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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려는 신호이다.
질병의 존재 이유와 이에 대한 핵심은 여려분이 완전의식에 도달해야 알겠지만, 질병의 목적을 이해함으로써 여려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삶과 생명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근원적 문제들을 되돌아보게 하며, 이를 통해서 인간은 영적인 완성을 향한 일보를 내딛을 수가 있게 됩니다. 아울러 여려분의 내부와 여려분 주변에 다양한 생명들이 충만해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이해함으로써, 당신들은 자신의 지구에서의 배움의 주기를 매우 생생하고 심도있게 끝마치게 되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더 이상 질병이 필요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점들 중 어떠한 것이라도 여려분에게 병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럴 경우 여려분이 그것을 깨달기 위해 직접적인 경험을 거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여려분 역시도 성공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보다 높은 관점에서 본다면, 다른 많은 것들 중에서도 여려분은 병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여기 주구에 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매번 병을 앓을 때마다 자신 속의 불균형으로부터 나오는 무엇인가가 잇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에 알지 못했고 의식하지 못했던 무엇인가와 떠오르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불균형이 여려분의 물질적 신체 속에서 병으로 나타나 그 상태를 보여 준다는 사실을 볼 때, 여려분을 일깨워주는 데는 이 방법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려분의 감정을 통해서나 또는 사고과정이나 꿈을 통해서는 이러한 직접적인 일깨움이 불가능합니다. 이 병들 중 많은 것들이 처음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병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여려분을 일깨워 줄 수도 있고, 또 여려분은 어떤 이유로 해서 그병이 주는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교훈을 배우지 못할 수도 잇습니다. 때문에 이 내면의 불균형으로 인한 빌병은 심한 스트레스가 될 수 있으며, 많은 것들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과거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병들은 여려분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는 장애물 때문일 수도 잇으며, 자신이 의식적으로 이 교훈을 배우고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지 않음으로 해서 불가피하게 방법을 변경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이든지 간에 여려분의 몸속에서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이는 여려분에게 불균형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려분의 몸은 -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감을 알게 해주는 - 문제의 경고 장치입니다. 몸의 불편함은 균형이 깨졌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며, 몸이 여려분과 대화를 요구한는 것입니다.
이때 여려분이 이에 대해 제일 처음 알아야 할 일은 이 불균형을 알게 해주려는 목적이 무엇이며, 왜 이것이 여려분에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시간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이는 일입니다. 이는 세포 레벨에서의 이유가 아니라 유전적 레벨, 질병의 레벨, 과학적 레벨에서 대단히 훌륭하고 중요한 원인이 있은 것입니다. 이는 다른 것들에 의해서 잘 감추어져 잇습니다. 그 대신에 여려분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이 불균형이 자신에게 의미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 잇어서 여려분은 대체적으로 어떤 마음의 저항의 벽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원칙은 여려분 속에 갖고 있는 잠재력은 당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항하는 힘과 현제 세상 속에서 쓰고 있는 곱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잠재력은 저항력에다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를 곱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등식입니다.
P=r×f P : 잠재력, r : 저항력, f : 사용하는 에너지
이는 여려분에게 저항이 있게 되면 이를 통해 기다리고 있는 잠재력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려분이 알게 됨을 의미합니다. 여려분은 이 잠재력이 질병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나타는 징표 속에서 미묘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여려분의 몸과 기관들, 이에 관련된 조직들은 질병을 나타나는 신호로 여려분에게 봉사합니다. (우리는 다른 채널을 통해 「 몸의 신호들( Body Signs) 」란 책 속에서 이에 대해 포괄적으로 이야기 해놓았습니다.)
질병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배우라.
여려분이 무플에 조금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을 때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는 여려분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신호임을 아십시오. 다시 말하면 이는 여려분이 지죽적( 다리 하체로 대포됨)인 면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측면들이 무릎에 신호를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여려분은 무플의 통증 문제를 미리 피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통증이 처음 시작될 때, 여려분이 이에 대한 전체적인 교훈을 흡수하기 위해 시간을 갖고 여려분의 생에 있어서 이러한 것들에 대해 적극적이고 보다 긍정적인 안목을 가짐으로써 가능합니다.
