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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경주 남산에 가고싶어 하는가?
/梅谷堂 김 경숙
*일시: 2011.1/8, 7시 30분 신갈 출발
*날씨: 맑음
(11:25) 삼릉주차장 도착
(11:32) 삼릉
(11:43) 목 없는 석불좌상
(11;45)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11;48) 삼릉골 석조여래좌상
(11;49) 이정표, 삼릉주차장 0.8Km/상선암 0.8Km, 금오봉 1.8Km
(11;54)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12;02) 삼릉계석불좌상
(12;20) 상선암
(12;25)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상선암 0.1Km/ 금오봉 0.9Km)
(12;54) ▲금오봉(468m) 이정표, 통일전주차장 4.2Km/ 상선암 1.0Km,
삼릉주차장 2.6Km, 포석정주차장 4,7Km
(삼각점, 경포 478/ 1995 재설)
(13;00) 금오봉 점심식사
(13;19) 비파골
(13;27) 용장골
(13;36) 용장사곡 삼층석탑(용장사터)
(13;45)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용장사곡 석불좌상(목 없는 석불좌상)
(14;12) 통일전주차장 갈림길(금오봉 0.2Km/삼릉 2.3Km), 화장실
(14;17) 헬기장
(14;18) 팔각정터 갈림길(팔각정터 180m/금오봉 0.5Km,
통일전주차장 4.3Km)
(14;19) 남산관광일주도로준공비
(14;22) 팔각정터
(14;29) 상사바위
(14;35) 금오정 갈림길(금오정 150m/ 통일전주차장 5.0Km, 금오봉 1.2Km
/포석정주차장 2.9Km)
(14;38) 금오정(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남산일원" 안내간판)
(14;45) 통일전주차장, 삼층석탑 갈림길(삼층석탑 620m, 통일전주차장 1.55Km)
(15;24) 통일전주차장
(15;50) 통일전주차장 출발
이 나라에 살면서 평생 경주여행 한번 안하고 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경주여행이
라 하면 대부분이 관광버스에 실려 첨성대 찍고, 천마총 찍고, 석굴암과 불국사 그리
고 경주박물관을 둘러 안압지 포석정에 눈도장과 기념사진 몇장 찍은 후 황망히 자리
를 떠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주를 다녀갔어도 진정 경
주를 보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역시도 학창시절을 비롯
하여 수차례 경주를 다녀왔건만 역사를 배경으로 막연한 그리움을 이 땅에 보내고 있
었을 뿐 이제서야 경주를 다시 찾아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려 한다.
그곳엔 남산이 있다. 서울 한복판에도 솟아 있고 산골짝 많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마을에도 있는 산이 남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 남산이란 이름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경주 사람들은 남산을 보지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단언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경주에 살고 있다 하여도 남산의 참모습을 아는 사람은 과
연 얼마나 될 것인지?
어느 사진작가는 남산을 찍는 이유를, 다른 산과 달리 이곳에 신라시대 유적 유물
이 많이 있으되,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과 환조의 석불, 그리고 암벽에 돋을 새김한 마
애불 등이 수려한 산악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축대
가 잡초에 가리워져 있고 주춧돌이 몇 낱 뒹굴고 때때로 석탑이 파괴된 채로 있거나,
석불도 대좌에서 굴러내린 채 목이 깨져 없는 상태로 있어서 태고의 폐허미를 고스란
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남산
의 이런 점에 매혹 되어 이곳을 찾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솔향 그윽히 풍기는 호젓한 산길을 걸어 오르다보면, 신라시대의 찬란하였던 영화
가 머릿속을 스쳐지나며 시공을 뛰어 넘어 먼 과거로 되돌아 가게도 된다. 나무나 바
위가 오랜 세월 풍상을 견디어 오듯, 유적은 풍운에 폐허화 된 채, 유물은 버림받은
채, 자연스런 상태로 남아 있기에 남산은 매혹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즈음, 남산을 "개발"하고 "정화"한다는 명목아래 유적 주변의 나무들을 베어버리
고 쓰러진 탑을 복원하기도 하는 등 철책을 두르는 바람에 남산 특유의 폐허미가 사
라져 버리고 있어 걱정된다는 소리도 나온다. 더구나 많은 등산객들이 남산을 찾아들
다 보니 산길이 훼손 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도 하여 점차 그윽하고 고즈넉한 분
위기가 사라져 가고 있어 역사의 현장인 남산으로서의 진목면을 상실해 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 산행코스 ; 삼릉주차장-삼릉-삼릉골마애관음보살상-삼릉계곡선각육존불-
삼릉계석불좌상-상선암-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금오봉-비파골
-용장골-용장사곡 삼층석탑-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용장사곡 석불좌상
-남산관광일주도로준공비-팔각정터-상사바위-금오정-통일주차장
* 산행거리 : 약 10Km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24%2Fdc%2Furimahn%2Ffolder%2F2857176%2Fimg_2857176_924264_32%3F1265958017.jpg)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moamt.co.kr%2Fimage%2Fnamsan-map.jpg.jpg)
5년전에도 난 경주를 다녀왔다. 친구들과 울릉도를 여행하고 오는 길에 하루를 경주
에 유하면서 경주를 관광하였었다. 여행은 누구와 하는가도 중요한 것 같다. 그 시절
엔 그냥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먹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니, 이곳저곳을 두
루 살피면서 역사를 이야기 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차례를 다
녀오고도 경주땅에 미련을 두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면 어쩌면 남산을 오르지 못한
데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하루쯤 경주에 머물면서 남산 산행도 하고 구석구석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 싶었었으니까.
