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20
3월5일[사순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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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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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3--pKHohNk (김선류 타대오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8944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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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오 복음 17장 4절)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 입니다.(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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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JDh2_Esv7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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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면 오시는 두 분: 모세와 엘리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은 존 뉴턴이라는 성공회 신부가 노예선 선장을 하며 노예들에게서 들은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존 뉴턴은 1725년 영국 런던에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와 성공회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여 늘 어린 뉴톤을 무릎에 누이고 성경을 읽어주고 찬송을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뉴톤의 나이 일곱 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뉴톤은 열한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노예 무역선 선원이 됩니다. 그 당시 가축 이하의 대우를 받던 노예의 삶을 당연하게 여긴 존 뉴턴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청년이 된 뉴톤이 노예선 선장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싣고 대서양 해를 지나 런던으로 돌아오던 중 엄청난 폭풍을 만납니다. 폭풍우는 열 하루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물을 퍼내며 사투 하던 새벽 1시,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도록 성난 폭풍 속에서 너무나 지쳐 기둥을 붙잡고 있던 뉴턴은 지난 날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들었던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잠언 1,23-33절이었습니다. “내 훈계를 들으러 돌아오너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 영을 부어 주어 내 말을 알아듣게 해 주리라. 내가 불렀건만 너희는 들으려 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건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기에…. 파멸이 너희에게 폭풍처럼 닥치고 불운이 너희에게 태풍처럼 들이치며 곤경과 재앙이 너희 위로 닥칠 때 나는 그렇게 하리라….” 그는 오랜만에 간절한 기도란 걸 하게 됩니다. 그는 이날을 제2의 탄생일로 삼고 1775년 선장직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그의 나이 39세 때 성공회 사제가 되어 43년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변모하실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장면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을 나타냅니다. 성령은 두 형태로 오시는데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는 가르침이고 엘리야는 사랑의 불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새로 태어나게 할 때 가르침과 보호를 주는데 이것을 진리와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위에서 존 뉴턴이 떠올린 잠언의 구절 “내 훈계를 들으러 돌아오너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 영을 부어 주어 내 말을 알아듣게 해 주리라”에서 훈계가 진리이고 영이 은총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아 전했습니다. 진리를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은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신 것은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에서 은총과 진리가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은총과 진리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마치 존 뉴턴이 어머니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늦게나마 새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라고 하신 것은 당신처럼 기도하는 것이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당신만이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선교할 때 정글에서 한 아버지와 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의 아빠가 급한 목소리로 “얘야, 얼른 땅에 바짝 엎드려라!”, “자, 이제 내게로 빨리 기어 와라!” 하고 시켰습니다. 아이는 시키는 대로 하였습니다. 아이와 선교사는 나무 위엔 길이가 5m나 되는 무서운 독사가 매달려 있는 것을 봅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새로 태어났고 선교사도 은총과 진리를 받아 변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여 얻는 은총과 진리로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일, 이것만이 우리 부활을 약속합니다.
야곱은 야뽁 강에서 하느님과 씨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엉덩이뼈가 다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창세 32,23-33 참조) 덕분에 자신과 가족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비록 나의 죽음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진리와 은총으로 내 가족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부활을 약속하는 삶입니다. 광야에서 뱀을 장대에 다는 법을 배우는 사순은 곧 기도를 배우는 시간이고 이것을 배워야 나도 살고 내 가족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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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교포사목으로 오시는 신부님들은 한국어는 물론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좋습니다. 언어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는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교포사목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언어의 문제가 본질은 아닙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사제를 모시기 위해서 한국까지 갔었던 신부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몇 개 교구를 다니면서 사제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능력은 있지만 겸손한 사제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결국 한국에서 사제를 모시는 것은 포기하였고, 미국에서 사제를 양성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합니다. 잠시 머물다 왔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섬기는 사제, 겸손한 사제를 못 만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자신을 돌아보면 저 역시도 섬김을 받는 삶에 더욱 익숙했습니다. 복음적인 삶, 겸손한 삶 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소금처럼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녹이면서 맛을 내는 사제들이 많았다면 사제를 모시러 갔던 신부님은 기뻐하며 돌아왔을 것 같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교구장님의 본당 사목방문을 보았습니다. 본당에는 영어미사, 스페인어 미사, 한국어 미사가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3개 공동체의 미사를 모두 집전하였습니다. 미사는 오전 9시, 10시 30분, 12시에 있었습니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주교님께서 잘 하시기 때문에 주례를 하였지만 한국어 미사는 제가 주례를 하였습니다. 사목방문 하시는 주교님의 열정에 놀랐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교중미사만 주례를 하시는데 주교님은 모든 주일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주교님의 소탈함과 겸손함에 놀랐습니다. 미사가방도 직접 들고 왔습니다. 제의도 본인이 직접 입었습니다. 한국어는 못 하시니 제게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영어로 미사경본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한국 공동체의 미사니 한국어로 하라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셨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주교님은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면서 소통하려고 하였습니다. 