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도 말고 늦지도 말고
남녘에서는 벚꽃이 만개하여 진해 군항제가 개막된다는 화신(花信)이 전해왔는데, 나의 산장에는 늦게 온 폭설이 아직도 그대로 쌓여 있어 언제나 눈이 녹고 땅이 건조해져서 경전(耕田)하여 늦지 않게 감자 파종을 해야 하나 눈치만 보고 있다.
식물은 1주일만 늦게 파종해도 성장이 더디고, 1주일만 빨리 또는 늦게 수확해도 품질이 저하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농사의 적기는 매우 중요하기에 나는 매일 마을 산책길에 나서 토박이 농부들의 동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비단 작은 나라이지만, 그래도 농사 적기는 남부·중부·북부가 다르고 평야지대와 산간지대가 다르니, 일괄하여 말하기 어렵고 토착 농부들의 경험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또 기상이변으로 기온이 올라 식물이 이제 때가 됐다고 스스로 개화했으나, 세찬 바람을 동반한 기온의 급강하가 이루어지면 발아한 싹이 얼고 개화한 꽃이 수정도 전에 우수수 낙화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재파종을 하거나 작년처럼 동해피해로 사과 수확량이 대폭 줄어 사 먹기도 어려운 금사과가 되기도 하는데, 이때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고 그저 천재(天災)려니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아직 농사는 하늘이 도와주어야 하는 것 같다.
내가 사는 곳은 중부지방이지만 600고지 산간마을이어서, 한마디로 고랭지를 고려하여 작물 재배를 하여야 한다. 산속 고랭지란 해가 늦게 뜨고 빨리 져서 하루 일조시간이 부족하고, 봄이 늦게 오고 겨울이 일찍 오기에 일조량이 부족하여 작물 재배에는 그리 적지가 아니다. 그러니 일조량이 부족하거나 저온에도 잘 자라는 작물을 선택해서 재배해야 한다. 10년간 농사를 지어본 결과 감자·고구마·옥수수·고추·김장 무 배추·마늘·양파 재배는 그런대로 되는 것 같고, 과일나무는 사과·돌배·호두·밤·복숭아·자두 재배가 가능하며, 산채로는 명이나물·땅두릅·부지깽이나물·어수리·곤드레·눈개승마 등을 봄철 월동 채소로 수확할 수 있다.
다행히 거주 지역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채소의 경우 비닐하우스에 조금 일찍 파종하면 조기 수확이 가능하므로, 수년 전부터 6평짜리 비닐하우스를 설치하여 산장의 봄을 조금 앞당기고 있다. 그리하여 3월 하순경에는 상추·배추·열무 씨를 뿌리고, 4월 초에는 포트에 비트·완두콩·콜라비·옥수수 씨를 넣고 며칠 간격으로 물을 주며 애면글면 모종을 키우게 된다.
우리 속담에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요즘 강산은 물론이고 사람과 만물도 10년 주기로 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61세에 귀촌하여 호기(浩氣)를 가지고 농부가 되었는데, 칠 학년이 되면서 영농을 시작해야 하는 3월이 시나브로 다가오면 슬금슬금 두려워진다. 10년 전 귀촌하면서 생활 편의와 조경 차원에서 설치했던 물레방아·원두막·솟대·데크·차고 천막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썩고 떨어지고 헤어져 이제는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보수를 미루고 있는데, 당장 영농이 시작되는 4월 전에 위험한 원두막을 철거하고 적설로 무너진 차고 천막을 새로 설치해야 하는 비상이 걸렸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전 이장의 협조를 받아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아들은 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고, 사위는 어린 아들 둘 육아에 전전긍긍하여 별 도움이 인되고, 그리고 필요할 때 같이 궂은일 할 친구 하나 없으니 인생을 헛산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우선 급한 대로 다음과 같은 일들이 대기하고 있다.
- 동절기 대비 보일러 물을 뺏는데, 이제는 다시 물을 넣어서 보일러를 가동해야 한다. - 동해 방지를 위해 마늘밭에 지난 늦가을에 덮었던 부직포를 벗겨주고 추비와 병충해 방제를 해야 한다. - 적설에 대비해 비닐하우스 비닐을 벗겼는데, 다시 비닐을 씌워 각종 채소를 파종해야 한다. - 은행 열매를 주어 1/2을 돼지꼬리 히터봉으로 1차 가열하여 천연 살충제를 만들어두었는데, 나머지 1/2을 마저 가열하여 살충제 제조를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 4월 초에는 뒷밭을 경전하여 감자·옥수수·하늘마 파종을 하여야 한다. - 뒷밭 테두리에 1년간 잡초 발생 방지를 위해 제초제 알리온을 살포해야 한다. - 개울물을 끌어 쓰는 양수기 모터를 점검하고 뒷밭까지 급수 호수를 깔아두어야 한다. - 3월 말 전에 각종 과일나무에 월동 후 병충해 방제를 위해 황소독을 해야 한다.
1,000여 평의 산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면 하루종일 종종걸음을 쳐야 하지만, 항상 힘이 들기보다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이 나이에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가능한한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을 일치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얼마나 더 살까보다 공사 간에 얼마나 일을 더 할까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자 한다. (2024. 03. 29.) |
첫댓글 산장의 농심.....이해가 갑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애면글면 전전긍긍, 봄 산장 가동, 농사 준비에 부산한 갈헌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1천 평의 땅에 여러 부속시설 하며 손 보고 준비해얄 것들이 한둘이 아니지요. 더구나 농사는 때가 있는 법이라 미룰 수도 없구요. 파종, 모종에 시기를 맞추는 일이 특히 신경이 많이 쓰이지요. 너무 일찍 심으면 동해의 위험에다 성장 위축이 될 수 있고... 나도 비슷한 여건인데 그래도 너무 서두르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천천히 하는 편입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쉬며쉬면 하세요~
갈헌 바쁘신 모습이 눈에 보이네요. 게을러 밭에 못가고 ㅎㅎ.
집필에도 타이밍이 중요하지만 농사일도
타이밍이 중요하지요.
갈헌이 농사일로 타이밍을 본다는것은
자연과 하나가되는것이니 장수의
비결입니다.
노후에 일이 있다는것은 큰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