지난 12월 30일 거가대교를 거쳐 부산땅을 밟고 울산 대왕암에서 일출을 즐긴 후 2
박3일의 여행중에 마지막으로 경주를 다녀왔었다. 워낙 날이 추운데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마음 먹은대로 되지는 않았었다. 더우기 남산을 오른다는 건 언감생심 계획엔
들 둘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어찌되었든 계획하였던 곳은 다 들려 온 셈이니 목표달
성은 하였던 듯 싶은데, 그래도 뭔가가 개운치 않았던 이유가 남산을 오르지 못한데
있었다. 집에 도착하여 지인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일주일 후 다시 경주 남산엘
오르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 맞아떨어진 경주 여행과 남
산 산행길의 조화로운 어울림이었다.
객지에서 2010년의 마지막날을 보내고 2011년 1월1일 울산 대왕암에서 해돋이를
즐긴 후,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은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다. ‘문무대왕릉’으로 불리우는 이곳은 사적 158호로 지정된 공식 문화재이다. “문무
왕이 죽어서도 호국의 용이 되어 쉬지 않고 동해를 지킨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4D5E3D4D21ED2010)
갈매기가 떼를 지어 날고 있는 대왕암을 잠시 들려 향한 곳은 토함산이었다. 토함산
을 오르기전 감은사지와 장항리사지를 잠시 들렸다가 곧장 토함산에 오르니 붐빌줄
알았던 주차장이 다행히도 절반은 비어 있었다. 토함산 일출을 보러왔던 많은 사람들
이 빠져나가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석굴암을 찾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4CA14B4D21F08C24)
신라 천년의 땅 서라벌을 훤히 밝혀주는 찬란한 태양빛을 누구보다 먼저 맞이하기
위한 간절한 바램으로, 31일 밤 경주박물관에서 에밀레종 타종을 지켜본 사람들이
곧바로 석굴암이나 토함산 정상으로 올랐으리라.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E5B4E4D21EF6A23)
뒤늦게 석굴암을 찾아드는 관광객들로 하여 점점 복잡하여지는 석굴암 주차장을 뒤
로 하고, 불국사로 내려오는 길은 사흘간의 여행길에 차츰 피로감이 느껴지기 시작하
였다. 새해 첫날 그래도 운이 따라주었기에 아래 주차장까지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위에 주차 공간이 있어 차를 세울 수가 있어 한결 수월한 여행길이 되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7FBF494D21F2DA08)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
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되었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 왜
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
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
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
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
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63D8484D21F2F13A)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
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해준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75A9494D21F3EE1F)
여행하는데 빠져 아침밥도 굶은 채 경주를 관광하고는 뒤늦은 점심으로 속을 달래
고 경주박물관과 안압지등 몇군데를 더 돌아 급하게 서울로 향하였던 길다면 길고 짧
다면 짧다고 할 수 있을 2박 3일의 여행길이 왜 그리도 시간이 촉박하였던지. 그 날의
경주여행에서 부족하였던 일부를 남산산행으로 채워가는 듯 하기에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7287494D21F3EB20)
언제 다시 와봐도 아름답고 역사의 향기 그윽한 곳..
![](https://t1.daumcdn.net/cfile/cafe/127014494D21F3F824)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 걸 한바퀴 돌아나와 소나무 숲에서 서운함을 달래본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06A74A4D21F47D22)
불국사 안으로 들어갈 때 보았던 연못에 잠시 내려서서 남들처럼 얼음을 지쳐본 후
에야 불국사를 떠날 수가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5A464B4D21F49517)
아무리 다녀봐도 역사를 알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그래서 경주에는 가고 또 가고
다시 가게 되는가 보다.(사진; 안압지가 있는 임해전지에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130EB6524D21F5461A)
따뜻한 남쪽은 생명의 방향을 일컬음과 같아 남산은 이름 그대로 경주 시내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 땅이 서라벌로 불리던 시절부터 남산이었다. 훗날 지도 위에 금오산
(金鼇山·468m)과 고위산(高位山·494m)이란 한자 이름을 써넣은 두 봉우리가 남북으
로 길게 이어져 있어도 사람들은 그저 남산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370E544D2923CE08)
첩첩이 산으로 형성된 우리나라에 북산, 동산, 서산은 없어도 유독 남산이란 이름이
많은 것은 우리 조상들 삶의 지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이다. 남향집은 3대가 덕을 쌓
아야 살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태양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여 살기를 소원하던 사람
들에게 남쪽의 산이 특별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남쪽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남기 위한 삶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1EF7544D2923D62D)
70여개가 넘는 남산 순례길 중에 오늘 산행 들머리로 삼은 서남산 코스는 그 중에서
도 유물이 밀집 되어 있는 곳으로 주차장에 내려서면서부터 심상치 않은 역사의 향기
가 배어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D9D544D2923D935)
다른 산을 산행하는 것과는 다르게 시작부터가 편안한 소나무숲길로 오르게 된다.