미사 후에 교우들과 사진도 같이 찍고, 몸이 아픈 사람에게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격식과 절차를 넘어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사제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은 주로 ‘본당’입니다. 봉사자들이 있고, 사제관도 있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큰 어려움 없이 사제로 지낼 수 있습니다. 둥지를 벗어나야 새는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목의 현장으로 떠나는 신부님들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마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이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음식과 문화와 풍토가 다른 곳입니다. 열병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 납치의 위험을 겪기도 하고, 외로움에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비록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하지는 않지만 신부님들은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아픈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일지라도 섬기는 삶을 산다면, 겸손한 삶을 산다면 그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평과 불만의 삶을 산다면 그 어떤 곳도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섬김과 겸손의 문제입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늘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천막을 3개 만들어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이 있어야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강을 버리는 물만이 바다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꽃을 버리는 나무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산다면 지금 이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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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났다.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주일이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그의 옷이 빛과 같이 눈부시다든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 두려워서 땅에 엎드린다든가, 예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두려워 말고 일어나라고 하시는 장면이다. 이 영광스러운 모습은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기서 모세와 엘리야까지도 그 나라의 구성원이 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포용하시며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하늘로부터 나오는 음성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영광을 보여주시고도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함구하기를 명하신다.(9절 참조)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부활의 신비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으로서, 부활체험을 통해서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수난을 통해, 고통받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한 다음에 얻게 되는 영광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은 오직 파스카의 체험을 통해서만이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마 당시에는 제자들도 알아듣기 어려웠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사 42,1 참조)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하신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신앙의 빛으로 그리스도를 겸손과 영광 그리고 죽기까지 당한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함께 지니고 계시는 분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분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듣는다는 말은 다시 체험하다, 다시 산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으로 사순절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의 소명을 통해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늘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줄 알았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신앙만이 미래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에서 찬란히 빛났던 그 빛이 이제는 모든 이에게 불멸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그분의 복음을 통하여 빛나고 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신비가,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의 빛으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가 변화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가야 한다. 나 자신이 변화하려고 하는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다. 우리 모두 그분의 말씀을 잘 들으며, 살아가며 주님의 부활 영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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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1-2)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마태 16,21)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이고, 사실상 하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알아듣고서 기가 꺾여 있었던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힘을 주시려고 당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 뒤에 누리시게 될 영광을 미리 목격했고, 나중에 자신들이 누리게 될 하늘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했습니다. 그 일은, 십자가는 영광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며, 목적지가 아니라 중간 경유지라는 것, 진짜 목적지는 승리, 부활, 영광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시청각 교육입니다.
‘모습’이 변하셨다는 말 때문에 ‘겉모습’이 바뀐 것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겉모습’을 바꾸신 일이 아니라, 당신의 본성, 또는 본질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예수님의 옷이 빛처럼 하얘졌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인데,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의 영광’을 묘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우리 인생은 지나가는 경유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집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입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제자들이 체험한 그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3-4)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구약시대의 대표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겼다는 뜻입니다. <대화의 내용보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상황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또는 이대로 영원히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행복하고 황홀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마태 17,5-6)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중간에 끊으셨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하늘나라의 행복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의 외아드님이시고,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하느님의 공식 선언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의 ‘그의 말’은, 앞의 16장 24절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십자가를 건너뛰고 영광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하느님의 나타나심 자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마태 17,7-9)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는 “그들을 어루만지시며”입니다.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사랑의 손길’입니다.)
