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간 한국전쟁 7】
마지막 편입니다.
한국전쟁은 남북의 국가권력이 각 마을 공동체에 깊이 개입해 들어와 사실상 해체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럼 남북의 국가권력은 왜 이와 같이 마을 공동체에 깊숙이 개입했던 것일까.
첫째,남북의 국가권력은 정부 수립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그리고 전쟁 상황에서 각각 자신들의 체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최말단의 마을 주민들에게까지 요구함으로써 국가의 권력기반을 굳히려 했다.
1948년 남과 북에는 각각 정부가 들어섰지만 아직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그리 높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것은 양쪽 모두 분단정부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고,남북 모두 국민들 사이에 좌우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과 북의 국가권력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마을 주민들에게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층성도를 높이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남북의 국가권력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직접 학살에 나서도록 한 것도 주민들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다른 쪽 편을 학살한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목숨을 어느 한쪽에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인민군이 인민재판과 철수 시의 학살에 주민들을 동원한 것도 동원된 주민들의 북쪽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곧 남쪽 정권에 다시 충성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쪽 정권이 수복 이후에 역시 청년단원들을 동원하여 부역자와 그 가족들을 처형한 것도 역시 남쪽 정권에 대한 충성을 확실히 해두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아울러 학살이라는 방법을 동원한 것은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감히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했다.
둘째,남북 정권은 전쟁을 치루면서 최대한의 인적.물적 자산의 동원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단인 마을과 그 주민들을 확실히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남쪽이나 북쪽 모두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의 동원이 절실했다.
따라서 마을 주민들에 대한 확실한 파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셋쩨,남북 정권은 전쟁 과정,그리고 전쟁 이후를 대비하여 치안을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치안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역시 행정의 말단인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상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남북의 국가권력 모두 마을 내부에 국가권력을 대신하여 마을 주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사람과 조직을 두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권력이 마을에 그처럼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과연 마을 안팎에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전쟁 이전에 이미 오래전부터 마을 안팎에는 여러 갈등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갈등이 인명 살상으로까지 연결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호남지역에서 여수.순천 사건 이후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것은 국가권력 즉 군이나 경찰에 의한 체포와 처형이거나 아니면 작전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민간인이 직접 나서서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금하고 재판을 하고 직접 처형한 것은 전쟁 중에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그 불씨가 된 것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었다.
그리고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재판에 의한 처형이 시작되면서 민간인의 학살 개입이 시작되었다.
인민군 철수 시에 빚어진 대량 학살은 북쪽의 국가권력이 지시한 것으로 여기에 민간인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군과 경찰이 들어오면서 이번에는 남쪽 국가권력의 묵인하에 민간인들이 개입된 학살이 진행되었다.
군인도 아닌 민간인,지식인처럼 보이는 분이 북한군이 사용하는 방망이수류탄을 들고 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에서 당시 마을로 간 한국전쟁의 상황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