이 말이 대단히 어려운 난치병들, 암 종류, 에이즈 등과 같은 질병들일 때는 지나치게 단순하게 들립니다. 여려분은 이 병들에 흔히 부정과 같은 어떤 패턴이나 더욱 복잡한 것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여려 생에 걸쳐 지속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 한 생애 동안만 계속되기도 합니다. 여려분은 어떤 이유로 해서 이 병을 자신의 삶 속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또 일생 동안 계속해서 여려분은 이 질병이 주려는 교훈을 살펴보는 데 마음 내켜 하지 않거나 그것을 배우려 하질 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태도는 병에 대한 저항의 근원이 되고 더 나아가 부정의 근원이 됩니다.
여려분이 아는 것과 같이 부정한다는 것은 기묘한 것입니다. 어떤 것을 부정한다는 자체는 그것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하며, 그것을 덮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려분이 관심을 기울여 보거나, 그것에 대해 명상을 하거나, 꿈에다 그것에 관해 물어볼 때는 어떤 짧은 영감이 떠오를 것입니다.
여려분이 자신의 삶 속으로 질병을 끌어들인 원인들 중의 하나가 여려분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 여려분은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습니다. 여려분은 친구들로부터 그들의 의견을 통해, 때로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만일 여려분이 전인요벌으로 치유를 하게되면 이 치료법은 세포의 구조를 변화시키고, 타고난 자연치유력을 유발시키는데, 이런 치료의 아이디어는 보다 빠른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항생제나 백신 예방 접종 등은 내면 스스로의 치유력을 촉발시켜 주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것들은 여려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치유력을 자연스럽게 촉발시켜 주는 전인적 치료법보다 훨씬 비생산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병을 부정적인 단계는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여려분은 그것을 보다 쉽게 다룰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의 단계에서는 치료가 보장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게 잇어 거기에는 그들이 배워야할 강력한 교훈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인간이 배워야 할 교훈을 배웠을 때만이 비로서 완치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무지한 상태가 사람들이 많은 생애들을 통해 자신의 병을 다루고 대해왔던 패턴인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환자는 육체적인 레벨에서 자신의 병에 대해 외적인 치료 방법을 개입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개입은 의사나 치유가나 다른 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려부은 이들이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는 대로 단순히 돈을 벌거나 남을 돕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려분이 이들 의사나 치료가들에게 찾아가게 되거나 그들이 여려분에게 오거나 해서 치료자와 환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서로가 삶의 교훈을 교환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들 치료자들은 여려분에게 무엇인가를 배우며, 마찬가지로 여려분 역시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울 것입니다. 여려분이 치료자들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할 때 비로서 여려분은 자신의 신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당신은 나를 돕기 위해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남에게 의지하려는 낮은 자세는 유횽한 면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는 여려분의 부정적인 태도를 포기하게 하고 대게는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때때로 여려분 자신의 독창성, 여려분 자신의 진실과 사랑을 아는 것으로부터 여려분을 격리시킵니다. 여려분은 이에 보다 더 깊숙이 들어감에 따라 거기에는 많은 해답들이 있음을 알기 시작할 것입니다.
남을 돕는 치유가들은 먼저 자신을 치유해야만 한다.