주차장에서 5분정도 오르다보면 삼릉이 있는데, 삼릉은 신라의 아달라왕, 신덕왕, 경
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왕릉이다. 삼릉은 울창한 솔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분위기가
청명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06AE534D2955C917)
아달라왕은 신라 제8대왕으로 알려진 아달라이사금 바로 아달라왕이다. 아달라왕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로는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가 있다. 소백산맥에 가로
막혀 폐쇄적인 문화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신라의 지리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도
로망을 구축한 왕으로도 유명하다. 아달라왕 때 뚫은 계립령의 옛길은 바로 지금의
문경새재 ‘옛길’로 잘 알려져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2FB6514D2923F407)
남산 산행은 그야말로 보물찾기이다. 등산로를 따라 그대로 진행하여서는 아무런
소득을 얻을 수가 없다. 이정표에 지시된 방향을 찾아 스스로가 보물찾기에 나서야
한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구석구석 숨겨져 있는 오솔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생각
지도 않았던 보물들을 만나게 된다.
서남산 코스에서 첫번째로 만나진 목없는 석조여래좌상이다. 팔도 잘려있고 목도
달아난 채 몸뚱아리만 남아있는 형상이어서 얼른 대하기에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훑어보면 옷자락의 주름과 매듭 장식을 표현해낸
기법이 예사롭지가 않다. 떡 벌어진 어깨와 단정하게 앉은 자세에서는 불법을 오랫
동안 수련하신 스님의 기품이 느껴진다. 매듭장식이 너무나도 정교해서 감상하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이 불상은 원래 삼릉계곡에 버려져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2A8A514D2923F811)
그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이다. 이 작품을 만나는 순간부
터 난 아직까지도 내 눈앞에 이 보살상이 있는 듯 그 느낌이 사라지질 않는다. 이렇
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보살상은 단 한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현세
에 다시 살아온다 하더라도 만나보기 힘든 미인형의 얼굴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2F31514D2923FF07)
소담하게 솟아오른 수줍은 볼과 입술 끝을 흐르는 천연의 색이 입혀진 붉은 기운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고 남을 만하다. 석양 무렵에 더 아름답다고 하니 다음에 기
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한번 이 보살상을 만나보고 싶어진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029C544D2955F219)
삼릉주차장에서 0.8Km지점을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 오르다보면 오른쪽 커다란 바
위밑에 기도처로 보이는 곳을 지나게 된다. 바위에는 아무것도 새겨진 것이 없는 것
으로 보아 기도하는 장소로 보여진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4833474D2925B339)
그로부터 2분 후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을 만나게 되었다. 마치 커다란 천 위에 자유
자재로 그려낸 불교의 탱화를 연상케 하는 선각기법의 불상이다. 돌을 마치 천조각
다루듯 붓으로 휘저어내어 그린듯한 이 불상의 기법은 천년이 넘는 세월에도 빛을 발
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마애선각육존불의
아름다움은 내게 아주 각별한 인상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불상 위로 올라가보
면 빗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파놓은 홈을 발견할 수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4BD1474D2925B732)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있다. 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 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4A4B474D2925BB34)
남산은 이렇듯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여 만든 자연 속에 살아 숨쉬는 박물관이다. 신
라 천년의 시작과 끝,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산에다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
기 시작한 신라인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그러면서도 ‘이차돈의 목을 치니 흰 피가
솟구치고 꽃비가 흩날렸다’는 극적인 장치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였던 그들은 ‘이 땅이
곧 불국토이고 왕이 곧 부처’라는 국가적 슬로건 아래 불교를 왕권강화의 전위대로 떠
받들었다.
서라벌 남쪽에 빛나고 있는 바위산은 그 불국토의 이상을 실현하는 거대한 극장이고
캔버스로 안성맞춤이었다. 정과 망치를 들고 산을 올라 부처의 형상을 새기거나 깎아
나갔을 사람들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남산에 처음 길을 낸 개척자들임에 틀림없을 것
이다. 그러나 산의 어느곳을 보아도 그들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곳은 없다.
