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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신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우리에게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두 번째는 그 분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그리고 세 번째,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알고 나면 우리가 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이것이 분명해지면 비로소 불교 신자로서 자기정체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면 돈이나 권력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선택한 나의 삶이 정말 기쁘고 좋아서 어디를 가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불자로서의 자기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은 없고, 무조건 불교가 옳다고 고집하여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 하는 방식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시대입니다.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다른 민족들이, 다른 종교들이, 다른 종파들이 모두 개방되어 섞이고 있습니다. 이 열린 공간에서 내 것을 주장하려면 눈 감고 귀 막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듣고, 그런 후에도 이 길을 가겠다는 굳은 결심이 서야만 아집이 아닌 진정한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식에 투자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돈을 벌 수 있다고, 옆에서 아무리 말해도 실제로 본인이 투자를 해 봐야만 그 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이익이 생겼지만 나중에 그 작은 이익이 미끼가 되어 파산하는 경우가 많지요. 이것은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과 같습니다. 부자가 되려면 작은 이익에 현혹되지 말고 그렇게 얻어진 이익이 지속적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듯,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는지를 가르침대로 직접 행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돈, 지위, 인기와 같은 것들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거기에 맞춰 살아 돈도 벌 만큼 벌고 지위도 높을 만큼 높아졌다 합시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참 힘들고 괴로울 것입니다. 상처도 많이 받고 피곤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느 순간 ‘이게 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합니다. 그 이익이 결코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이익인 줄 알았으나 실은 손해라는 것을 느끼면서 다른 길을 찾게 됩니다. 그런 때 불법을 만나면 조금씩 생각이 바뀝니다. ‘아, 이렇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구나. 나를 고집한 게 나한테 이익인 줄 알았더니 도리어 손해였구나. 사랑 받는 게 좋은 줄 알았더니 사랑받으려고 하는 데서 괴로움이 생기는 거구나.’ 이렇게 현실을 바르게 앎으로써 삶의 길을 수정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부터는 또 새로운 갈등이 나타납니다. 새로운 법을 만난 것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거기서 약간만 벗어나게 되면 손해보는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지요. 전에는 길을 몰라서 헤맸지만 이제는 길을 알긴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 정진하다 보면 전에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또 새로운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방황하는 마음이 잦아들면서 다시 발심을 하게 됩니다. 이럴 때 성지 순례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배워 재발심하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통해서 첫 번째로 체득해야 할 것도 불자로서 부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그 가르침의 현장에 가서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단순히 설명만 듣고 아는 것보다는 그의 고향에 가서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이나 그의 나라의 역사적 배경, 자연환경 등을 조사해 보면 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아,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그럴 수도 있겠다.’ 하며 쉽고 자연스럽게 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인도의 시골은 아직도 2500년 전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부처님 당시의 삶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결국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그냥 눈 감고 귀 막고 믿는 게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해서 확실하게 알아버리고 나면 그 가르침이 저절로 믿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분이 아무리 훌륭한 분이고 그 가르침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았을 때 나에게 어떤 구체적인 이익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성지 순례 중에서 우리는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성지 순례에서 얻는 깨달음은 각자의 근기에 따라 다릅니다. 자비의 비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내리고 있는데, 중생들은 각기 크고 작은 제 그릇을 가지고 와서 그 그릇에 따라 빗물을 얻어간다고 합니다. 여행의 경험에서 여러분들이 체득하는 것은 각자 개인의 몫입니다. 14일의 여행기간 동안 똑같은 환경에서 생활하면서도 정말 못 살겠다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고, 상황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에서 방뇨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도 있고 화장실이 없어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화장실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까르마, 개인의 업식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그처럼 성지순례를 통해서 어떤 걸 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 경계 즉, 환경이 나빠지면 사람들은 보통 갖고 있던 성질을 드러냅니다. 인도는 환경이 많이 열악하기 때문에 사흘만 지나면 다들 자기 본성이 나옵니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급한 편인데 인도는 사람을 무한히 기다리게 만드니, 그런 상황이 자기의 까르마를 드러내게 만들지요.