남을 치료하는 많은 조력자들과 치유가들이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있어서 비슷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데, 여려분은 우선 스스로를 치유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치유가들 여려분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 정신, 영혼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완전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여려분에게 일부러 어떤 흠집을 내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려분이 자신 속에 완벽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끔 하고 그러한 깨달음에 돌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치료자 여려분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것처럼 자신을 치유시켜야 합니다. 문제는 만일 여려분이 참으로 나쁘게 보이게 되면 사람들은 여려분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치료하지 못하고 탈모도 해결하지 못하고, 특별히 피부 컨디션이나 자신의 비만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를 치유할수 잇다는 말인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상세히 고객들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즉 여려분은 치유가로서 치유의 에너지를 그들에게 불어 넣어 주고 이와 비슷한 기술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조언하고 여려분에게 이끌리게 된 이유를 고객 자신이 스스로 히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잇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때 여려분은 아주 정직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이 특별한 삶의 교훈을 찾기 위해 대단히 고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려분이 나한테서 보고 있는 특별한 것들을 여려분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변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내가 누구라는 것에 관한 진실일 뿐인 것입니다."
여려분이 삶의 과정의 일부분과 여려분의 교훈, 여려분이 보다 깊이 있는 이해의 수준에서 다루는 보편적인 법칙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여려분은 그들에게 몸범이 될 수 잇으며 실재로 그들에게 보다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훌륭한 것입니다. 특히 이것은 여려분이 자신 속에 활용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훌륭한 것입니다. 여려분은 본보기로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거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려분은 이것의 다른 이면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사실은 단지 여려분이 치유의 대상인 그들을 상담해 주는 것이 아니라그들이 여려분을 상담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려분이 상대하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여려분에게 어떤 문제들을 가져올 것인데, 그것들은 여려분에게 작은 문제이든 큰 문제이든, 또 어떤 문든 간에 여려분에게 실재적인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즉 여려분이 거기서 그들과 함께 상담과정에서 나누는 것들은 여려분 자신이 인생행로에서 수없이 경험하게 될 사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치유는 영혼의 주파수적 공명에 의해서
두 영혼의 진동이 최소한 한 순간이나 두 순간 동안이라도 조화 공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이 없다면 치유는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여려분의 에너지 진동과 함께 공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여려분으로부터 떠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곳을 찾아가 봐야 합니다."
여려분이 이들과 함께 공명할 수 있는 이유는 영혼의 유사성 때문입니다. 여려분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려분 사이에는 서로 함께 공유하고 있는 진동이 있습니다. 이 연결고리는 여려분이 도울 수 있는 모든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좀 불합리하게 들릴지라도,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내담자인 그들에게 요청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우리가 이 일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나에게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아마 여려분은 내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아마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환자인 상대방을 상당히 자극하는 말일 수 있을지라도 여려분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가 잇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여려분이 그러한 질문과 함께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특정한 것으로 유도해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이들이 가진 나름대로의 개성이나 문제의 독특함을 구체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며, 따라서 이는 여려분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선택하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매우 어려운 건강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선택과 해결책들이 생겨난 것은 이제 불과 약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여려분의 내면의 모습을 반사하고 반영하는 일종의 거울로서의 여려분의 사회는 이러한 발명과 아이디어, 기술적 변화를 억압해 왔습니다.
이 억압은 몇 가지 이유로 해서 일어났습니다. 즉 이들 중 명백한 것은 탐욕이며, 변화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의 태도와 권력에 연관된 거래관계, 어둠과 빛, 그리고 여려분 대다수가 만들어낸 통상적인 갈등 등입니다...이러한 계획의 훨씬 더 큰 부분으로서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류는 기존의 무지한 질병의 행로에서 벗어나 이를 배움의 길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끼? 이것이 오늘 말하는 주제의 핵심입니다.
여려분 이 질문에 대해 "아! 맞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단순하게 답변할 수는 없습니다. 여려분의 모든 존재의 핵심, 즉 여려분의 영혼, 여려분의 과거의 모든 전생의 삶들, 여려분의 본질로부터 대답이 나오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가속되고 있는 인류의 본성이고, 모든 인류가 달성해야 할 앎이며,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인 논점이 되며, 여려분이 이를 조사해 본다면 정치적인 문제까지도 될 수 있습니다.