그들은 바위에 홈을 파 불상을 새겨 넣어야 할 곳과 바위를 깎아내 돌 속에서 부처의
형상을 도드라지게 해야 할 곳, 산 전체를 거대한 기단으로 삼아 탑을 쌓아올려야 할
곳, 또한 아무런 손도 대지 않고 천연 그대로의 모습을 부처의 화신으로 남겨 두어야
할 곳 등을 잘 알고 처신하였다.
그래서 바위에 그림을 그린 듯 홈을 파고 흙으로 빚어 놓은 것처럼 바위를 깎아낸 솜
씨는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 종교적 구도의 행위였음을 실감하게 한다. 그 손끝에
서 갖가지 형상의 불상들이 저마다 다른 미소와 눈빛으로 사람들 앞에 태어났으니, 참
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산에는 지정문화재만도 45건, 흔적만 남은 절터가 150개소, 불상이 118구, 석탑
97기 등 유적만 모두 686개소(200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 정밀학술조
사보고서’ 자료 기준)에 이르니 이미 신라인의 산은 천연 그대로의 산이 아니었다.
남산이 2000년 유네스코의 ‘경주역사유적지구’의 한 부분으로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
도 ‘야외역사박물관’이라는 산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겠다. 그래
서 남산을 오를 때는, 땀 흘린 만큼 높이 올라 먼 곳을 내다보는 즐거움이나 사람의 손
길이 닿지 않는 천연의 아름다움에 젖어들기를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등산로마다 사람들 발
길에 돌처럼 굳어진 산길의 흙먼지 속에, 고단한 산의 신음 소리만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상선암 오르기 전 만나보게 된 경주 삼릉계석불좌상이다. 심하게 훼손되어진
불상을 복원한 것이기에 처음 모습을 짐작하기가 어려워 안타까움을 더한다. 새로 복
원 되어진 것으로 보이는 불상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광배부분도 처음에
는 부서져 있었으나 최근에 복원된 듯 보인다. 당당하고 멋진 몸매에 섬세한 주름을
품은 옷자락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몸매는 멋진데 얼굴이 심
하게 훼손되어 새로 복원된 모습이 훈훈한 이미지에 손상이 간듯 안타까울 따름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41804E4D2925CC19)
12시가 지나면서 시장기를 느낄 때쯤 상선암을 올랐는데 보살님이 수수경단을 빚어
나눠주고 있었다. 두알 손에 쥐어주길래 입에 넣었더니 떡간이 얼마나 잘 맞던지 겨우
내 감기로 하여 잃었던 입맛이 금방 되살아 나는 듯 하였다. 더달라 하고싶은 것을 많
은 사람들을 나눠줘야 할 것 같아 욕심을 지우고 돌아섰는데, 아직도 그 떡간이 입안
에 남아 있는 듯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4C274D4D2925E12F)
상선암에서 0.1Km 올라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있는 곳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1BD4504D2926A91C)
금오봉으로 오르기 위해 상선암에서 오르다 순간 멈칫하여 그 자리에 멈춰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 후련하도록 탁 트인 배리들판을 바라보며 우뚝 솟은 마애불의 자태는
그야말로 ‘원더풀!’을 외치고 싶어진다. 배리 들판 뒤편으로는 깎아지를 듯 솟아있는
금오봉을 향해 뚫려 있는 길이 등산하는 여행객들의 가슴을 설레이도록 만든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1899504D2926AC21)
이렇게 아름다운 자리에 이렇게 멋진 형상이 어찌 자연 그대로의 빛을 반짝이며 솟아
있을 수 있는 것인지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뛴다. 특히 평면적인 선각에서 점점 앞으로
튀어나오는 조각기법은 굳건하고 당당한 종교적인 느낌을 한층 더해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2252504D29269B0F)
이곳 상선암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남산에서 제일 큰 좌불로 얼굴은 돋을새김을 하고
몸체는 음각을 한 특이한 불상이다. 산 아래 배리들판에 남산을 향해 엎드린 봉긋한 산
은 서라벌을 찾은 여신의 화신이라는 망산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2087504D29269716)
금오봉 오르는 길에 망산이 건너다보이는 곳에 잠시 멈춰서서 남산과 얽힌 망산의 전
설을 떠올려 보았다. 단단한 바위산 남산은 그 자체로 강직한 산신의 화신(化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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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 기골이 장대한 남신과 아름다운 여신이 따스하고 기름진 서라벌 벌판에
이르러 참으로 살 만한 곳이라 감탄하는 순간, 그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처녀가
"산같이 큰 사람을 봐라!" 한다는 것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치는 바람에 그
자리에 두 신이 꼿꼿이 서서 남산과 망산이 되었다는 전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B74504D2926B01C)
경주 사람들은 심지어 단단한 바위산을 향해 다소곳하게 엎드려 있는 모양의 망산을
두고서 서라벌 처녀의 순결을 믿었다는 말도 즐겨한다. 그러나 남산을 바라보는 한결
같은 시선을 진리의 세계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이라고 해석하면 모를까, 처녀의 순결
에 비교해서야.....
