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계림시 요산경구 백가성기념장랑, 전씨 관련 인물
(中國 桂林市 堯山景區 百家姓紀念長廊, 全氏 關聯 人物)
屬地令陝西省長安 起源西周時期曾經設立黨管錢財機構
名泉府 因古代 “泉” “全” 泉姓演變成全姓 名人 全琮 全元起
섬서성 장안에 속해 있었으며, 기원은 서주(西周) 시대에 금전(財政)을 관장하는 관청이 이미 설립되었으며 그 명칭은 “천부(泉府)”라고 칭하였다. 재정업무에 종사하였기에 이로 인하여 천(泉)씨를 성으로 하였다.
천(泉)과 전(全)의 독음이 같아 일부 천씨는 전씨로 바뀌어 전씨로 불렸다.
유명인사로는 전종將軍과 名醫 전원기가 있다.
◎ 전종(全琮)
요약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이자 정치가로 산월족을 평정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출생-사망/198 ~ 249
국적/중국
활동분야/정치, 군사
시대/삼국시대
자(字)는 자황(子璜)이며 오군(吳郡) 전당(錢塘, 지금의 浙江省 杭州) 출신이다. 손권(孫權)의 맏딸인 손로반(孫魯班)과 결혼했으며, 대사마(大司馬)를 역임하고 전당후(錢唐侯)로 봉해졌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전종전(全琮傳)’에 따르면, 전종(全琮)은 계양태수(桂陽太守)를 지낸 전유(全柔)의 아들이다. 전유는 후한 영제(靈帝) 때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상서랑우승(尚書郎右丞)을 지냈으나, 동탁(董卓)이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전유는 다시 회계동부도위(會稽東部都尉)로 임명되었으며, 손책(孫策)이 거병한 뒤에는 그에 투항하여 단양도위(丹陽都尉)를 지내다가 손책이 죽은 뒤에는 그의 동생인 손권을 섬겨 장사(長史)와 계양태수 등을 지냈다고 한다.
전종은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힘써 젊어서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삼국지≫에는 피난을 내려온 수백 명의 사람이 그의 집에 머물렀으며, 전종은 그들을 구제하는 데 집안의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인 전유가 쌀 수천 곡을 싣고 오군(吳郡)에 가서 물건과 바꿔오라고 시켰더니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을 모두 나눠주고 빈 배로 돌아와 아버지가 범상치 않게 여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전종은 손권에게 분위교위(奮威校尉)로 임명되어 산월(山越) 토벌에 나서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아 우저(牛渚)에 주둔했다. 그 뒤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으며, 219년에는 양화정후(陽華亭侯)로 봉해졌다. 222년에는 동구(洞口)를 공격해온 위(魏)나라의 수군을 물리쳐 수남장군(綏南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전당후(錢唐侯)로 봉해졌다. 225년에는 구강태수(九江太守)가 되었고, 228년에는 육손(陸遜)과 함께 석정(石亭)에서 조휴(曹休)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또한 그 해에 단양(丹楊)·오(吳)·회계(會稽) 3개 군(郡)에서 산월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종은 그 3개 군의 험지(險地)를 통합하여 설치한 동안군(東安郡)의 태수로 파견되었다. 전종은 여러 해에 걸쳐 산월족의 반란을 평정한 뒤에 동안군을 폐지하고 다시 우저에 주둔하였다.
229년, 손권이 황제가 된 뒤에 전종은 위장군(衛將軍), 좌호군(左護軍), 서주목(徐州牧)으로 임명되었으며, 손권의 딸인 손로반과 결혼했다. 손로반은 원래 주유(周瑜)의 맏아들인 주순(周循)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죽은 뒤 다시 전종과 결혼했다. 전종은 왕의 사위가 되었음에도 전혀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선비들을 겸허하게 대했다고 한다.
233년에는 전종은 5만의 병사를 이끌고 육안(六安) 정벌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고, 246년에는 우대사마(右大司馬), 좌군사(左軍師)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249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지위는 아들인 전역(全懌)이 계승하였다. 하지만 전역은 뒷날 위나라에 투항하여 위나라에서 평동장군(平東將軍)의 직위를 받고 임상후(臨湘侯)로 봉해졌다. 그래서 진수는 ≪삼국지≫에서 전종에 대해 “내란을 평정하여 나라 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힘쓴 인재”라고 평하면서도 “자식의 간악한 행동을 살피지 못해 나무람을 받고 명예를 잃었다”고 했다.
전종은 사람됨이 겸손하여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았으며 간언(諫言)을 잘하여 손권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손권이 오늘날의 하이난 성[海南省] 인근의 해안과 도서 지역인 주애(珠崖)와 이주(夷州)를 공략하려 할 때 전종은 바다와 풍토병으로 병력을 손상시킬 수 있다며 병력 파견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손권은 전종의 말을 듣지 않고 군대를 보냈고, 결국 풍토병으로 수많은 군사를 잃었다. 손권이 뒷날 이 일을 말하자 전종은 그때 간언하지 않은 신하는 충성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삼국지≫에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종 [全琮] (두산백과)
◎ 전원기(全元起)
전원기(全元起)의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남조(南朝)의 제(齊 : 서기 479 년 – 서기 502년) 나라와 양(梁 : 서기 502 년 – 서기 557 년) 나라 때 사람이다.
남사(南史)-왕승유전(王僧儒傳)에 보면 전원기(全元起)는 태의시랑(太醫侍郞)이었으며 의술에 정통하여 그 당시 상류 사회에서 신격화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자들은 전원기(全元起)의 치료를 받기 위하여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당시 ”득기치자생(得其治者生), 사기치자사(舍其治者死)” 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전원기(全元起)의 의술은 고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전원기(全元起)의 치료를 받으면 살고 전원기(全元起)의 치료를 포기하면 죽는다.” 는 뜻이다.
전원기(全元起)는 주황제내경(注黃帝內經)-소문(素問) 8 권(卷)을 저술하고 내경훈해(內經訓解)라고 칭했다. 중국내에서 최초로 전원기(全元起)가 소문(素問)을 정리하고 주해하였다.
서기 1057 년(嘉祐 2 년)에 송정부(宋政府)에서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을 설치하여 의적(醫籍)을 수집하고 정리하며 고증(考證)하고 재편집하였다.
임억(林億)과 장우석(掌禹錫)과 고보형(高保衡)과 손조(孫兆)와 진종고(秦宗古)와 주유(朱有) 등으로 구성된 교정의서국은 서기 1068 년 과 서기 1077 년 사이(熙寧年間)에 소문, 상한론, 금궤요약, 금궤옥함경, 맥경, 난경, 침구갑을경, 천금요방, 천금익방, 외대비요 등을 간행했다.
임억 등이 황제내경을 교정할 때 전원기(全元起)의 내경훈해(內經訓解)의 편차(編次 : 배열순서)와 일부 주석(註釋)을 포함시켰다. 그러므로 전원기(全元起)의 내경훈해는 500여 년간 보존되어 오다가 유실된 것이 분명하다.
사진제공: 유교신문 전남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