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자의 종류
목차
1. 순백자(純白瓷)
2. 청화백자(靑花白瓷)
3. 철회백자(鐵繪白瓷)
4. 진사백자(辰砂白瓷)
백자는 문양이 없는 순백자를 비롯하여 음각백자(陰刻白瓷)·상감백자(象嵌白瓷)·청화백자(靑華白瓷)·철화백자(鐵畵白瓷)·진사백자(辰砂白瓷) 등이 제작되었다. 초기에는 소량의 최고품만이 생산되어 왕실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분청사기가 소멸되는 17세기경부터는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관요(官窯)인 경기도 광주의 분원(分院)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백자는 고려 초기부터 청자와 함께 일부가 만들어져 그 수법이 계속 이어지면서 조선시대 자기의 주류를 이루었다. 백자는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이나 물감(안료)의 종류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순백자(純白瓷)
그릇 표면을 싸고 있는 유약과 색조, 그릇을 형성하는 선이 순백자의 생명이다. 순백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백자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기형(器型)을 이루고 있다. 또 하나는 원나라 때부터 고려자기에 영향을 끼쳤던 유형으로 유약이 대체로 얇게 입혀져 백색으로 발색되며, 때로는 약간 청색을 띠고 있는 것이다.
1) 소문백자(素文白瓷)
그릇 표면에 장식 무늬가 전혀 없고 백색으로만 된 것이다.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만들어졌으며, 대체로 포용력이 있고 청초해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해강도자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자대합은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시신과 함께 묻는 묘지에 넣어두는 합이다. 이 합은 안에 넣었던 지석으로 그 제작 연대가 1710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편년 자료다. 유약과 태토 모두 양질의 고급품이며 유면은 광택이 은은하면서 회색빛이 감돈다. 동체의 아래쪽이 안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마무리되고, 곧게 선 굽이 단정하게 받치고 있다. 굽바닥에는 가는 모래를 받쳤던 흔적이 남아 있다.
2) 양각백자(陽刻白瓷)
순백자 위에 양각수법으로 무늬를 낸 것을 말한다. 무늬는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의 사군자(四君子)가 가장 많고, 그 밖에도 약간의 무늬를 첨가하거나 그림에 곁들여 문자를 양각하는 수도 있다. 개인 소장의 백자양각장생문병은 목이 길게 바로 섰으며, 몸통의 무게중심이 아래로 쏠려 안정감을 주는 병이다. 동체는 사슴, 소나무, 학 등이 어우러지게 양각되었는데,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담청색을 머금은 백자 유약이 전면에 깨끗하게 입혀졌는데 빙열이 없고 광택도 은은하다. 굽이 넓고 안 바닥을 깎았으며 접지 면에는 가는 모래를 받쳤다. 순백색의 유약 안에 도드라진 솔잎 문양이 함박눈에도 아랑곳 않고 절개를 지키는 소나무를 연상시키는 뛰어난 작품이다.
3) 음각백자(陰刻白瓷)
순백자 위에 음각으로 무늬를 장식한 그릇이다. 부분적으로 음각 수법을 한 것은 있으나, 음각 수법만으로 표면을 장식한 예는 매우 드물다.
4) 투각백자(透刻白瓷)
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투각백자연환문필통(透刻白瓷連環文筆筒)은 푸른색이 감도는 유약을 칠했으며, 밑으로 크게 처져서 가로대를 돌려 상하로 구분하고 위쪽에는 옆으로 고리 3개씩을 연결하면서 고리는 물론이고 고리와 고리를 연결한 십자형 줄기의 공간도 투각하였다. 아래쪽은 사십자형(斜十字形) 무늬를 새겼으며, 그 때문에 생기는 사각형 공간도 투각하였다.여러 무늬를 투각 수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무늬를 한결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부분적으로 청화(靑華)를 칠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18세기 백자투각초화당초문병은 구연부가 벌어졌고, 몸통의 하반부에 초화당초문이 투각으로 시문된 백자병이다. 투각이긴 하지만 안쪽으로 면이 있어 완전히 구멍이 뚫린 것은 아니다. 투각문 위쪽의 어깨부에도 음각의 당초문대가 돌려져 있다.