![](https://t1.daumcdn.net/cfile/cafe/1168F3594D29569545)
아내와 엉켜있는 사내의 다리를 보고도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찌하랴’ 하고
노래하던 처용의 관용을 떠받들며 그의 얼굴을 부적으로 삼던 신라인이 아니었던가?
조선의 유교 사회보다 훨씬 자유롭고 열린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고대인의 열망
이 깃든 산을 두고, 그 땅이 역사의 변방으로 내몰린 시대의 가치관으로 설명되는 것
은 어째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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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런 해석마저도 남산에 깃든 서라벌 사람들의 충정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함
이 없는 듯 하다. 산이 있어 사람이 모여든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땅을 찾아온 신이
스스로 산이 되어 사람을 보듬었다는 전설은 흔하지 않은 믿음으로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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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보물을 찾듯 구석구석 들려서 감상하고 올랐음에도 금오봉까지는 1시간 30
분정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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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은 아침 일찍 햇살이 찾아드는 동쪽 땅이다. 태양의 밝은 빛을 경애하는 사람
들은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를 왕으로 삼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혁거세(赫居
世)라 불렀다. 그 빛나는 알을 낳게 한 서라벌 남쪽 산을 신라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라벌 들판 한가운데 굳세고 단단한 화강암의 몸으로 우뚝 서 있으니 산은
크게 높지 않아도 사람들이 우러르는 마음의 산 높이는 높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71C8594D2956E726)
산은 동틀 무렵부터 해거름까지 태양빛을 받아 희뿌옇게 빛이 나니 밝고 환한 세상을
그리는 사람들이 그곳에 꿈을 묻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남산의 뿌리는 낙동정맥
의 백운산(892m)에서 동해를 향해 가지를 뻗은 호미지맥이 치술령(603m)에서 다시
북상한 기운으로 마석산(531m)을 지나 금오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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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최고봉은 高位山(494m)이지만 <산경표> 상의 중심은 金鼇山(468m)이었
다. 그 산자락에서 가장 높다는 ‘高位’보다는 황금빛 거북이 등 모양이라는 ‘金鼇’가 산
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더 잘 어울렸으리라.
더구나 희대의 문인이자 사상가인 김시습이 세조의 정권찬탈에 세상을 등지고 온 산
하를 떠돌 때 남산 용장사에 머물러, 그의 격정을 녹여가며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 역시 금오산의 이름을 빌려 썼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53C94F4D2927E724)
그러나 족보를 따지고 서열을 가리는 인간사 허망한 잣대를 산자락까지 들이댈 필요
는 없을 것 같다. 산은 내가 장손이다, 아니 키가 더 크니 내가 어른이라 하며 싸우는
일은 없을테니 말이다. 남산의 금오봉과 고위봉 형제는 저마다 나름의 격조를 지키며
友愛롭게 서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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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봉에 오르고보니 앞서 오르기 바빠 뒷모습 조차 볼 수 없는 일행들이 그곳에 점
심상을 펴고 있었다. 산행시간이 짧다보니 시장기조차 느낄 새가 없었는가 보다. 먹을
생각이 없는 것을 간단하게 요기 하고 상야님 이르시는대로 용장골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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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봉 정상에서 내려와 비파골을 거쳐 용장골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
았다. 애초 산악회의 계획대로라면 금오봉 정상에서 임도를 따라 금오정이 있는 방향
으로 하산 해야 될 일이나, 그렇게 하다보면 시간도 많이 남고 남산을 다녀가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서남산코스의 날머리 방향인 용장골을 둘러 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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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골, 용장골은 남산에서도 햇살 바른 남쪽방향으로 뻗어내리고 있었다. 금오산 정
상에서 좁은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비포장도로인 넓은 도로와 만나게 된다. 포
석정에서 남산 동쪽의 통일전으로 이어지는 큰길이다. 여기서부터 용장사지 입구까지
는 편안한 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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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 위쪽이나 아래쪽에는 온통 크고작은 바위들이 뾰족뾰족 솟아있어 기기묘묘한
풍경을 이루는데, 비파들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 묘한 신비감에 젖어들게 하는
풍경이다. 금오산과 용장사지 사이로 흘러내리는 이 골짜기를 비파골이라 부르며, 이
곳에는 비파바위가 솟아 있고 불무사, 석가사등 수많은 절터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비파골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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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2대 효소왕(6년,697)이 남산 망덕사 낙성식에 친히 행차하여 제(齊)를 올리고
있었다. 이때 행색이 누추한 중 한 사람이 왕에게 재(齋)에 동참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마지못해 말석에 참석하라 했다. 재가 끝나고 왕이 조롱조로 그 중에게 말했다.