질병이 지닌 영적인 의미
질병이 여려분의 삶 속에 개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살펴보기로 합시다. 병은 여려분에게 내적인 삶의 교훈을 가져다주고, 여려분의 존재에 대해 앎을 제공합니다. 병은 인간 존재 전반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완성을 향한 계기가 되며, 몸은 곧 영혼의 상태나 성격, 인생 자체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병을 가진 여려분에게는 변화가 요구됩니다. 때때로 이 변화는 처음 시작될 때는 대단히 좋지 않게 보입니다.
그럴 때 여려분은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 이 병 속에 나의 일부가 어디에 있는가? 이 속에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이 속에서 여려분이 가치롭게 여기는 어떤 것들을 탐색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려분은 자신의 삶 속에서 중요하다고 생가한 것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가진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 해답이 여려분에게 나타나는 대로 여려분은 현 생애의 교훈을 얻는 데 있어 최초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암의 경우에 있어서 만약 여려분이 이에 대해 단지 50%만이라도 삶의 교훈을 배운다면, (이 의미는 여려분이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절반과 의식의 절반, 중요한 것의 절반을 이해하고 창조하는 것임) 암은 완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의사는 이 때문에 대단히 유명해질 수도 있으나, 여려분은 자신에 대한 내적 교훈을 받아들일 때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만약 여려분이 대단히 고통 받고 만히 힘들어 하는 상태에 잇다면, 이때 자신에게 당신 자신의 영혼이 어떤 종류의 에너지인가를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이 보이지 않는 힘은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우리는 당신을 가르쳐 깨달게 하기 위해 병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는 진실의 한 단면에 불과할까요?
아마 영혼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이 존재를 대단히 사랑하기 때문에 내 힘의 범위 내에서 이 교훈과 사랑, 이해, 존재의 각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이는 여려분이 대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육체로 환생할 때 이루어지는 영혼의 임무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그러한 분리의 뜻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려분은 때때로 가끔은 대영혼의 에너지의 정수와 접촉이 이루어지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려분이 항상 그 대영혼의 에너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이른바 "깨달음" 이라고 불립니다. 다시 말해 대영혼의 에너지를 언제나 가지고 있으려면 여려분은 해탈(解脫)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순간적인 병의 치유를 포함해서 질병의 종결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 등 많은 일들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이 있는데, 이는 여려분 속에서 잠재력이 융합되어 흘러넘치고 저항이 끝나는 것입니다. 질병은 곧 여려분의 삶에서 저항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간단하지 않습니까!여려분이 이 질병의 교훈과 더욱더 깊은 접촉이 이루어짐에 따라 여려분은 질병의 핵심에 대한 보다 깊은 각성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결과로 여려분은 변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여려분은 통상적으로 대단히 명료하면서 심오한 문재에 직면해야만 합니다.
여려분은 자신의 친구들 중에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에 여려분은 그들에 대하여 터놓고 이야기해 줄 수 없는 상황에 존재하기도 합니다. 암은 여려분 속에서 어둠(부정)이 가장 짙게 드리운 부분입니다.
그리고 암은 통상적으로 여려분의 존재 속에서 산에 대한 인식과 여려분 자신의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상위자아의 수용과 더불어 여려분의 사랑의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여려분의 영혼과 하나됨에 관한 교훈입니다.
여려분은 한생하기 전에 여러 가지 중에서 내적인 앎과 이러한 사랑, 이런 방식으로 남을 돕는 방법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될 수 있는 경험을 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여려분아 여기에 있게 된 이유입니다. 여려분 중 일부는 카르마 체험을 통해 마음을 닦고 완성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카르마의 의미는 과거 생으로부터 만들어진 원인이 현생에서 영향을 받아 지금 질병으로 나타탄 것임.) 업은 특정 방식으로 에너지의 균형을 취하고 에너지를 창조함으로써 여려분이 사랑을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통상적으로 이것은 어려운 만성적인 질병에 관계된 깊은 거부감을 가진 주제로서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여려분은 이에 정면 대항하여 이것의 후륭한 장점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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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유익한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