“일어나라.”는 “이제 산에서 내려가자.”이고, “두려워하지 마라”는 “놀라지 마라.”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헛것을 보았다가 정신을 차렸다는 뜻이 아니라, 황홀경에서 벗어나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지금 본 것을 당신의 부활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온전히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은 부활 신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런 체험을 했으면서도 예수님 수난 때에 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는가?” 제자들은 특별한 체험을 했지만, 그 체험이 아직 ‘온 삶으로’ 믿는 믿음으로 발전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수난 때에는 그랬지만, 예수님 부활 후에는 온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과 힘과 용기를 주신 것은 당신의 수난 때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제자들 자신들이 박해와 순교를 받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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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거룩한 변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미리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때 목격한 제자들은 그 영광을 “해처럼” “빛처럼” 찬란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영광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마태오 복음 안에서 이미 예수님의 탄생은 빛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동방 박사들은 별을 보고 그 빛에 이끌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습니다. 빛은 동방 박사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제자들이 길을 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복음은 그 이유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하지만, 이 또한 예수님의 영광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마르 16,12-13 참조)
예수님의 영광은 모습이 변하셨다는 것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에서도 잘 표현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같은 하느님의 음성은 예수님의 세례 때에도 예수님의 신원과 영광을 드러냅니다.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분의 영광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입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인 십자가 죽음을 향하여 가십니다. 사실 십자가와 영광은 서로 어울리지 않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영광은 더욱 크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분의 영광과 빛이 드러나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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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김태정 베드로 신부님]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여기저기 유채꽃이 피기 시작하는 요즘입니다. 제주의 자랑인 오름에 오르다 보면 야생화가 꽃망울을 틔우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방목하고 있는 소나 말과 마주 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름 의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면서 바라보는 자연 풍경 을 통해 제주의 아름다움을 더욱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복음에서 산을 오른다는 의미는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 기도의 시간을 보내고 예 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지시며 거룩하게 변하셨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미지를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장면이고,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황홀함에 빠져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서 함께 지내려고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하려면 그에 따른 의무가 주어집니다.9오늘 복음 직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고, 누구든지 당신을 따르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우리 역시 지고 가야만, 미리 보았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즉 영광스러운 부활을 실제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늘 편하기만 바라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삶만 살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나 거룩하게 보이기만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영광스럽고 거룩한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전에 반드시 자신의 십 자가를 지고, 희생을 살아가는 사순을 살아야만 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 등산을 하듯 말입니다. 산에 오르기 위해 집을 나서고, 마음을 준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르는 노력과 고통을 끌어안고 희생을 하면 세상과는 떨어진 높은 곳으로 이끄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 어떤 힘겨운 등산 중이라도 우리는 그 길만을 올곧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길 끝에 펼쳐지는 광경은 우리를 놀랍게 하며 황홀함으로 보답해 줍니다.
등산의 과정은 분명히 힘들고 우리를 포기시킬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영광스러운 사건은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이 함께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거기에 머무르기 만 해서는 안 됩니다. 초막을 짓고 산 위에서만 살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산 위에서 산 아래 평지로 내려가 야 합니다.