이렇게 환경이 열악한 세상을 만나 보면 한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우리 남편 우리 부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자기 삶의 지위가 얼마나 좋은지를 알게 됩니다. 또 마냥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참지 못해서 화를 내는 자신을 보면 자기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인도는 나쁘게 말하면 나쁜 곳이지만 수행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성질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자기 까르마를 여실히 드러내게 만드는 곳이니까요. 이렇게 자신을 제대로 보고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여행하다 보면 겪게 되는 불편함 때문에 인도정부를 비난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또 구걸하는 아이들에게도 처음에는 불쌍하다며 이것저것 적선하다가 나중에는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리한 사람은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자기 까르마를 봅니다. 어느 순간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보게 되지요. 똑같이 불편한 조건에 있었는데 불평하지 않고 세상 탓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난 왜 이럴까? 이게 내 업식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행복을 만드는 것도 불행을 만드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알아차리게 된다면, 이번 순례는 그 사람의 수행에 엄청난 보탬이 되는 것이지요. 또, 옆 사람이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릴 때 그런 꼴을 보고 내 마음에 걸린다면, 그것 역시 상대를 그대로 보아내지 못하는 나의 문제, 내 까르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경계입니다. 인도만 경계인 것이 아니라 인도라는 경계에서 성질내는 사람 역시 또 하나의 경계인 것입니다.
순례를 하다보면 마음의 변화가 계속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잘 왔다는 마음과 괜히 왔다 하는 마음이 찰나를 두고 바뀝니다. 이렇게 늘 자기 마음을 보고 다니면 우리 마음의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변하는 것이고, 그러니 이 마음이라는 것은 믿을 바가 못 되는 것이구나. 이것은 다 내 업식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구나.’ 이렇게 배운 것을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질 나쁜 아내나 남편이 수행하는 데에는 좋은 연습상대라고 하는데, 인도 또한 수행의 장으로 더없이 좋습니다. 마음이 무상하다는 것을 읽을 수 있기에 아주 좋은 수행처가 됩니다. 성지 순례를 통해 우리는 불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고, 자기 수행에 있어서 다시 발심하는 좋은 계기도 가질 수 있습니다.
소개
네팔과 티베트의 경계는 북쪽으로 8,000m 이상 되는 큰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러나 남쪽으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산은 점점 낮아져 룸비니 지역에서는 전혀 볼 수 없으며 완전한 평원을 이룬다. 그나마 히말라야산과 가까운 이유로 개울에 많은 돌들이 뒹굴고 있다. 고락푸르에서 북쪽으로 오다 보면 소나울리를 지나 바이라하와를 거쳐 서쪽으로 가면 발가하와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룸비니가 있고, 계속 더 올라가면 카필라바스투성이 나온다. 바이라하와에서 오른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로히니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을 경계로 카필라성과 마야부인의 고향인 콜리성이 위치하고 있다. 한참 가물었을 때 이 강줄기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부처님이 말리신 기록이 남아 있다.
네팔은 인구의 50% 이상이 불교도이지만 국교는 힌두교이다. 인도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은 대부분 힌두교도들이고, 몽골리안들은 거의 불교도들이다. 히말라야 등반으로 외국인이 많이 왕래함으로 인도보다는 국가정책이 개방적이며, 인도보다 경제가 궁핍하나 생활수준은 거의 같다.
네팔에 위치한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는 불교성지 중에서 제일 먼저 황폐화되었던 것 같다. 현장스님이 왔을 때 이미 폐허가 되어 완전히 정글로 덮여 있었고, 강도가 많아 순례객들이 이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불교가 사라지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이 곳을 다행히 아쇼카 석주의 명문을 근거로 커닝험이 찾아낸 곳이다.
보드가야 주위는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전 6년간 고행하신 곳이며, 부처님이 성도하신 곳이며, 성도하신 뒤에 교화하여 1,000명의 제자를 한거번에 두게 된 곳으로 수행과 성도와 교화의 사례가 같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이 곳은 가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나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 하여 특별히 보드가야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처님은 룸비니에서 태어나 약 28Km 떨어진 카필라바스투에서 29살 까지 왕자로써 성장하셨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카필라바스투에서 출가하여 바이샬리를 지나 라즈기르로 들어오면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아라라까리마와 웃타카라마푸트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드디어 스승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의 길이 아님을 알고 다시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그 당시 수행자들이 모여들던 곳인 가야로 오신 것이다. 여기서 6년간 정진을 하시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시게 되었다. 성도 후 옛 도반인 다섯 비구를 찾아 서북쪽으로 걸어가셔서 바라나시 근방에 있는 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시고, 다시 보드가야로 돌아와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셨다.