왕 : 비구는 어디에 사는가?
중 : 예, 남산 비파암에 삽니다.
왕 : 돌아가거든 왕이 친히 불공을 드리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중 : 예, 잘 알았습니다. 왕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다른 사람
에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그리고 스님은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이에 왕이 놀라
스님이 사라진 곳을 향하여 수없이 절하며 어서 빨리 모셔오라고 신하들에게 일렀다.
신하들이 사라진 스님을 찾아보니 비파골 안에 지팡이와 바릿대만 보일뿐 스님은 바위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비파바위 아래에 석가사를 지어 사죄하고,
숨어버린 바위에는 불무사를 지어 없어진 부처님을 공양하였다. 지금도 비파골에는
석가사지와 불무사지가 남아 있다.
임금도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해 어리석은 우를 범했으니, 임금이나 중생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을까?
남산에 올라 진정 보아야 할 것은 돌을 매개로 이어진 산과 사람의 교감이다. 그 옛
날 바위에 새겨진 부처는 돌 속에만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저잣거리를 드나들며 부
패하고 어리석은 이들에게 일침을 놓으며 숱한 전설을 뿌리고 다녔다. 그중 어떤 것들
은 박물관 지붕 아래 옮겨져 인공조명과 첨단 경비 시스템의 경호를 받고 있고, 나머
지는 목이 부러지고 코가 베인 채로 수풀 사이로 나뒹굴거나 땅속에 묻혀버리기도 하
고, 어렵사리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들은 오가는 등산객들의 손때로 분칠을 하며
남산을 스치는 비바람의 세월을 고스란히 맞고 있다. 그것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남아 저마다 다른 대접을 받는 것 역시 우리 역사의 상처이고 흔적인 것이다.
남산의 돌부처와 돌탑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던 간에 처음 돌 속에 영원히 변
치 않은 부처의 세계를 새겨 넣으려던 구도자의 마음마저 다르게 값을 매길 수는 없을
것이다.
높지 않은 남산의 산길을 걸으면 돌부리에 채이듯 쉽게 유물들을 만난다. 그 많은 불
상과 탑들 그리고 폐사지의 주춧돌까지 하나하나 눈길을 주다 보면 어느새 사방의 모
든 바위마다 불상이 새겨져 있는 것 같은 환각이 든다.
'삼국유사'에는 해발 500m도 안되는 낮은 산에 ‘절은 하늘에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
기 떼처럼 솟아 있다’고 기록했다. 그 말 그대로 천년 전 산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의심
많은 중생은 과연 그 산이 ‘땅위의 극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남산에서 가장 높은 8.6m 높이의 약수골 '마애여래입상', 또 하나의 선각마애불상
(지바위골 마애불)이 있는데 금오산 정상에서 내려오다 임도에서 금오산과 반대방향
에 있다 하던데 안내표지판을 못보았기에 그냥 지나쳐온 것이 못내 아쉽다. 임도에서
금오산과 반대방향으로 50m 떨어진 곳, 계곡 정상부에 해발 450m지점 바위면에 '경
주 남산 오산계 지암곡 제4사지 선각마애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지금까지 경주 남산
에서 확인된 불상들중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불상으로 선각된 불상의 모습이 풍화되
어 매우 희미하다. 날개 모양의 천의와 다리를 덮는 치마 모양의 군의의 존재가 특징
이다.
금오봉에서 용장골 안내간판이 있는 곳까지는 12분정도 걸렸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2AC34A4D2928D732)
용장골 입구부터는 길이 가파르고 거칠어서 임도를 따라 걸으며 마냥 풀어헤쳤던
마음에 약간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용장골에 막상 들어서고 보니 빈터만 덩그마
니 놓여 있길래 어찌 된 영문인가 몰라 잠시 의아하였다. 이 빈터가 용장사터인가 보
다 미뤄 짐작을 하고..