산 위에서 우리가 체험한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우리가 받은 주님의 은총을 많은 이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복된 사순시기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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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지용식 마태오 신부님]
<거룩한 변모는 바로 우리의 모습>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로 우리는 사순 2주간을 맞이합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세우신 작은 다짐과 결심들, 아직 흐트러지지 않으셨습니까?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결심하신 작은 다짐, 작은 희생들, 끝까지 꼭 지켜나가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접하게 된 영광스러웠던 순간들로 인해 때때로 감동을 받습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얼마 전 월드컵 축구 때에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보며 온 국민은 열광하였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장한 우리 선수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슴에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는 지난여름 약 8백 킬로미터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29일 동안 걸어서 완주하고 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의 그 감동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 감동 뒤에 보이지 않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영광이 더욱 빛나고 값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높은 산에 오르시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여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눈부셨다고 전합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장차 있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표지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사순 제1주일에 우리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마태 4,1-11)을 보고 우리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시련과 악마의 유혹을 겪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면, 오늘 우리는 높은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고단한 매일매일의 삶과 유혹이 우리 운명의 끝이 아니라 그 뒤에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네 세상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련과 고통이 없는 기쁨과 영광을 생각할 수 없고, 또 희생과 죽음이 없는 부활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걸어가신 길, 그 길이 바로 우리의 길입니다. 다소 힘들고 어려워 보이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직접 보여주셨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걷습니다. 나아가 그분의 부활은 우리 부활에 대한 희망입니다. 곧 유혹과 고난을 이기시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여주신 예수님은 누가 뭐래도 우리의 희망입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들려오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이 내어주신 양식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도 그분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 우리는 성체를 통해서 그분의 모습을 닮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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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배재승 바오로 신부님]
<담대하게 걸어가는 믿음의 길>
성당 근처에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방죽을 따라 조성된 산책길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둑길 너머로 계절마다 빛깔을 달리하면서 바람에 춤을 추듯 흔들리는 갈대와 물때에 따라 거뭇한 속살을 드러내는 갯벌 그리고 거기서 노니는 짱뚱어와 농게, 바닷새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거기서 맨발로 걷거나 심지어 뛰는 이들을 만납니다. 흙길이어서 부드럽기는 하지만 곳곳에 자잘한 돌들이 깔려 있다 보니 심한 자극이 발에 그대로 올라오고 자칫 다칠 수도 있을 텐데, 어지간한 통증쯤은 대수롭지 않은 듯 거침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는 신앙인의 담대함을 떠올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십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웠던지 베드로가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려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고난의 길을 가야 할 때이니 영광스러운 변모에 대한 흥분은 가슴에 묻어두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씀입니다.
산 위에 오르시어 당신의 영광스럽게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장차 산 아래에서 겪게 될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잘 이겨 낼 수 있기를 바라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힘겨운 세상살이 한가운데에서도 장차 누리게 될 부활의 영광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힘차게 걸어가도록 격려해 주십니다. 그러니 지금 내 앞에 놓인 시련과 고통 앞에서 절망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담대하게 걸어감으로써 마침내 향기 가득한 신앙의 꽃을 피워 부활의 기쁨을 얻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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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빛의 길>
마태오 17,1-9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빛의 길>
온 누리
새하얗게
빛나는 날을
이루기 위하여
여기
빛 한줌
가슴 깊이
아로새기고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한걸음 내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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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초막의 재료는 말씀입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신앙의 삶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손을 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하고 죄를 짓더라도 “인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토마스 아퀴나스)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삶의 쇄신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간은 베드로가 짓고자 하였던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그분과의 일치를 나누는 곳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 내려오셔서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산에 머물러 모세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습니다.(출애 24,15-18.) 그리고 십계판을 받은 곳(신명 5,22)도 산입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12제자를 부르신 장소도 산입니다.(루카6,12)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에 올라야 합니다. 등산하라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곳, 고독한 장소를 찾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때때로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를 한다든지, 성지순례를 한다든지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니까? 끝맺음에 기도하십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 하지 말고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투리 시간에 기도하려 하지 말고 온전히 바치는 시간을 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로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데 모세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예언자입니다.
두 예언자의 공통점은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은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도 바로 그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결국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줍니다.
다시 말해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준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모습,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모습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당당하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고 합니다. 사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의 얼굴은 독살스런 모습으로 변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은 살기가 도는 얼굴로, 절망감이 가득 찬 사람은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슬픔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만큼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한 것처럼 나의 얼굴도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좀 더 거룩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명함은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하안주 신부님께서는 시를 쓰셨는데 ‘임쓰신 가시관’ 이라고 있습니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고 하셨습니다(노래 한번 할까요?) 우리도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서 베드로는 놀라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초막을 지어서라도 함께 머물고 싶어 하였는데 초막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초막을 짓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바로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마태 17,8)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초막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사는 곳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초막의 재료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발, 말 좀 들어라!”했을 때 말 듣는 것이 귀로 듣는 것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부모의 뜻대로 하였을 때 비로소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말씀 익히기 자료를 나눠 드렸는데 풀어보신 분도 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아침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록 성경 한 줄도 안 읽고 기도를 소홀히 하신 분도 계십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평일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시고, 성경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싶었던 곳, 그곳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 39,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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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매주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매합니다. 주로 신간을 먼저 보면서 관심 많은 분야의 책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런데 ‘치매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볼 수 있습니다. 휘프 바이선이라는 네덜란드 최고의 임상 심리학자가 자그마치 30년 동안 연구한 끝에 내놓은 치매 안내서와 같은 책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2021년에 주님 곁으로 가신 제 아버지가 말년에 치매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평생 공부하셨던 아버지였지만 몇 차례의 큰 수술로 처음에는 섬망 증세가 오더니 결국 저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알던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당시 저의 말과 행동이 오히려 아버지에게 큰 혼란을 주었겠구나 싶었습니다.
