범생이라 불릴 정도로 조그마한 흠도 찾기 힘든 그런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착하고, 바르고, 공부를 잘하는 이유는 서로가 다릅니다.
한 아이는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서...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부를 잘하는 것입니다.
늘, ‘혼나면 안 되는데... 매 맞으면 안 되는데...’ 라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공부하다보니, 삶의 기쁨과 행복이 없습니다.
늘 언제, 어떠한 실수, 잘못으로 부모님께 혼날지 몰라 마치 살얼음판위를 걷는 심정으로 생활하는 그런 아이입니다.
그러나, 다른 아이는 다릅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부 잘하려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부모님께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늘 부모님께 순종하며 도와드리는 것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공부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마음은 늘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더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공부하기에, 늘 삶의 기쁨과 행복, 열정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어떤 아이인 것 같습니까?
어떤 아이로 자라나길 바라십니까?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바라는 마음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으로 돌려 묵상해 보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도와주라는 새로운 계명으로 내려주셨습니다.
살면서 죄를 멀리하고 자신과 이웃을 힘들게 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네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순종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지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명을 지키려하고, 죄를 멀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화의 첫째 아이처럼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여기고 있어, 하느님께 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 죽은 후에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하여 지키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 삶의 참된 기쁨과 평화는 없습니다.
혹, 있더라도 만들어진 거짓된 것이요, 억지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아니면, 둘째아이처럼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받은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것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많은 사랑과 은총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지키는 것이기에, 계명을 지키려는 것이.. 죄를 멀리하려는 자세가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좀 더 사랑하고, 좀더 진실되고 열정적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으로 행하기 때문에, 우리 삶의 기쁨과 평화,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저도 많은 실수를 합니다.
많은 죄 체험이 있었고, 또한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늘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 하고, 왜, 죄를 멀리하려 하는가 생각해 봅니다.
바로, 주님을 결코 떠나지 않기 위해서 지키려는 것입니다.
1독서에서 알려 주듯이, 그분 안에 머무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죄를 멀리하려는 것이요, 혹 죄를 범하더라도 바로 예수님께 돌아와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 용서를 청해야 합니까?
복음을 통하여 요한이 알려주듯이,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과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러워진 손을 씻는 마음으로 그렇게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러워진 손을 씻을 때, ‘에이, 또 더러워질 것! 뭐 하러 씻나?’ 라는 마음으로 씻지 않습니다.
그저, 깨끗해지기 위해서 손을 씻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려하고 죄를 멀리하려는 이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 안에만 머무르기 위하여.. 예수님을 결코 떠나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멘
보라!
-이인옥-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즉각 외친다.
실로 엄청난 신비를 알아보는 요한의 눈이다.
"하느님의 어린 양" 요한계 문헌에만 나오는 독특한 칭호이다.
당시의 많은 유다인들은 이미 이 칭호에 대해 익숙해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묵시문학에서는 세말에 있을
최후의 심판 때에 지상에서 모든 악을 쓸어낼 '어린 양’이 온다고 하였다.
연약한 어린 양이 최후의 승리를 가져온다는 놀라운 사상은
요한 묵시록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그보다 윗대의 이사야서, '야훼의 종’의 노래(52,13-53,12) 속에도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 등장한다.
백성들은 이 '어린양'과 같은 고난받는 주님의 종이 오실 것을 예고했었다.
가장 원초적인 '어린 양'에 대한 표상은 출애굽기(12,12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압제자 에집트의 모든 맏이가 죽는 재앙 속에서도 '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은 구출되는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으로써,
이 '어린 양’은 백성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네어 주는 과월절의 희생제물이다.
이 모든 표상들을 한데 아울러 표현한 "세상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어린 양". 요한은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중반에 가서야 예수의 신비가
서서히 밝혀지고 있는데 비해,
요한복음은 요한 세례자에 의해서
처음부터 예수의 신비를 명확하게 밝혀낸다.
공관복음에서는 중반이 넘도록 제자들이
예수가 누구신지 모르는데 비해
요한복음에서의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즉각 그분의 신비를 알아채고 있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 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이것 역시 예수님에 대한 엄청난 신비를 알아 보고 있는 증언이다.
예수님이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니 태초부터 계신 선재하신 분이라는 것.
이 엄청난 신비를 어떻게 요한은 알 수가 있었을까?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요한도 실은 몰랐다.
그도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자신을 보내신 분의 말씀을 들었다고 증언한다.
마침내 요한은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예수님 위에 머무르시는 광경을 보았고,
그래서 예수가 바로 말씀으로 들었던
그분이신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요한은 자신의 세례운동의 목적을 밝힌다.
그것은 바로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던 까닭은
다만 자신에 대한 관심을 널리 모아들여
종국에는 예수를 알리려는 계획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그 많은 눈들과 기대를 지금 자신이 "보라!" 하고 가리키는,
바로 저 "어린 양"에게로 보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말이다.
보라! 세례자 요한의 손가락을.
보라! 요한 세례자가 가리키는 저 분을.
보라! 그 분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보라! 그 분과 함께 살아가며 변화되는 사람들을.