![](https://t1.daumcdn.net/cfile/cafe/1551CD4D4D2928DF2B)
용장사곡 삼층석탑은 한단 더 내려가서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4C274D4D2928E638)
용장사곡 삼층석탑은 보물 제 186호로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1번지에 위치해 있다.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집필하며 머물던 곳으로, 현재 몇군데 석축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7033454D292B881E)
용장사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 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 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54034D4D2928F527)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삼층을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
재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층급받침이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4F744D4D2928F12F)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자연석 위에 세운 석탑으로서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6A66454D292B8F26)
용장골에서의 서남쪽방향 조망이다. 가운데 경부고속도로가 지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74FA554D29572213)
삼층석탑 있는 곳에서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으로 내리는 길은 위험한 바
위지대이다. 남산 산행이 쉽게 끝나는가 보다 하였더니, 용장사계곡으로 내리는 길은
제법 산행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워낙 험한 산들을 오르고 내리다 보니 잠깐
동안 스치는 이런 정도의 바위능선길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
![](https://t1.daumcdn.net/cfile/cafe/13746F554D29574013)
거친 바윗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서서 무심히 돌아섰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
하였다. 그곳에도 목이 잘려나간 석불좌상이 있었다. 목이 잘려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훌륭하며 삼층석탑 형태의 높은 대좌에 놓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6FA5454D292BA01F)
왜 일까? 언제 누구에 의해 남산의 불상들이 목이 잘려나가게 된 것일까? 일제시대일
까, 아니면 6.25동란 때일까. 특히나 파손된 불상들이 많은 남산을 산행하며 궁금한 점
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지난번 경주박물관에서 보았던 수없이 많은 머리 없는
불상들은 다 뭐란 말인가? 하기사 천년의 세월이 어찌 그리 호락하기만 했으랴. 단 백
년도 못채우고 가는 인생길이 그다지도 험난한 것을, 말없는 천년의 역사가 남산에서
끓고 있다. 높지는 않으나 보글보글 끓고 있는 듯한 남산의 모습에서 어렵사리 천년의
숨결을 느껴본다. 수많은 머리없는 불상들이 가서 서고 앉아야 할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어찌보면 남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곳에 도
구를 들고 올라 화강암에 선을 긋고 불상의 얼굴을 빚고 깎아서 숨결을 불어넣고자 애
쓴 구도자들의 마음속에 남산이 존재하였던 건 아닌지?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곳, 그곳에 삶의 터전을 자리하고 행복한 삶을 꿈꿔왔던 우리
조상들의 마음속에 자리하였던 곳이 남산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들의 남산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부서져 나간 불상들을 바라보며 앞으
로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남산의 모습을 막연하게나마 떠올려 보았다. 진정 당신
의 남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https://t1.daumcdn.net/cfile/cafe/167761454D292BAB16)
남산은 기와지붕을 얹은 경주IC 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경주 시내를 향해 형산
강 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다. 용장골, 천룡골, 백운골, 백양골, 선방골, 부
처골, 탑골,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계곡마다 골골이 실팍한 물줄기들을 모아 형산
강의 배를 불리는 산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70D3454D292BAE1F)
완만한 동쪽 산비탈을 타고 내려온 남천과 가파른 서쪽 골짜기에서 내려온 형산강
이 남산을 에돌아 하나로 만나면서 영일만을 통해 바다로 간다. 그 물줄기 따라 산기
슭 마다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그 뿌리는 신라 이전 고인돌을 만들던 석기시대 선
조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돌을 깨고 갈아서 도구를 만들던 석기문명의 주인공들에게
크고 단단한 바위는 그 자체가 신앙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나약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생의 버팀목이자 아이를 점지하고 사랑을 맺어주는 신령스런 혼이
깃든 곳, 이곳이 바로 남산이었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https://t1.daumcdn.net/cfile/cafe/16746F554D29585A17)
용장골에서 올려다본 고위산(高位山·494m)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73EA454D292BB219)
용장골에서의 흥분되었던 가슴을 남모르게 진정시키며 힘들게 내려왔던 거친 길을
되돌아 올랐다. 서남산 코스가 흔히 이곳에서 그대로 용장골로 내려가면 될 일이나
우리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는 산악회차가 통일전주차장에 주차해 있을 것이니 그쪽
으로 하산하기로 하고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207214414D292C5C11)
내릴 때 생각하면 한참을 헉헉 거리며 올랐어야 할 일이나 뜻 맞는 분들과의 산행
길이어서 그런지 쉽게 금오산정상 가까이 되돌아 올랐다. 금오산 0.2Km 남겨두고 갈
림길에서 통일전주차장 방향으로 향하였다. 화장실이 있는 갈림길에서 잠시 걷다가
헬기장을 지나고,(사진;늦바람님)
![](https://t1.daumcdn.net/cfile/cafe/11063A4A4D295DB133)
이내 팔각정터 150m갈림길이다.(사진;늦바람님)
![](https://t1.daumcdn.net/cfile/cafe/131C5A4A4D295DBA06)
계단길을 따라 올라서니 '남산관광일주도로준공비'가 있다. 길을 정비하여 놓고