치매 환자를 대할 때 중요한 소통 규칙, 치매 환자에게 편안한 환경 만들어 주기, 치매 환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할 수 있는 말 등등…. 저 자신이 얼마나 이 부분에 무지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와 다름에 원망했고, 치매가 정말로 못된 병이라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치매 걸린 아버지가 저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어보니 저의 모름이 아버지를 더 힘들게 했었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하는 우리이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입니다. 상대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도 자기 기준에 맞춰서만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판단이 또 다른 아픔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또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이 제일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모습이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정말로 하느님이셨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고,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체험이 있었습니다. 피정하면서 계속 이 피정의 집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고, 그 행복 속에 계속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들은 생각은 주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한곳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마지막 말씀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을 볼 때, 머무는 삶이 아닌 계속 움직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 말이 틀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지요.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머무는 삶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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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딴판이신 주님을 보며>
사순 제2주일의 주님은 타볼산의 영광스러운 주님이십니다. 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과 시련을 받으신 주님과는 딴판입니다. 유혹을 이겨내고 시련을 통과한 다음의 빛나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전례는 사순 시기가 아직 한참 남은 이때 어찌하여 영광스러운 주님 모습을 벌써 소개합니까? 아직 엄동설한인데 너무 성급히 싹을 내민 꽃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시다시피 타볼산의 변모 사건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주님의 1차 예고와 2차 예고 사이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수난을 앞둔 제자들에게 예고편 중의 하나이고, 우리에게도 같은 예고편을 보여 주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예고편은 한편으로 각오하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수난을 각오하고 부활을 희망하라는 예고편입니다.
부활을 맞이하려면 그 전에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라는 것이요. 죽음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까이 봄과 멀리 봄의 대비이자 직시와 내다봄의 조화로서 우리는 반드시 가까이도 보고 멀리도 봐야 인생을 실패치 않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마지막 승리입니다. 아무리 시작을 잘하고 중간에 화려해도 마지막이 실패이면 그 인생은 축구에서 정말로 멋지게 공을 몰고 갔어도 골을 넣지 못한 것과 같고, 전후반 90분 중 85분간 경기를 지배했어도 마지막에 골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의 인생에서 이 세상 삶은 미래 삶의 아주 짧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축구로 치면 전반 5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 삶이 그의 인생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신앙인은 이 세상 삶이 영원한 삶의 서막에 불과하다고 믿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믿는 사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삶은 영원한 삶을 여는 것에 불과하다고 믿고 이 세상을 살면서 멀리 영원까지 그리고 하느님 나라까지 내다봅니다.
그래서 영원과 영광을 내다보며 지금 엄혹한 고통을 직면하고 직시하고, 각오하고, 감수하고, 감당하고, 이겨냅니다. 찬란한 봄을 내다보고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세 제자와 같은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수난 너머 보여 주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사람으로서 고통 한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을 보고 절망 한가운데서 희망을 내다보며 그러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희망을 증거 하는 사람이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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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거룩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꿈, 미사전례>
-꿈과 현실, 그리고 변모의 삶-
오늘 복음의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모습 장면이 흡사 꿈처럼 생각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꿈처럼 생각됩니다. 그대로 미사 전례를 상징한다 싶습니다. 거룩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꿈이 바로 우리 가톨릭 교회의 미사전례입니다. 매일 미사전례를 통해 꿈의 일상화가 이루어 집니다.
꿈과 현실입니다. 꿈의 현실화입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꿈꿉니다. 요즘은 꿈도 사라져가는 삭막한 현실입니다. 사람은 꿈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참으로 꿈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기 위해 수도원 피정 오는 많은 분들입니다.
그대로 오늘 예수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애제자들은 그대로 산상 공동피정중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꿈을 일상화해주는 매일 미사전례입니다. 저도 밤새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꿈꾸다가 일어나 오늘 강론을 씁니다.