보라! 이 분과 함께 하는 신나는 삶을.
보라! 이 분 안에서 변화되는 내 자신을.
"보라!" 는 바로 이런 신천지로의 초대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계속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다. 오늘의 증언은 세례자 요한이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를 보는 가운데서 진행된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보았듯이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28절)에서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곳은 예루살렘 근처 동쪽으로 약 2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아는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가 살던 곳(요한 11,1.18; 12,1.19)이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전·후 시점에 머물렀던 장소(마태 21,17; 26,6; 마르 11,1.11; 14,3; 루가 19,29; 24,50)이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은 예루살렘에서 동편으로 36Km 떨어진 예리고를 지나 8Km 지점에 있는 요르단강에 바로 인접한 베다니아이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 의하면 이곳으로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그것도 나자렛에서 100여Km 떨어진 베다니아로 말이다.
세례자 요한의 오늘 증언은 이렇게 먼길을 거쳐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를 두고 진행된다. 청중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저 독백형식으로 진행된다. 예수께서 왜 이렇게 먼길을 오셨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스스로는 요한이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공관복음을 미루어 볼 때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마태 3,13-17; 마르 1,9-11; 루가 3,21-22) 요한복음은 왜 예수의 세례 받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딱 잘라 말하면 요한복음이 1장 전체에서 애써 주장하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와의 대비구조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을 기술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며", "주님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며", 그래서 오직 메시아 주님을 증언하러 온 요한의 사명에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계속되는 요한의 증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으로서 크게 세 가지 핵심적인 내용으로 요약된다. 첫째,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는 예수를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구속할 신약의 "파스카 양"으로 상징하는 증언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곧 선재(先在)하시는 성자 말씀이며, 구약에 예언된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이사 53장)이고, 약속된 메시아이다. 둘째, 예수 위에는 성령 하느님이 머물러 계시며(이사 11,1-2; 61,1), 따라서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다. 셋째,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는 "하느님이 뽑아 세운 분"(이사 42,1)이며, "하느님이 낳은 아들"(시편 2,7)이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 17,5)로 표현될 수도 있다.
요한이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31절, 33절)며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에 관하여 요한이 증언하는 내용이 스스로 깨달은 지식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께서 보여주셨고,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원래 증언(證言)의 뜻도 그렇다. 증언이란 스스로의 생각이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격한 사실을 증명하는 말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이 나중에 협조자이시고 진리이신 성령 하느님을 공관복음서에 비해 특별히 강조하고, 나름대로의 성령론을 피력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제 눈으로 목격한 것조차도 제대로 증언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섞어 곡해하는 우리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훌륭한 스승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의 어린양(요한1,29-34)
-유 광수신부-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자문해 보게 된다.
요한은 "세상의 죄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세상의 죄를"이라고 단수로 말하였다.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의 죄란 이런 저런 여러 가지들이 아니라 모든 죄의 뿌리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죄이다. 율법학자들이 중풍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을 때 "이 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2,7)라고 말하였듯이 하느님을 보고 이야기하면서도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많은 죄들을 짖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을 안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요한 세례자는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외친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무지함"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죄의 뿌리를 아예 없애버리러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죄의 일부분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조의 뿌리가 되는 "세상의 죄"를 용서해주러 오신 분이시다.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이시다."라고 하지 않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분이 이제 오시는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러니까 요한은 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분이 저기 오신다는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분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한다. 나는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늘 하고 있는가? 내가 평소에 아무런 하느님에 대한 생각없이 또는 아무런 기다림도 없이 생활하고 있다면 하느님이 오신다고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겠는가? 또 내가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 있어야 그런 하느님을 볼 때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을 기다리는 마음도 없고 또 내가 바라는 구체적인 하느님의 모습도 없다면 지금 당장 하느님이 내 앞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요한은 절대로 예수님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던 분이 오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분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라고 말하였다. 요한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장차 오시는 하느님은 어떤 모습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갑자기 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이상한 모습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미 "언제, 어떤 모습으로, 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자를 통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이사 40 3-5)고 당신이 오신다는 것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53, 6-7)라고 오실 하느님의 모습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말씀해 주셨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또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다." 이렇게 우리의 잘못으로 지은 모든 죄를 없애주고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자식이 죄를 지으면 부모가 모든 수모를 다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요한은 인간이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짖게 되는 이 세상의 죄의 뿌리가 되는 "하느님에 무지함"을 아예 없애버리러 오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죄를 짖지 않으려면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모르면 우리는 또 다시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놀아난다." 그럼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는가? 하느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공부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이 직접 당신을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직접 하느님한테 듣고 보고 배워야 한다. 요한도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라고 하셨듯이 하느님이 보여주신 것을 보았고 일러주신 대로 하였기 때문에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를 짓게 하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함"에서부터 깨어나야 한다. 즉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해결책이다. 그럼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 즉 성서를 아는 것이다. 성서는 모두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시는 내용이며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 가를 알게 된다. 성서를 알게 되면 "길을 헤매며 제멋대로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으며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감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