바라나시에서 도시의 혼잡함을 벗어나 가로수 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약 7Km 떨어진 곳에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공원이 있다. 이 곳이 부처님의 초전법륜 성지인 사르나트이다. 박물관을 지나 사슴동산이라고 써 놓은 곳으로 들어가면 녹야원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왼쪽은 다르마라지크 스투파, 오른쪽은 다메크 스투파이다. 다르마라지크 스투파를 지나 뒷쪽에 물간다쿠티가 있는데 녹야원이란 뜻이며, 다메크 스투파보다 더 오른쪽으로 신축한 삐죽한 모양의 건물이 현재의 녹야정사라고 불리우고 있다. 다르마라지크 스투파에서 조금 왼쪽으로 가면 아쇼카 석주가 있고, 그 옆으로 원래 녹야정사가 있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아쇼카왕 때 이 곳에서 수백 명의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의 정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발굴해 놓은 자리만 남아 있다.
5세기에 이 곳을 다녀갔던 법현스님은 이 곳에 두 개의 승원이 있고 승려가 살고 있다고 했고, 그 이후의 현장스님의 기록에는 담장과 중각이 즐비하여 아름다우며 정사가 있어 1,500명의 승려들이 면학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주위에는 다르마팔라가 조직한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에서 세운 절과 여러 개의 학교가 있고, 티베트 사람들이 지은 절과 대학이 있다. 티베트 대학은 인도정부에서 후원하고 있기 때문에 학비는 무료이다. 인도정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난민들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마가다에서 바이샬리를 거쳐 쿠시나가르까지 이르는 길은 북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가던 방향으로 계속 연장하여 보면 그 곳은 카필라성과 이어진다. 이로 미루어 부처님의 마지막 유행은 고향인 카필라성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머리를 북쪽으로 두신 것도 고향을 향한 것이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쿠시나가르는 고락푸르의 동쪽 55Km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부처님께서 교화의 긴 여정 끝에 열반에 드신 곳이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쿠시나가르처럼 작은 마을, 외진 시골에서 열반에 드시려는 것은 그만 두시옵소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지금은 이처럼 작은 마을이지만, 옛적에는 그렇지 않았느니라"라고 하시며 쿠시나가르는 부처님 이전에 매우 풍요롭고 번영하였던 마을이었으며 먼 미래에 이 곳이야말로 성스러운 곳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아난존자가 그렇다면 숲에서가 아니라 말라족의 성안에서 열반에 드시면 어떻겠느냐고 청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마지막 열반을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다 나를 만날 수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만약 성안에서 열반에 든다면 어떤 사람은 나를 친견하고 싶다 하더라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왕족이든 천민이든 짐승이든 누구라도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다 이 곳에서 여래의 마지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곳은 불자들은 물론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스러운 마을이 되었다.
라즈기르는 강대한 북인도의 군주국가 마가다국의 수도였다. 인도에서 산을 보기는 참으로 드문 일인데 바이바라 언덕과 비푸라 언덕, 라트나 언덕, 찻타 언덕, 소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연의 요새이다. 라즈기르는 빔비사라왕이 머물고 있던 구 왕사성과 아들인 아잣타삿투왕에 의해 건리됩 신 왕사성으로 나뉘어져 있다. 2,500년 전에 쌓은 옛 성의 방벽은 길이가 무려 40Km나 되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중에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성벽이라고 한다. 당시 강가강 북쪽의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국을 의식해 튼튼히 쌓은 것으로 보인다.
북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꽃피우던 왕사성은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출가하여 이 곳에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하였고, 빔비사라왕과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성도 후 천 명의 비구를 이끌고 돌아와 오랫동안 머물며 교화 설법하시며, 빔비사라왕은 물론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 등 유능한 제자가 귀의하였고 최초의 불교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개용수의 부족으로 파탈리푸트라로 수도를 옮겨 이 곳은 차츰 황폐해졌다.
불교의 쇠락으로 이 곳 불교성지는 소수의 바라문과 자이나교도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곳 라즈기르는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의 중요한 수행처로서 현재에도 많은 자이나교 사원이 세워져 있으며 신자들의 순례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쉬라바스티는 강가강 서북쪽에 위치한 코살라국의 수도였다. 그 당시 인도에는 300여 개의 나라가 있었으나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은 고대 북인도를 형성하고 있었던 16개의 나라들 중 가장 강력한 군주국가였다. 코살라국은 매우 호전적이고 다혈질의 기질을 가진 국가로 강한 군사력으로 번영을 이룩했던 나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폐허로 변해 버린 채 드넓게 펼쳐진 밀림의 모습만 말없이 보여줄 뿐 세월의 흐름에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마가다국은 오랜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는 온화하고 역사 싶은 나라라고 한다면, 코살라국은 신흥 국가로 경제, 정치, 군사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했지만 문화, 종교, 사상적인 면으로는 뒤처지는 편이었다. 전쟁을 좋아하며 거칠고 강한 기질을 가진 코살라국은 수행자를 존경한다거나 그 중요성을 전혀 몰라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데 무척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이유로 자이나교와 아지비카교 외에도 많은 외도들의 사상이 매우 팽배해 있었던 이 곳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사건과 부처님을 비방하고 위해하는 무수한 일화가 경전에 많이 나온다.