5) 상형백자(象形白瓷)
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떠한 형태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만큼 다양하지 못하며, 조선시대의 도자기에서는 순백자에서보다 청화백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청화를 이용하면 어떤 부분적인 형태를 더욱 효과 있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18세기 백자두꺼비형연적은 고개를 쳐들고 앉아 있는 모습의 두꺼비 형태를 한 백자연적이다. 목과 등 표면은 오톨도톨하게 처리되었다. 두 눈은 약간 튀어나왔고, 눈동자는 철화로 점을 찍었다. 평저로 바닥 면 전체를 시유하지 않았다.
2. 청화백자(靑花白瓷)
백토로 기형(器形)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해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花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라고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10년) 명나라에서 전해진 것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년) 중국에서 회청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따르면 1465년(세조 11년)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년)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 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 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 광주군을 중심으로 번조되었는데, 이 일대의 수많은 관요(官窯) 터가 그것을 말해준다. 광주 관요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거듭 발달하였다.
대체로 15, 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이 보이고 사용에도 서툰 점이 엿보이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球形)에 가까워져 양감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 무늬와 같은 15, 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 소상팔경(蕭湘八景), 십장생(十長生)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釉調)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 안료는 서양으로부터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 전체를 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항아리, 접시, 사발, 떡살 등의 생활용품과 병, 주전자, 잔 등의 주기(酒器), 필통, 연적, 필가(筆架) 등의 문방구, 묘지, 인형 등의 명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각색의 그림으로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 동물, 산수, 십장생, 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 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해 보인다.
한국·중국의 청화백자 특성 비교
코발트 안료는 기원전 20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쓰던 타일 안료가 그 기원이다. 중국은 14세기 아랍 상인들로부터 안료를 수입하여 청화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1428년(세종10년) 청화백자가 처음 수입되었다. 청화백자 큰 소반 5개와 작은 소반 5개를 명나라에서 들여왔으며 그 모양은 동ㆍ식물이 그려진 다양한 것이었다.
청화백자란 백자 초벌 기면 위에 코발트 안료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우리나라와 중국 청화백자의 특징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중국청화백자는 상대의 백도(저화도)에서 출발(기원전 2000년 이후)하였다. 중국 청료는 운남, 절강, 강서 지역의 청료가 우수하며 규석, 운모, 장석 기타 광물이 혼합되었다. 경덕진에서 서쪽으로 30km의 서항, 여간현 등지에 고령토의 산(고령촌)이 있다. 청화(안료)의 종류는 망간 함량이 많고 자광을 띤 중국산 중국 청료와 철의 함량이 많고 흑빛을 띠며 훈산(번짐)과 농중(짙고 강함)의 현상을 일으키고 수묵의 흥취를 느낄 수 있는 수입산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양의 특징은 치밀하며 때론 용맹스럽게 포효하는 동물의 그림이 많이 등장하며 공간 전체를 치밀하게 화면을 꽉 채우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정교한 세필로 조화롭게 표현하였다. 종류는 청화, 유리홍, 홍채, 투채, 오채, 분채, 범랑채, 소삼채 등이 있다.
청화백자의 채도는 14도로 깨끗한 백색과 대비현상을 일으킨다. 상쾌함, 풍부한 포용성, 청색 하늘의 대기, 유유자적하는 감각, 청백의 명려하고 수아한 조화를 느끼게 해준다.
명대의 요는 관요와 민요로 나뉘는데, 관요는 수입 청화를 사용하였고 민요는 국산 청화를 사용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는 어요창을 설치하였고 환관 감독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청화의 재료 성분에는 수입한 회청을 사용하였는데 망간 함량은 낮고 철 함량은 높다. 영락, 선덕 대의 청화백자는 유약이 윤택하고, 채색은 농염하였다. 민간 청화는 망간 함량이 높다. 청대에는 명대 청화를 모방하는 것이 유행하였고, 특히 강희시대에는 선명, 요염, 순수, 깨끗함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청화백자는 역사적 어기로서 금ㆍ은기를 대신해 사용한 데서 그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세종 연간에는 명나라로부터 들여온 명백자, 청화백자에서 자극을 받아 만들어졌다. 15세기 후반~16세기 후반에는 조선 도자 중심(본격적 제작)이었고, 16세기 전반에는 관어용인 명품을 제작하였으며 광주 분원이 그 중심 역할을 하였다.
