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2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것이 보편적인 신앙고백이자 교리이다.그런데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육신때 조성되신 것이라면 신약성도들이야 별문제 없겠지만 구약성도들은 실체가 없고 존재하지않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었다는 것인데,그것이 과연 온전한 신앙이라 할수 있는것인가?구약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은것이고 신약성도들은 신인이신 그리스도를 믿는것이라고 해명하기엔 찜찜함이 남는다.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북이스라엘에 선지자는 백여명,바알에 무릎꿇지않은 성도는 칠천명만 남았던것은 장차 하나님의 두 증인이 룡의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기까지 삼일반동안 그 시체가 능욕을 당하게 되는 사건의 예표이다.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는 기독교가 오해하는것처럼 이땅에 교회가 흥왕하게 되는것이 아니라,정반대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찾아볼수 없을정도로 황폐해지게 된다.
원본은 복사본보다 권위와 효력이 절대우위에 있다.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전부터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시는 형상으로서,피조물인 사람의 절대적 원본이 되신다.
#20210612
[신22:5]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동성애와 성전환은 비키니나 레깅스를 입은 남자처럼 본성적인 역겨움을 일으키는,억지로 순리를바꿔 역리로 쓰는 가장 가증스럽고 돌이키기 어려운 죄악이다.
#20190612
'혼과 영이 성경에서 함께 사용될 때는 주로 영혼의 두 기능을 가리키는데, 영은 명철을 담당하고, 혼은 정서의 근원지이다.' - #칼빈주석 #공관복음 #누기복음 1:46, p.66
칼빈 선생의 견해를 근거로 한다면, 적어도 그는 인간의 영혼이 분리할 수 없는 단일체라 하더라도 영의 기능과 혼의 기능은 구분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영은 명철, 즉 지성을 담당하고 혼은 정서, 즉 감성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는 듯 하다.
나 또한 영혼이 단일체이며 두 기능이 구분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각 기능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칼빈 선생이 언급한 명철과 정서, 즉 지성과 감성은 모두 혼의 기능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혼은 인간의 육신을 관장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의 기능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담당한다고 본다. 혼은 영과 육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령이건 악령이건 좀 더 강력하게 인간의 영에 간섭하면 혼과 육의 통제에서 벗어나 평범하지 않은 언행을 하는 경우를 성경에서 종종 볼 수 있다.
#크리스천다이제스트 #CH북스 #박문재 역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입을 막으신 것은 마치 친구가 서프라이즈 축하를 해주기 위해 당사자의 눈을 잠시 가리고 잠깐 이동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이를 사가랴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엄하신 징계와 책망이라고 보는 칼빈 선생 등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칼빈주석
#매일성경 #히브리서 8:1-13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인들이 존귀하게 여기는 천사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율법이나 레위 계열 대제사장보다 높고 크신 분이시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진정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설명해 왔는데,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해사 그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즉,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가 훌륭한 분이라 해도 그것이 진정 내 구원과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면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연약해지고 무력해지려 할 때 사도 바울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가 믿는 그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한 번 힘써 가르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인데, 우리가 험난한 신앙의 좁은 길을 가면서 그만 두고 싶은 때가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존귀하신 분이신지, 그분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더라도 우리의 어려움을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 연약함을 다시 일으키시며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임을 인식해야 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흠없는 동물들을 바쳤다. 그러나 아무리 제물로 드리는 동물들이 깨끗하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 할 수 없으며, 그나마도 한시적이고 일회적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신 것은 그 동물의 제사에 어떤 효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었기 때문에 마치 어음과 같이 용납하신 것 뿐이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는 영원할 수 없었으며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더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시고 계속 이 땅에 계셨다면 참 제물인 자기 몸과 피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셨을 것이므로 제사장의 역할을 완수하지 못하셨을 것이며 유대인들의 제사 제도도 폐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읽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과 피를 하나님께 단번에 드리심으로 영원히 죄사함의 효력이 있는 속죄제사를 드리셨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한 자신의 기도와 우리의 회개와 선행의 제사를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율법을 통해서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순종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런 신자들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이었어도 시간을 초월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우리와 함께 동참하여 참된 안식에 이르렀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하거나 보려 하지 않고 율법 자체에만 연연해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도 반역하는 유대인 같은 자들이 신자와 담임목사를 가장하여 교회에 머무르면서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끊임없이 교묘히 대적하는데, 그들의 결말은 광야에 엎드러지거나 땅이 갈라져 죽은 패역한 백성들의 결말보다 더 비참하고 끔찍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자 하는지를 보면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성경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심령과 신앙생활에 하나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도 없고 성경도 없다면,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인지 심각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특별히 부르신 담임목사들은 더룩 스스로를 경계해야 마땅하다. 자기가 더이상 그리스도의 청지기로서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교회를 이끌어갈 수 없을 지경이면, 차라리 담임목사의 자리를 내어놓고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지키는 것이 낫다. 그러지 않고 끝까지 불의한 방법으로 담임목사직을 유지하려 한다면 비록 이 땅에서는 그 지위와 권한을 부당하게 누릴 수 있더라도 심판의 날에는 그리스도께 인정받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겨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보혜사로서 성령 하나님을 주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자들은 자기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머무셔서 자신의 감동으로 기록하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우리의 지성을 밝히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의 감성을 움직이신다.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복음 사역자들을 통해서 성령의 말씀을 가르치시지만, 최후 부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신자에게 직접 성령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실 것이다.
#20180612
레위 자손 고라와,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작당을 하고 세력을 규합하여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다.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비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이 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들인데, 모세와 아론 너희들은 대체 무엇이길래 회중보다 더 스스로를 높이는가?
2.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준다고 했으면서 왜 그러지 못하고 광야에서 백성들을 말려 죽이는가?
저들의 비난의 내용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타당하게 볼 수도 있겠으나, 그 내면을 보면 그야말로 억지의 향연이다.
첫째 비난에 대해서는, 원론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입은 것은 맞지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특별한 사역자를 세우셔서 이끄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때문에 저들의 주장은 결국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이다.
둘째 비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 원인은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백성들이 울며불며 원망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모세의 잘못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들의 잘못인데도, 저 반역자들은 그 책임을 모세와 아론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는 것이다.
저 반역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자신들과 반역에 동참한 자들과 자신들의 가솔들이 모두 땅이 갈라져 삼키움을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