부처님은 도를 이루시고 3년째 되던 해 사위성에 첫발을 디디신다. 그 이후 이 곳은 부처님의 중요한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경전상에 쉬라바스티를 배경으로 한 일화가 많고 또 많은 경전을 설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께서 45년간의 교화여정 중에 이 곳 사위성에서 24안거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 중에 19안거를 수닷타장자가 부처님을 위해 마련한 기원정사에서 머무셨는데, 주변에는 숲이 우거져 있고 밝고 안온하여 수행처로는 아주 적합한 장소로 부처님이 아주 사랑하셨던 곳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파탈리푸트라까지가 마가다국 영토이고, 강을 건너 북쪽은 경전에 자주 나오는 밧지족의 영토였다. 파트나에서 세계에서 가장 긴 10Km가 넘는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를 건너가면 인도 최대의 바나나 집산지인 하지푸르를 지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바이샬리가 나온다.
파트나를 흐르는 강가강은 북쪽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칸타키강, 골고라강, 야무나강이 합쳐진 강가강과 데칸고원에서 흘러오는 손강 등 네 개의 강이 모여 하나가 되어 흐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개의 강에 비유하여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세상에는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계급 차별이 있지만 내 법 안에는 없다. 네 개의 강이 결국 하나가 되어 흐르듯 내 법 안에서도 하나가 된다."
바이샬리는 북인도 일대의 교통,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그 당시 가장 화려하고 부유했던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언론과 새로운 사상을 마음껏 누리던 인도 최초의 공화국이었다. 그래서 열반경에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으로 밧지족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법 7가지를 설하시는 모습이 있다. 역사적으로 공화국제도의 기원이 이 곳이라 해서 지금도 인도 중앙정부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면 관리들이 이 곳 카라우나 포칼 연못에서 물을 떠 가지고 가서 성수로 사용하며 의식을 집행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올라가 3개월간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법을 설하시고, 이 곳으로 하강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하늘과 인간세계를 잇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장소로 더욱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아쇼카왕은 이 곳 상카시아에 많은 스투파와 대규모의 사원을 건립하였고, 또 아쇼카 석주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발굴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교유적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고, 현재 불교의 유적지로 추정되는 허물어져 있는 탑 위에 힌두사원을 세워 링가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 아쇼카 석주의 머리 부분인 코끼리 두상만이 그 곳을 지키고 있다. 상카시아를 상징하는 조각으로 세 개의 계단이 있고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로 범천과 제석천이 시립하고 내려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지금 이 곳에 남아 있는 것은 계단은 다 부서지고 발 모양만 세 개 남아 있을 뿐이다.
유일한 석가족의 후예로 붓다라는 성을 갖고 있는 불교인들이 이 지역에 아직 살고 있다. 인도에 불교가 없어졌을 때도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상카시아 근방 메인뿌리, 이따와란 도시에 불교청년회를 조직해 회원이 2,000명이나 되고, 인도 전역에 그 지부를 갖고 있으며 힌두어로 된 불교잡지를 격월로 발간하고 있다.
첫댓글 오늘 향일암과 보리암 성지순례를 마치고
귀로버스에 앉아 법문들을 읽고 있습니다.
[성지 순례에서 자신을 제대로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성지 순례에서 얻는 깨달음은 각자의 근기에 따라 다릅니다. 자비의 비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내리고 있는데, 중생들은 각기 크고 작은 제 그릇을 가지고 와서 그 그릇에 따라 빗물을 얻어간다고 합니다]
내 작은 그릇에 욕심만 담으려한
어리석음이 참 부끄럽습니다
귀한 법문 감사드립니다
법문을 읽으면서
행복을 만드는 것도
불행을 만드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마음이라는 것은
늘 변하는 것을 ~~
그래서 무상하다는 것을
발심하고 수행해야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