새벽에 잠깨니 옛 교대 동창들 홈페이지에 남도 여행중인 동창이 올린 남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대로 꿈꾸듯 아름다웠습니다. 스테파노 동창인데 교대 2학년때인 1970년에 보고 한번도 못봤으니 무려 53년전입니다. 당시는 20대 초반이었는데 지금은 초등학교 교장 은퇴후 국내외 여행을 즐기는 70대 중반의 동창입니다.
한달에 한 번은 동기 모임으로 계획에 따라 여행하는 모습이 흡사 월피정 꿈꾸는 하루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남도 여행도 8명이 동료들이 함께 꿈꾸는듯한 단체피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참 아름답고 신비로운 많은 남도 사진들을 보며 저도 잠시 꿈꾸는 기분이었고 꿈을 주제로 오늘 강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올린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3월1일-3월4일이니 3박4일의 꿈의 단체피정여행처럼 보였습니다.
-“봄내음 찾아서 남도로 오늘은 보길도 가는 길에 달마산 미황사에서 매화를 만나고...”
“물 맑은 봄바다에 배를 타고 청산도로 갑니다. 봄길에는 유쾌한 웃음이 있고 정다운 이야기가 걸음마다 넘쳐납니다.”
“장보고 대사의 청해진 그리고 완도 수목원의 여러 가지 동백꽃을 보면서 봄맞이 남도 여행을 끝냅니다.”-
봄맞이 남도 공동 순례 피정 여행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대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을 상징하는 순례 여행 피정처럼 생각됩니다. 참으로 꿈꾸는 꿈의 사람들은 일상에서의 거룩한 탈출과도 같은 여행을 좋아합니다. 이런 꿈같은 여행이 활력넘치는 참삶을 살게 합니다. 정주의 삶에 평생 내적여정의 삶을 사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매일의 공동전례미사를 통한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의 체험이 이를 대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의 길 여정에서 지친 제자들에게 산상피정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꿈을 체험토록 하십니다. 공동으로 꿈꾸는 중에 변모하신 주님이시고, 모세, 엘리야를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한 베드로는 엉겁결에 집착을 드러냅니다. 순간 현실감각을 잃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느님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수도원 피정이 좋아도 내내 수도원 피정집에 살 수는 없듯이 산상신비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비로운 피정은 다음 일상에서의 광야여정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공동피정의 꿈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시킴으로 힘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 하느님께서도 즉시 개입하시면서 적절한 충고를 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당신 아드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의 길, 광야여정에 오르라는 것이며 이제 꿈이 현실화된 일상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파스카 주님과 함께 일어나 일체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내적 여정에 오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합니다. 아, 이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여정에 오르게 된 세 제자들이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변모를, 앞당겨 주님의 부활 영광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전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주님의 축복 말씀을 듣고 힘차게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과 흡사합니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바로 파스카의 여정중에 있는 세제자들은 물론 우리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복된 존재 아브라함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제자들보다 우리는 얼마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요! 이미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꿈꾸며 앞당겨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성령의 기쁨으로 부활축제를 기다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바오로가 고백하는 이처럼 죽으시고 부활하신 참 좋으신 파스카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이미 매일이 부활축일입니다. 참으로 광야인생 여정 중에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이 미사전례입니다. 꿈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미사전례의 꿈입니다. 이보다 도 좋은 꿈은 없습니다.
