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39]예초기가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유월초만 돼도 새벽 4시면 여명黎明이다. 5시면 세상만물이 다 보이므로, 농사꾼이라면 몸을 일으켜야 한다. 논에 물꼬를 보러 갈까? 그보다, 감나무밭에 무성하게 자란 온갖 풀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기름을 가득 붓고 예초기를 메고 나선 게 5시 10분. 며칠 전부터 별렀다. 오늘은 해치우리라. 온갖 풀들이 무릎까지 와닿는데, 잡초들의 천국이다. 100평이 채 못될까? 늙은 감나무가 20여그루 있다. 겨울 초입에 한 그루에 퇴비 한 푸대씩을 나무 주위에 빙 둘러뿌렸다. 이대로 더 이상 방치하면, 나는 시골에 살 자격이 없다. 시동을 걸자마자 예초날이 맹렬히 회전한다.
예초기는 무섭다. 자칫하면 사고로 이어진다. 잔돌이라도 튀어 얼굴을 때리거나 장딴지에 상처를 낼 수도 있고, 혹시 안경에라도 맞으면 실명失明하지 않는다 누가 장담할까? 보안경을 쓴다해도 하다보면 땀 때문에라도 벗어던지기 일쑤다. 아무튼, 1시간 20여분만인 6시50분에 기름이 떨어진 바람에 작업은 중단됐다. 다시 휘발유와 오일을 혼합하여 예초기 기름을 만들어야 하니, 집에를 다녀와야 한다. 그 무성한 풀들이 차곡차곡 몸을 눕히니 본연의 감나무밭 모습을 회복했다. 나무들은 얼마나 개운할까? 코끼리나 소처럼 꼬리로 쉬파리나 모기들을 쫓을 수도 없고, 그저 묵묵하게 견뎌내는 나무들이 안쓰럽다.
‘예초질’은 조금 긴장돼도 작업 자체는 몹시 재밌다. before & after(예초 전과 예초 후), 두 사진을 놓고 비교해 보시라. 오늘 새벽 나는 감나무에게 아주아주‘착한 일’을 했다. 1년에 두 번쯤 하는 벌초伐草 작업은 더 보람지다. 다 하고 나면(갈퀴로 잘린 풀들을 다 긁어내야 한다), 조상님들이 “아이고, 착한 놈아”하며 내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듯하다. 언젠가 졸문에도 썼지만, 예초기 앞에는 걸림돌이 없어 좋다. 닥치는 대로,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나무 등걸도 여지없이 잘려나간다. 거칠 게 없다. 자갈이나 잔돌이 튀어오르는 것만 극도로 조심하면 된다.
한번은 남원 친구의 아로니아밭 주위의 풀을 깎아준 적이 있다. 친구가 해보겠다며 예초기를 메더니 5분도 안돼 도저히 못하겠다고 스위치를 껐다. 손이 후덜덜덜 떨리는데 너무놀랐다는 것. 이러다 자칫 평생 취미이자 특기인 붓글씨 쓰기와 국궁도 못쏠 것같은 위기감이 들었다고 한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다시는 예초질을 하지 않겠다해 그의 부인과 함께 웃었다. 인터넷에서 잔디밭용 전기충전 예초기를 10여만원 주고 샀는데, 완전 실패였다. 성질이 나 장만한 게 일제日製 제노아 예초기, 물경 48만원이다. 벌초하느라 수고했다면 형님과 사촌동생들이 2년째 보내주는 바람에 본전은 이미 회수한 셈이니, 일석일조一石二鳥가 아닌가.
예초질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일상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같아서 좋고 좋아한다. 고향 선배는 이런 말을 했더니 ‘이 힘든 작업을 좋다고 하니 별 희한한 친구도 다 봤다. 아예 예초대행을 나서라“며 웃는다. 진짜로 벌초대행을 친구와 하자고 벼뤘는데, 졸지에 세상을 떠나 1년이 넘었는데도 나를 여전히 우울하게 만든다. 봉분 하나에 5만원이었는데, 지금은 10만원이다. 봉분만 깎겠는가. 산소 주변도 정리해야 하니 잘 하면 한 건당 50만-60만원은 벌 수 있었는데. 한 여흘 몇 건 해서 200만원쯤 벌면 그게 어디인가. 혼자 하면 노동이지만, 둘이나 셋이 하면 오락도, 게임도 될 수 있다. 한번은 오전내내 4시간 동안 했더니, 다음날 팔뚝이 올라가지 않은 적도 있지만, 나는 예초질을 좋아한다. 하여, 친구의 논두럭도 깎아주는 자원봉사를 한 적도 있다. 한번 해본 것하고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것은 ‘천지차이’다. 예초기는 농촌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생필품(생활필수품) 중의 하나이다. 생필품은 예초기 말고도 낫, 호미, 실장갑, 장화, 삽, 비닐뭉치, 농약통 등 수십 개도 넘는다. 누가 예초기를, 모 심는 이앙기를, 나락 베는 콤바인을 발명했을까?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지만, 이런 발명가에겐 나라에서 마땅히 큰 상을 줘야 할 것이다.
누구라도 성인成人이라면 예초기를 한번쯤 경험삼아 메고 예초질을 해봤으면 좋겠다. 추석 전, 일가친척이 산에서 모여 벌초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동네 가까운 뒷산에 온종일 욍욍욍 예초질 소리는 벌떼들이 온산을 포위한 것같다. 이런 미풍양속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게 나는 어쩐지 우리만의 전통을 잃은 것같아 아쉽고, 인정人情이 사라지는 것같아 안타깝다. 이웃들의 논이나 밭두럭이 잡초로 무성한 것을 보면, 손이 근질근질, 나의 예초기를 들이대고 싶어진다. 바둑이나 장기 둘 때 훈수訓手하는 것처럼, 취미도 이 정도이면 별나다고 할 수 있을까. 내 스트레스 풀리고 좋은 일 했다고 칭찬받고, 괜찮은 것같은데.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