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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ight”와 “crooked”는 도덕적 청렴과 부패에 대한 은유이며, “청렴한 사람들을 장려하기 위해”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들을 공직에 임명함으로써 정부를 개혁하려는 공자의 전략을 참조하였다. 공자는 이 정책을 실천하기 위해서 두 개의 특질이 필요하다고 제시한다. 하나는 인으로, 타인의 안녕을 보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람은 또한 현명해야하는데, 이는 누가 올바르고 누가 부패했는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수반한다. 인이 없으면, 사람은 적절한 동기가 부족하다. 지혜가 없으면, 목표를 이룰 기술이 부족하다.
지혜의 중요한 부분은 타인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는가이다. 실제로, 논어 5편의 많은 부분에서, 공자는 타인을 감정하고 있다. 현대 서구의 독자들에게는, 공자가 타인에 대한 평가를 강조하는 것이 불쾌할 수도 있다. 우리는 비판적인 사람들이 못마땅한 사회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비판적이라고 타인을 비난하는 것은 당신은 이미 그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역설 즐기기 그 이상이다. 사실, 가끔 타인을 평가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급진주의자나 여성 혐오자, 아동 성추행자 같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비난한다. 사람들에게 공평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우리는 그들이 나의 이익을 위해 솔직히 말하고 있는지를 판단해야한다. 솔직하지만 다소 재치가 없어서, 내가 듣고 싶지 않은 진실을 말하여 기분을 상하게 하는지를 알아야한다. 판단하는 것이 악이라면, 단지 타인에 대한 의견을 의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의견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판단하는 것은 정말로 세련되지도 사려깊지도 못한 방법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것이다. 누군가 계속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과 달리) 자신은 어떤 평가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한, 의견상 세련되지도 사려깊지도 않게 시작할 수는 없다.
겸손의 미덕은 판단을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래서 공자는 “실수를 했다면 바로잡기를 미루지 말라”고 독려한다. 그는 자신이 이 충고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때로 자신이 타인을 평가하는데 틀렸다고 인정한다(2.9, 5.10), 그는 자주 자신의 실패를 언급하고(7.3, 7.33, 7.34, 9.8) 타인의 탁월함의 칭송한다. “두 사람과 걸어가면, 그 둘 중에 반드시 스승이 하나 있다. 나는 훌륭한 사람에 집중하면서 그들을 따라배우려고한다. 나쁜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은 스스로 바꿀 것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라고 말하면서 공자는 사려깊은 평가의 중요성을 정리한다.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살피는 것은 지혜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지혜는 또한 metavirtue(?)인데, 다른 미덕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그리하여, 공자는 말하길, “인을 행하며 살려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4.1). 보편적인 지성은 공자에게 있어 지혜의 3분의 1로 보여진다(5.9). 이는 통찰력이 있는 송시로 번역될 만큼 분명하다 (1.5, 3.8, 3.11).
서구의 윤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공자의 지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인 phronesis 혹은 “실천적 지혜”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할 수도 있다.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다.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혜는 신학적 지성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종류의 법칙으로든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묵가파들이나 서구 공리주의파 같은) 서구의 일부 철학자들은 윤리를 거의 수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 반면, 공자파와 아리스토텔레스파는 지혜에 대해 배움은 가능하나 수학적 해석은 불가한 최고장인의 기술 같은 것으로 보았다. 게다가 공자파와 아리스토텔레스파 모두, 지혜는 다른 덕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관점사이에는 또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phronesis(실천적 지혜)는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최고의 덕이다. 반면, 공자에게는 인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정의, 책임, 신뢰 그리고 용기는 공자에게 중요한 덕이지만, 인보다는 훨씬 더 좁은 것이다. 선한 사람은 이 소소한 덕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그 자체로는 한 사람이 인을 가졌다고 하기에 충분치 않다. 정의는 심지어 강력한 유혹에 처했다 해도, 잘못된 일을 행하지 않는 사람의 고결함이다. 같은 의미의 중국어는 바른 사람이 행하는 행동의 옳음을 묘사하기위해 쓰였다. 사실, 많은 논어 해석자들이 지속적으로 그것을 “rightness”로 번역했는데, 이는 (적어도 공자에게는) 그들은 덕이라는 명분보다는 실천의 질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람이 부의 유혹이나 위험에 처해서도 옳은 일을 행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군자는 옳음을 알고 있으나, 소인배는 이익만을 안다” (4.6).
책임과 신뢰는 공자가 자주 함께 언급하는 덕이다(1.4, 1.8, 7.25, 12.10). 책임은 일종의 헌신이며 충성이다. 특히 실천이 개인의 사익과 충돌할 때이다(5.9). 그러나 공자는 책임은 결코 눈먼 충성심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당연히 그를 추켜세우겠는가?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책임진다면, 당연히 그를 가르치겠는가?”(14.7)
글자의 구조가 보여주듯이,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言)옆에 선 사람(人)이 된다는 것이다: 즉 정직하며 진실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에게 매우 중요한데, 그는 진정한 인과 말뿐인 혹은 “clever tongue”(1.3)으로 제시되는 피상적이며 유사한 인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정한 군자는 입이 무거우며, 그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14.27).
공자는 경솔함과 용기를 구별한다. 그래서, 언제나 고집센 Zilu가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려 할 때, 공자가 담담하게 말하길, Zilu가 용기 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나를 앞선다“ (5.7). 사람은 자신을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용기가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옳은 것을 보고, 용기 없는 행동은 하지 말라“ (2.24). 이것이 서구의 덕 윤리학자들의 관점과 가장 유사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용기를 매우 중요한 덕으로 간주했다. 반면 공자는 이것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진정한 용기를 독려하기보다는 과도한 용기를 자제시키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쓴 것 같다(8.2, 8.10, 14.4, 등등, 그러나 9.29는 반대이다). 이것은 용기의 패러다임이( 중국과 서구 양쪽 모두에서) 전쟁에서 용감하다는 사실과 어느정도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의 동시대인들이 가능한 한 군사적 용어를 생각하지 않기를 바랬다.
많은 다른 덕이 논어에 나와 있다. 그러나 앞의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