16세기 후반에는 향약의 보급으로 서원이 설립되고 성리학의 발달을 촉진시켜 실생활에 백자가 활용되는 예가 많이 늘어났다. 드물게 17세기 전반의 철화편이 발견되고 있으며, 17세기 후반에는 청화 안료를 구하기 어려워 청화 제작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청화백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9세기 전반에는 18세기에 이어 분원리 요에서 제작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어 정취 깊은 한국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유교적, 서민적, 남성적,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자연미를 드러낸다. 문방용구가 많고 청화가 주류를 이루며 중후하고 안정감이 있다. 흰색 바탕에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유층이 엷고 투명하다. 백색은 더욱 선명하고 1300℃ 고온에서 환원염 번조를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조선시대 도자기 생산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와 있다. 분원은 사기 제조장으로서 사옹원에 속한 관요였다. 사옹원의 주된 임무는 임금의 식사와 대궐 연회 음식을 공급하고 어기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분원이 설치되자 궁중 어기의 제작은 물론 이의 유통과 공급이 활발해졌으며, 땔감 확보도 용이해졌다.
청화백자의 종류로는 소문, 음각, 양각, 투각, 상형, 상감, 청화, 철화, 진사백자가 있고, 기형에는 항아리, 병, 대접 등이 있다. 빛깔은 유백색이며 문양은 주로 식물, 동물, 산수문 등이 있다. 중국의 것과 비교하여 우리나라 청화백자의 문양 특징은 민화풍이라는 점과 해학적이고 정적인 이미지를 중시했으며, 여백의 미를 살렸다는 점이다.
세조 9년~11년(1463~1465년), 예종 1년(1469)에는 강진, 순천산(産)의 회회청 즉, 토청(土靑)을 캐내 국산 청화백자를 제작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1469년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옹원 소속 사기장 380명이 사기를 제작하였고 옹정시대의 명대 청화를 모방하였다 한다.
3. 철회백자(鐵繪白瓷)
백토로 그릇을 만들어 낮은 온도에서 초벌구이를 하고, 그릇 표면에 산화철 안료로 무늬를 그리고 그 위에 백색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백자에 다갈색, 흑갈색 계통의 무늬가 나타난 자기이다. 백자에 철분 안료로 무늬를 입힌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 전기에는 주로 묘지에 쓰였으나 17세기 이후 보다 일반화되고 세련미를 띠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철회백자는 대개 광주 관요와 지방 민요에서 생산된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주 관요의 것은 잘 수비된 백토와 양질의 백자유에 사실적인 무늬가 주로 시문(施文)되어 포도덩굴, 대나무, 운룡(雲龍), 매화 등이 세련된 필치로 나타나고, 지방 민요의 것은 바탕흙과 유약이 각기 특색을 지니고, 반추상화된 초(草), 죽(竹), 용(龍) 무늬 등이 자유분방하게 묘사되어 있다. ‘철’, ‘철화(鐵畵)’, ‘철사(鐵砂)’라는 명칭은 20세기 들어 붙여진 명칭이고, 원래 한국에서는 ‘석간주’라고 하였다. 가마터로는 경기 광주군 일대의 조선 중기 요지 및 북한산록, 용인, 천안, 괴산, 철원 등에 널리 퍼져 있다.
4. 진사백자(辰砂白瓷)
도자기 바탕에 산화동(酸化銅: 辰砂) 채료(彩料)로 그림을 그리거나 칠한 뒤 백자 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산화동 채료가 붉은색으로 발색되는 자기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사기그릇을 주점사기(朱點沙器), 진홍사기(眞紅沙器)라고도 불렀으며, 진사백자라는 명칭은 20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사백자는 고려시대 중엽(12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가장 흔하게 쓰인 것은 조선 후기인 18~19세기 무렵이다. 진사백자의 가마터로는 광주군 분원리 요와 함남의 영흥(永興) 일대가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