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치가 박순의 업적과 유적지(下)
-시비선악 명쾌한 정승-
사암 박순의 영정.
임금의 외숙이자 간신이던 윤원형, 왕비의 외숙인 권력자 이량, 두 권신(權臣)을 추방한 용기의 사나이 박순은 선조대왕의 믿음직한 대신이었다. 선조대왕이 박순을 칭찬한 말에,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는 대찬사를 거리낌없이 말했다. 소나무나 대나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이나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뜻이었으리라. 한 신하에게 바치는 찬사로는 대단한 내용이다. 그만큼 지절이 높았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뜻이었다. 희대의 정치가 백사 이항복은 사암의 시장(諡狀)에서 “옛말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공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말하여 위대한 그의 용기를 찬양했다.
# 청음 김상헌의 박순론
어린 시절 사암 박순이 살던 집의 이웃에 살면서 영의정으로 조정에 드나들던 사암의 풍모를 목격하면서 그의 제자가 되고 싶었는데 세상을 일찍 떠나 그러할 기회를 갖지 못해 안타깝다고 탄식했던 청음 김상헌은 ‘사암집’의 서문을 썼다. 사암이 세상을 뜬 지 56년 만에 병난에 잃고 흩어진 글을 모아 문집으로 만들었는데, 약간의 글이지만 시는 제법 모아졌고, 윤원형을 탄핵한 그 멋지고 용기 있는 상소문 두 편이 실려 있는 것이 너무 다행스럽다면서 사암의 인물평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사암 정승은 조선 제일의 시인이라던 눌재 박상(訥齋 朴祥)의 조카로, 한성 우윤이자 시인이던 눌재의 아우 육봉 박우(六峰 朴祐)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상은 기묘명현이고 박우는 장원급제의 문사였으니 우선 그 가계가 훌륭하다고 했다. 젊어서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동료학자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수준 높은 학자였다고 했다. 간흉(奸兇)들이 왕권을 농락할 때 그들을 쫓아낸 직절(直節)의 신하였다고 했다. 퇴계·율곡·우계 등 당대의 학자들이 가장 존숭하는 당세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찬한 사람이라고 했다. 중국의 사신들이 오면 가장 접반을 잘했기에 사암을 제대로 알아보고 ‘송나라 인물에 당나라의 시풍을 지닌 인물’이라고 칭찬했으니 조선의 인물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40년 가까운 벼슬살이에 이조판서·대제학을 역임하고 14년의 정승 생활에 모든 녹봉은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희사하고 가진 것 하나 없이 청렴결백하기가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다. 뛰어난 문장과 시로 일세의 맹주(盟主)였으나 자신의 자랑은 일절 하지 않았다. 지은 글이나 시마다 인구에 회자하며 온 세상에 전송되었으나 자신은 숨기고 조금이라도 잘하는 선비나 학자는 극구 천거해서 좋은 벼슬과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즉 ‘호사석재(好士惜才)’, 선비를 좋아하고 재주를 아끼는 정신이 그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간사한 벼슬아치는 물리치고 어진 신하는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에 늘 걱정을 아끼지 않았고 국가의 안위만 염려하여 바른 말과 곧은 마음으로 임금을 섬겨 모든 음험한 벼슬아치를 내쫓고 시비선악에 그처럼 명쾌한 정승이 없었다고 했다. 도(道)가 행해지지 못하고 올리는 상소가 시행되지 못함을 알자 관복을 벗어던지고 높은 정승의 지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계곡에 숨었으니 그만한 염퇴(恬退 : 미련 없이 물러남)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찬양했다.
김상헌의 결론은 이렇다. 이러한 자신의 주장은 모든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다 아는 바고 세상의 남녀노소나 귀천이 다 아는 바다. 그러니 선생은 하늘과 땅 사이의 기운이시고 국가의 보배이며 사림의 종장(宗匠)이라고 총평했다. 청음이 누구인가. 저 병자호란에 척화의 대표자로 심양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선민족의 혼을 끝까지 지킨 당대의 정승이자 대제학이 아니었던가.
# 태생지는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경기도 포천의 옥병서원 편액.
이런 당대의 위인 사암의 혼은 어디서 태동했을까. 사암의 선대는 충주박씨로 개성에서 살았다. 조선왕조 개국 뒤에 서울에서 살았으나 난리를 피해 충청도의 공주와 회덕에 은거했다. 그 뒤 사암의 조부이자 눌재 박상의 아버지인 박지흥(朴智興)이 처가인 광주의 서씨(徐氏)마을에 정착하면서 광주 사람이 된다. 눌재의 아우 박우는 사암의 아버지로 나주로 장가들어 분가하면서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에서 살아가는데, 사암은 바로 거기에서 태어나 그곳이 바로 사암의 고향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사암의 유적지이지만, 나무 하나가 제법 오래되어 사암을 아는 듯했고, 사암이 말을 탈 때 타고 내린 하마석 하나만 마당가에 흙에 묻혀 있었다. 그 집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 육봉 박우의 묘소가 있으니 그곳이 사암의 탄생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암집’을 보면 광주와 나주를 찾으면서 지은 시가 여러 편이 있는데, 벼슬 하면서 자주 성묘를 다니고 고향을 찾았던 기록이 있으니 전라도 사람임이 분명했다.