그러니 미사전례는 거룩해야 하고 신비로워야 하고 아름다워야 합나다. 우리가 굳이 밖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매일 거룩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사전례의 꿈은 현실화되어 내적 광야 여정중인 우리를 당신을 닮은 생명과 빛이 넘치는 기쁨의 삶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또 거룩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사전례 은총의 꿈은 현실화되어 삭막한 광야 여정중에도 우리 모두 날마다 아름답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상을 살게 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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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변모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변모 사건은 우리 또한 변모의 삶을 살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변모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많지만 그 중에 으뜸은 침묵과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외딴 곳이나 산을 자주 찾은 이유는 침묵과 기도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침묵과 기도의 결실이 변모를 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깨로 향하는 길에 있어서 변화되어야 할 것은 침묵하는 마음자세입니다. 즉 인간은 침묵 안에서 지금까지 잘못 끌어 모은 모든 지식을 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침묵은 인간을 변모하는 데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입니다. 침묵의 두 가지 전제조건은 오직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는 마음과 사랑으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은 정의의 마음을 키우며 거기서부터 평화의 결실을 얻습니다. 침묵은 마음과 육신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대인관계가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는 신앙인일수록 더욱 침묵의 순간들을 가져야 합니다. 침묵을 지키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고 자신의 결점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자신의 진보는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침묵을 통한 내적 생활은 양심, 마음, 정신 등을 신앙 안에서 올바르게 키워가는 삶입니다. 이런 내적인 침묵의 생활은 회개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내적인 침묵은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기도는 곧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또한 모든 행동과 덕행의 원천이 되고 영원한 즐거움과 평화의 원천이 됩니다. 모든 덕을 닦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하는 법부터 먼저 익혀야 합니다. 가령 단순히 ‘주님의 기도’의 말마디를 암송할 때에도 이 단어들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 듭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갑니다. 단순히 주님의 이름만 반복해서 불러도 힘을 얻게 됩니다. 겉보기에는 단지 기계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기도를 통해서 그분의 이름이 우리의 혈관 속에 무의식 속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킵니다.
기도의 결실은 단순한 감정상태가 아니고 우리 인간성의 전체적인 깊은 변화입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자신의 뜻에서 당신의 뜻으로 변모되기를 바라는 바로 그것이 기도의 유일한 목표이며 또 올바른 기도의 기준입니다. 훌륭한 기도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비로운 느낌이 아니라 변모되는 삶입니다.
이러한 침묵과 기도로 이루어진 가장 두드러진 변모는 온유와 자비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금욕을 잘하고 금식을 잘 지키는 외적인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스스로 온유하고 자비로우셨기에 그분의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닮아 영적으로 변모된 삶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온유와 자비로운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게 하는 길입니다. 온유와 자비는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원천입니다. 성서를 많이 읽고 여러가지 신심행사를 열심히 잘 할지라도 온유와 자비가 없다면 결코 그리스도를 닮은 변모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은 많은 사람을 끌어 당깁니다. 구태여 달리 믿는 사람들을 자기의 올바른 믿음으로 설득하거나 선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온유함과 자비로움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충분합니다. 이런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그 분을 알아 뵙게 됩니다. 그래서 온유와 자비는 참 신앙을 알아보게 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에게 온유하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드러날 때 주님처럼 참된 변모의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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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17,2)
<순종은 곧 믿음!>
오늘 복음(마태17,1-9)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적은 '부활'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부활과 죽음 저 너머에서의 영원한 부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부활신앙', '끊임없이 부활에로 나아가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가 믿음으로 얻게 되는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 너머에 있는 부활과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 그 너머에 있는 부활에 대한 희망의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창세12,1-4)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미지(未知)의 세계로 떠나라.'는 주님 말씀에 아브람이 그대로 순종합니다. 우리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브람과 같은 믿음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지만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말씀대로 길을 떠납니다.
대단한 순종이요, 엄청난 믿음입니다. 조그만 해도 입고 싶지 않고, 무엇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우리들인데...
'순종은 구원의 언어이고,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지만 순종 그 자체는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내 것을 포기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순종도 고통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
'순종은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큰 사람들이 순종도 잘합니다. 장한 순교자들, 수많은 한국교회 순교자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순종하셨습니다. 믿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믿음, 우리의 순종은 어떻습니까? '자존심' 때문에 무너지는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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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ntdmrhkSF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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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마태 17, 2)
더 높은 곳에서
우리의 삶을
예수님과 함께
바라봅니다.
삶도 사랑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함께 나눌
변모의 방식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의 방식입니다.
사랑을 몰랐기에
변모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은
변모해야 할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고통 뒤에
부활을
얻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빛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희망하는 법을
잊은
우리 삶입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고통과 부활의
거리는
사랑하는 마음의
거리입니다.
사랑으로
변모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없이는
그 누구도
빛날 수 없습니다.
환히 열리는 것이
신앙이며
신앙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의
변모입니다.
부활을 믿고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하면 바뀌고
사랑하면 빛납니다.
사랑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회개하는
새로운
만남의 기쁜
주일입니다.
사순은 부활을
믿고 준비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변모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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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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