세워놓은 기념비인가 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615E3F4D292C782E)
금오산에서 내려오며 북쪽 사면에 5층석탑이 보이기에 송대장님께 부탁하여 당
겨서 찍어보았는데, 먼거리임에도 생각보다 정확하게 탑의 모습이 찍혔다. 무슨
석탑인지 궁금? 지도상에 있는 늠비봉의 5층석탑이 아닐까? 앞으로 몇번이나 더
남산엘 가야 이런 궁금증들을 모두 풀수 있을런지?^^(사진;늦바람님)
![](https://t1.daumcdn.net/cfile/cafe/167386524D2958972D)
팔각정자가 있던 터이다. 정자는 어디로 가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팔각의 터만
덩그머니 남아있는데, 이곳에서의 조망은 매우 좋은 편이다. 경주시를 싸고도는
낮은 산맥의 흐름이 둥글게 둥글게 마치 살아있는 용이 잠시 쉬기 위해 땅위에 내
려 앉은 듯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87E88484D295DD409)
상사바위는 팔각정터에서 5분거리에 있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
는 남산 상사바위의 전설은 지금도 그 오랜 열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65E53F4D292C8729)
상사바위에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186BCC3C4D292D4022)
금오정150m지점 갈림길에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19676F3C4D292D432E)
제법 굵직굵직한 바위덩이들이 얹힌 바위봉을 올라서니 금오정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715E3C4D292D471D)
금오정의 전경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66B74334D292D6832)
금오정에는 경주남산일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안내간판
이 세워져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045F334D292D6404)
금오정에서 잠시 쉬어 되돌아 내려와 통일전주차장1.55Km, 삼층석탑 620m 갈림길
에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1670F3374D292D7317)
하산길에 삼층석탑 갈림길 이정표, 삼층석탑 70m/ 통일전주차장 1.0Km/
금오봉 2.3Km 지점에서 송대장님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셔 안보이시길래 먼저 내
려가셨는줄 알고 급하게 달려 내려오는데 잠시 후 뒤에 쫓아오고 계셨다. 어찌된 영
문인지 물었더니 삼층석탑 있는 곳엘 다녀오신다는 말씀이셨다. 70m거리를 단숨에
뛰어내리셔 사진을 찍고 뒤쫓아 오셨다.(사진;늦바람님)
![](https://t1.daumcdn.net/cfile/cafe/120540514D2958E20A)
삼층석탑
![](https://t1.daumcdn.net/cfile/cafe/137B65554D2958E70F)
제법 가파른 하산길을 내려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1171DC3B4D292DFF21)
인가가 있는 곳에 다다르니 눈속에서 빛을 잃지 않고 여전히 푸르름을 자랑하는
청죽이 반겨준다. 오래간만에 푸른 빛을 대하니 하루의 피로가 싸~악 가시는 듯
하면서..
![](https://t1.daumcdn.net/cfile/cafe/156E053B4D292E0A26)
신라 전성기에는 남산 자락에 808 군데나 절이 있었단다. 그 식솔들을 건사하기
위해 땔감이며 물을 대느라 남산이 고생 꽤나 했을 것 같다. 더우기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유적지가 모두 남산 자락에 있다는 점이다.
남산 서북쪽 장창골 자락에는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이 발견되었다는 나정(蘿井)과
그를 왕으로 모신 촌장 여섯 명의 위패를 모신 양산재(楊山齋)가 있다. 그리고 그곳
에서 불과 1km 남짓한 거리에 신라의 마지막을 기록한 무대 포석정도 있다. 천년왕
국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유적이 남산 자락에는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D863B4D292E0628)
남산은 천년의 시공간도 영겁의 세월 속에는 찰나와 같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것
은 아닐까? 수도방위사령부처럼 신라를 지키던 요새인 남산 신성, 그 아래 울창한 소
나무 숲 그늘에 남은 포석정은 견훤이 쳐들어 올 줄도 모르고 술과 노래로 여흥을 즐
기다 최후를 맞았다는 경애왕에 대한 기록 때문에 몰락한 왕조의 상징처럼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엄동설한에 적이 가까이 쳐들어왔는데도 포석정에서 술잔을
띄우며 놀았다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경애왕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남산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최후를 맞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역사에서 패자에 대한 기록이 어떠한 것일지를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그 행간의 의미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어찌 되었든 포석정
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이었다는 사실은 산이 말해준다.
포석정 위쪽 황금대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금오봉 아래 남산 산신이 산다고 믿었던
바위가 있다. 역시 '삼국유사'에 따르면 남산 산신은 황금대 아래 포석정으로 내려와
헌강왕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황금대는 천년 전 그 이름 그대로 지금도
저무는 저녁 햇살을 받아 무심한 듯 빛난다. 천년 전 고대인의 흔적으로 연명하는 도
시 경주, 그 중심에 우뚝 선 남산은 신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고갱이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 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6783B4D292E0E35)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경주 남산은 천연 그대로의 산의 실체는 없고 사람들 가슴에
꿈같은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산이 서라벌의 남쪽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남산이 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밝은 삶의 남쪽을 그리워하는 신라 사람들의 지향이 만들어낸
꿈같은 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산이란 어느 곳에나 있는 산이면서 또 어디에도
없는 산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 꿈꾸는 남산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
지?
(11.01,08)
![](https://t1.daumcdn.net/cfile/cafe/19445B474D295CE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