다만 적자의 후손이 없자 그 당시의 예대로 양자를 들이지 않고 외동딸이 시집간 포천을 낙향할 곳으로 삼아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은퇴하여 포천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마쳤기에 거기에 묘소가 있고 유적지가 있으며 서원이 세워져 있다.
# 당대 시단(詩壇)의 종주(宗主)
세상을 떠나자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기고 슬퍼했다는 사암. 문장은 한당(漢唐)의 품격을 되찾는 수준에 이르고 특히 시에 뛰어나 한 시대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니, 당대의 시인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는 것이다. 조선의 문학사에서 널리 알려진 3당 시인이라던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이 바로 사암의 문하에서 공부한 시인이라는 것이 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사암의 많은 시에는 절창이 많기도 하지만, 유독 절창의 하나로 꼽히는 시는 ‘방조운백(訪曹雲伯)’이라는 시 2편이 있다. 그 첫째 시에
술 취해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醉睡仙家覺後疑
구름 낀 널따란 골짜기에 달이 지는군 白雲平壑月沈時
서둘러 혼자서 쭉쭉 뻗은 숲속으로 나오니 ?然獨出脩林外
돌길의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듣더라 石逕音宿鳥知
참으로 시인다운 시다. 얼마나 이 시가 유명했으면 한 때 박순의 닉네임이 ‘박숙조(朴宿鳥)’였다는 전설이 있다. ‘돌길의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듣더라’의 자던 새의 구절이 너무나 좋아 ‘숙조’가 별명이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 허균의 사암 숭배
허균의 아버지는 유명한 초당 허엽이고 허균의 형이 하곡 허봉이다. 그들은 모두 동인으로 언제나 사암을 공격하던 정치의 반대파였다. 허봉이 유독 사암을 공격했는데, 그의 아우 허균은 ‘시화’에서 사암을 매우 존숭하는 마음을 보였다. 사암이 별세하자 수백편의 만시(輓詩)가 지어졌는데 그중에서 우계 성혼의 시(‘挽思菴’)가 절창이었다고 허균은 평했다.
세상 밖의 백운산은 깊고 또 깊더니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의 초가집 다시 찾기 어렵겠네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 지붕 위에 뜬 삼경의 밝은 달은 拜鵑窩上三更月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어 준다네 應照先生一片心
세상 밖의 백운계곡으로 깊이 숨어버린 사암의 높은 염퇴(恬退)정신을 찬양하고 선생이 없는 초옥은 다시 찾기 힘들다면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했다. 뻐꾸기가 많은 그곳의 집을 ‘배견와’라 일컬었는데, 그 지붕 위의 밤중에 뜨는 달은 선생의 일편단심을 반영해주고 있다니 얼마나 청아한 시격인가. 시인으로, 은퇴한 노재상의 서거를 슬퍼한 내용이 흔적 없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시다. 그래서 허균은 그 시가 최고의 절창이라고 칭했을 것이다.
# 쓸쓸하고 처량한 유적지
사암 박순이 말을 타고 내렸다는 하마석. <사진작가 황헌만>
우리가 찾은 포천의 창수면 사암 유적지는 외손마저 혈맥이 끊긴 탓인지 덩실한 묘소나 우뚝 솟은 신도비, 넉넉한 모습의 서원인 ‘옥병서원’의 건물이 있어도 어딘가 쓸쓸함이 서려있다. 다행히 포천의 유림들이 해마다 서원에 제향을 올리고 충주박씨 종친회에서 묘소에 시제를 지낸다니 그것만이라도 덜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한 학문과 문학, 그만한 정치가로서의 대인다운 사암의 후사로는 그래도 처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민족적 인물이나 위인에 대해서는 나라가 좀 나서서 유적지도 관리하고 기념사업도 펼쳐야 하지 않을까. 너무나 야박한 세태에 아픈 마음을 달래기 힘들었다. 사암이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사암의 유물이나 유저는 대부분 사라졌으며, 후손도 빈약하여 챙길 수 없었는데, 더구나 6·25 전쟁은 그곳 포천의 창수면 일대가 격전지여서 아무것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니 더욱 비통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다행히 외증손자 때에 이르러 겨우 모은 유작을 정리해 ‘사암집’으로 간행했고, 1850년쯤인 19세기에 와서야 전라도 감영인 전주에서 목판으로 증보로 간행하여 현재까지 전해지니 그것만이라도 다행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당대의 제일 인물, 14년의 정승, 시단의 종주, 당나라 풍의 시를 복원한 시인. 그 큰 인물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이조판서·대제학·영의정의 높은 벼슬에 문학과 학문에 깊은 조예까지 인정받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임금은 내렸건만, 그의 혜택을 입은 백성들이 그를 잊어서야 되겠는가. 국민적 호응으로 사암을 기리고 기념하는 사업이 활성화되기만 기대해본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