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함께 찾아온 단풍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손수 붓을 들어 노랗고 붉게 채색하신 듯한 걸작이었다. 단풍을 구경하는 동네 곳곳에서 사람들은 탄성이 들렸다. 너도나도 단풍나무를 벗 삼아 사진찍기 바쁜 모습도 보였다. 근처 벤치에 앉아 낭만에 빠지거나, 수다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단풍나무 아래에서 가을의 정취를 누렸다. 누가 뭐래도 단풍은 가을이라는 멋스러운 계절의 ‘주인공’이다.
며칠이 겨우 지났을까. 가을의 끝자락이 다가오자, 대롱대롱 달려있던 단풍이 하나둘씩 떨어지다, 이내 우수수 쏟아졌다. 그 탓에 단풍나무를 둘러쌓던 정겨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사람들은 추운 날씨 탓에 옷을 여미고, 집으로 향하기 바빴다. 다소 소란스럽던 수다는 사라지고, 적막함 속에 낙엽 쓰는 빗질만 크게 들릴 뿐이었다. 가열차게 쓸린 낙엽은 저항 한번 못하고 마대에 욱여넣어 졌고, 곳곳에 더미로 쌓여 흙으로 저며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뻐할 땐 언제고, 단풍이 낙엽이 되니 영 성가셨다. 발에 치이고, 자동차 틈새에 끼인 낙엽은 쓰레기로 보였다. 한편으론 짠했다. 짱짱하게 달려있다 힘아리 없이 구부러진 채 바닥을 구르고 있는, 쨍한 색깔을 뽐내다 볼품없는 잿빛이 되어버린 단풍은, 우리 인생처럼 보였다. 주인공처럼 주목받다가 단역처럼 외면받는, 감탄을 자아내다 탄식을 듣는 것이 우리 인생이지 않던가. 이런 쌉쌀한 상념에 빠진 나를, 옆에 있던 딸 아이가 툭툭 건드리며 주운 낙엽 하나를 보여준다.
“아빠, 나 이 낙엽 하나 주워가면 안 돼?”
“안돼. 절대. 흙도 묻었고 너무 지저분해.”
아이의 물음에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아이 키우느라 치울 일도 많았다. 낙엽을 집에 들고 들어가면, 흙과 먼지가 떨어진다. 갈기갈기 찢어져 집안 곳곳에 흩날린다. 그걸 누가 치울까? 내가 치운다. 난 단호하고 짜증스럽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가져갈래. 너무 예쁘잖아!”
역시나 그냥 넘어갈 녀석이 아니었다. 끝까지 낙엽을 버리지 않고 뻗장대더니,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는다. 나도 싫은 소리 그만하고 싶어 나 몰라라 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잠자리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아이는 고단했는지 금세 눈을 비비며 졸려 했다. 책 한 권을 채 읽지 못했다.
“너 잠 왔구나? 그만 읽어야 하는데, 나머지는 내일 읽자. 오늘 여기까지 읽었으니깐….”
내일 마저 읽기 위해, 방금까지 읽은 페이지 모서리를 접으려 했다. 그런데 그 때 아이가 졸린 눈을 번쩍 뜨더니, “아빠, 잠깐만!” 하고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언가를 주섬주섬 찾아 나에게 갖고 오더니 해사하게 웃으며 낙엽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빠, 이거 책 사이에 끼워놔.”
얼마 전 고집부려 주어 온 낙엽이었다. 까마득하게 잊은 나와 달리, 아이는 그 낙엽을 소중히 간직했다. 게다가 물감을 칠해주고, 정성스레 말려 책갈피가 되어 있었다. 나에겐 성가시고 지저분한 ‘쓰레기’였는데, 아이 손에 들어가니 ‘쓸모’가 있는 물건이 되었다. 난 적잖이 놀라며, 더이상 낙엽이 아닌 책갈피를 책장 사이에 끼웠다.
