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역이 재생산되려면.6 중단되지 않게 하라 1 -메콩강소년(정도연)-
5. 내가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것보다 이미 시작된 사역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쓰임 받는 게 더 중요하다. 사역을 위임받아서 해야 할 일 가운데는 국적이나 단체를 초월해 믿음의 선배들이 해 오던 일이 중단되지 않고 이어가야 하는 일도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는 국경이나 민족의 벽이 없고 교단이나 교파 등 특정 단체의 이기적인 경계도 없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고, 형제이고 자매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하나 되어 연합하고 협력해야 한다.
나는 1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얀마 북부 카친주와 중국 운남성, 태국, 라오스, 베트남 등에서 복음을 전해 온 미국 그리스도의 교단(Church of Christ) 동남아 선교부(SEACS, South East Asia Christian service *이하 ‘동남아선교부’)의 사역 일부를 물려받아, 그 약함을 보충하는 일에 땀 흘리며 섬기는 기회도 누리고 있다.
미얀마는 독립의 선봉에서 일하던 아웅산이 1947년 7월 19일 정적에게 암살당하면서부터 미얀마족 중심의 군사 독재가 시작되었다. 이때 미얀마 지역에서 사역하던 선교단체들은 태국 북부로 본부를 옮겨왔다. 이렇게 태국에 들어와 동남아를 대상으로 선교를 해오던 단체 중 하나가 ‘동남아선교부’다.
1980년, 태국 정부는 점점 숫자가 늘어가는 외국 선교사들의 수를 통제하고, 잘못된 교리로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단을 구별하기 위해 새로운 종교정책을 세웠다. 그때까지 태국에서 활동하는 각 종교단체에 그들이 필요한 선교사의 숫자를 그해 12월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태국 정부는 요구한 서류를 준비해 기한 내에 제출한 40개 단체의 서류를 검토한 후 1981년 2월 27일 1500명의 외국 선교사 쿼터를 각 선교부에 할당했다. 여기엔 힌두교, 시크교, 안식일교, 카톨릭도 포함되어 있다. 이때 ‘동남아선교부’는 15개의 선교사 비자를 신청해 받았다. 한국 선교부는 정승회목사님의 KPM(The Korea Presbyterian Mission in Thailand)이 20개의 쿼터를 신청해 받았다.
‘동남아선교부’는 15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개척, 신학교, 방송국, 출판사, 학숙소를 세워 복음을 전했다. 교회 개척은 태국과 동남아시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CBI( Chiangmai Bible Institute)신학교는 동남아 선교부가 미얀마 카친주에서 사역할 때 전도하고 양육한 학생들을 위해 세웠다고 한다.
모든 강의는 영어로 해서 태국 학생들이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적응한 학생들은 모두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 태국 북부지역에서 영어 잘하는 현지 사역자 중에는 CBI 출신들이 많다. 내가 신학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잘 정돈된 도서관이었다.
방송국은 동남아는 물론 중국, 인도까지 복음을 송출했다. 출판사는 성경 찬송가가 없는 민족의 성경과 찬송가 외, 각종 주석과 신앙 서적을 출판해 보급했다. 또 요소요소에 학숙소를 세워 오지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80년 후반부터 미국 선교사들은 자기들이 양육한 현지 리더들에게 사역을 이양하고 하나둘 본국으로 돌아갔다. 현지 리더의 중심에는 미얀마 북부 카친주의 ‘라왕족’ 출신 ‘피터, 쑥짜이’ 목사가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천재였다. ‘동남아선교부’가 미얀마 북부 카친주에서 활동할 때 발굴한 인재이고 양육한 제자다.
‘동남아선교부’는 그를 미국으로 보내 대학과 박사까지 마치게 하고 태국 시민권을 만들어 치앙마이 본부의 현지 리더로 세웠다. 그는 10개 정도의 언어를 읽고 쓰고 통·번역이 가능했다. 쑥짜이 목사 외 ‘리수족’ ‘몽족’ 출신 리더도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동남아선교부’가 미국에 데려가 대학부터 박사까지 마치게 한 현지인은 내가 아는 사람만도 세 사람이다. 미얀마 카친주 출신이 두 명, 태국 ‘몽족’이 한 명이다.
나는 태국에 입국한 90년도에 선배 선교사의 도움으로 태국 총회(EFT)를 통해 ‘동남아선교부’를 소개받았다. 미국 선교사들이 떠나므로 비어있던 선교사 비자 쿼터 하나를 빌려 사용하면서 시작된 나의 태국 선교사의 삶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동남아선교부’가 필요한 일에는 가능한 모든 일에 동역했다. 나는 ‘동남아선교부’의 일과 한국 선배에게 위임받아서 하는 일에 차별을 두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할 나의 일처럼 했다. 쑥짜이 목사와 함께 미얀마 북부에 있는 라왕족의 찬송가와 아카족의 성경을 만들어 보급하는 일에 참여했다. 쑥짜이 목사의 세 딸과 입양한 아들을 공동체 아이들을 기르는 마음으로 섬겼다. 쑥짜이 목사가 요구한 것도 아니고, 뭔가를 기대하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태국에 입국한 지 2, 3년이 지나도록 비자를 구하지 못해, 3개월마다 비자 갱신을 위해 국경을 넘어갔다 와야 하는 불편을 겪었지만, 우리 선교부에 온 8명의 선교사는 태국에 들어올 때부터 선교사 비자를 확정 짓고 오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동남아선교부’에 비자 쿼터가 남아있지 않으면, 저들은 다른 단체의 것을 찾아서라도 원하는 비자를 해결해 주었다. 이런 은혜로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선교사라도 비자를 부탁하거나,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 때문에 비자 여행에 어려움을 겪는 선교사의 비자를 조건 없이 해결해 주기도 했다.
1998년 SEACS 선교부에 큰 위기가 닥쳤다. 현지 리더 쑥짜이 목사가 태국과 미얀마 국경 메싸이를 다녀오는 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에 간 것이다. 그는 선교부 일 외에도 ‘카친족 독립군’(KIA, Kachin Independent Army)의 일도 하지 않았나 싶다. 가끔 국경을 넘어 말을 타고 몇 주씩 밀림을 다녀오는 그를 보았다. 한번은 그와 함께 태국과 미얀마 국경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예사로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들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선교본부, 신학교(CBI ), 방송국, 출판사, 개척된 교회들이 공중분해 될 위기에 빠졌다. 태국 은행에서 선교본부와 신학교의 땅과 건물에 강제 압류가 들어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표 쑥짜이 목사가 선교부의 동의 없이 선교부 부동산을 은행에 맡기고 돈을 대출해 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