빗질에 쓸리고, 마대에 담겨 버려질 낙엽이었는데, 아이 손에 들어가니 그럴싸한 책갈피가 되었다. 당장 버리라는 구박만 받던 낙엽이었는데, 이제는 혹여나 찢어질까 조심히 다루어지며, 책장 사이에 고이 간직되고 있다.
누구 손에 달려있냐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다. 심지어 운명을 재탄생 시킨다. 낙엽이 책갈피가 되듯, 사람도 그렇다. 어떤 부모, 어떤 스승,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운명, 쓸모가 뒤바뀐다. 그래서 좋은 만남이 있는 인생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며 살아간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인생은 불운한 만남으로 꽃 한번 제대로 피어보지 못하기도 한다. 운명의 장난 같은 만남의 굴레 안에, 누군가는 안도하고, 누군가는 울분을 토한다.
아이를 위해 기도할 때,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 복된 만남이 있기를 기도하게 된다. 인생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처럼 아이 인생이 흘러갈까? 그렇지 않다. 나도 그런 인생을 살지 못했기에 잘 안다. 지우고 싶은 만남, 관계가 한둘이 아니다. 우리 아이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 기도의 결국은, 불확실한 사람보다 확실한 하나님의 만남을 기대하고 의지하게 된다. 하나님보다 뛰어나고, 하나님보다 우리 아이를 깊이 알고 사랑해 주는 만남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낙엽처럼 한때 단풍으로 피었다 곧장 썩어 없어질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지명하여 주신다. 우리와는 무관해 보이는, 완벽한 타자이신 그분께서 ‘나’와 ‘너’의 관계로 초청해 주셨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 인생을 ‘재탄생’하게 하시면서 ‘재정의’해주셨다. 아빠와 엄마의 관계 안에서 자녀가 되듯, 하나님과의 만남,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인생은 새롭게 쓰인다.
성경의 인물들을 떠올려 보라. 기드온은 므낫세 중에 약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 집 안에서도 가장 작은 자였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큰 용사여”라고 말씀해 주셨고, 실제로 300명으로 대군을 무찌르게 하셨다. 베드로는 어떤가?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고, 수천 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는 초대교회의 유력한 교회 지도자가 된다.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던 지난 자신을 “죄인 중에 내과 괴수니라”고 고백한 바울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 공동체를 세웠다.
이렇게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재정의’되었고, 하나님은 그에 걸맞게 ‘쓸모’ 있는 인생으로 빚어 가셨다. 아이 손에 들린 낙엽이 책갈피가 될 줄 몰랐듯, 하나님의 손에 달린 인생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넓이와 높이로 자라갔다.
모든 부모는, 내 자녀가 특별한 삶을 살기를 소원하지만, 자녀는 대부분 평범하게 큰다. 그래서 부모는 특별하게 키우고 싶은 열망과 평범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틈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한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려 부모는 아이 인생에 적극 개입도 해본다. 단풍이 낙엽이 될 수밖에 없듯, 인생 또한 거스를 수 없는 순리가 있기에 그저 그렇게 살다 사라진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는 특별한 인생을 산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에 걸작품이 된다. 아이가 낙엽을 하나를 예쁜 색을 칠하고 말려 책갈피라는 생기와 기능을 불어넣었듯 말이다. 대단한 능력과 지위를 갖춘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과 사명을 안겨주신다. 여전히 질그릇처럼 보이는 인생이지만, 보배로운 복음을 맡기셔서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게 하신다. 그래서 특별한 인생이 된다.
오늘도 우리 같은 부모는 자녀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이 사람 저 사람 손에 맡기려 한다. 성에 안 차면 부모인 자신이 두 팔 걷어붙이고 직접 나선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보다 우리 자녀를 깊이 알고 사랑하는 존재가 있을까. 우리 하나님 보다 뛰어난 존재가 있을까. 우리 하나님과의 사귐보다 더 놀랍고 신비로운 교제가 있을까. 이 질문을 하다 보면, 우리 아이의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께 아이를 의탁할 수밖에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