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보고 싶었어!" / 이 월성
"아빠 보고 싶었어!"
육중한 쇠창살 사이로 핏기 없는 얼굴을 한 17~18세가량의 소녀가
가냘픈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뒤 돌아 보았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아빠라고 부르나? 해서였다. 내 뒤엔 아무도 없었다. 74세인 나에게 느닷없이 건네 온 인사말이다. xxxx정신요양원에서 요양 중인 아들을 면회하러 온 나에게 생전 처음 보는 여자 아이가 외쳐댄 말이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48살인 아들이 19살이었을 때, 정신 이상이 있어 병원 신세를 져온 지 거의 30년이 되었다. 이 녀석은 아비를 좋아했다. 집에 잠시 외박을 나왔을 때 정신분열증이 일어나면
"아버지 집으로 빨리 오세요, 이상해져요?"
란 전화가 내게 온다. 내가 만사를 제치고 집에 들어서면서
"아버지가 왔다"
고 말하고 문안으로 들어서면,
"야! 이 자식 봐라! 내가 아버지를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고 아버지 목소리를 흉내 내냐?"
"너 죽어봐라!"
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부자간에 권투시합이 되곤 했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어느 날 택시기사가 집안으로 들어 와 인천에서 서울 청와대까지 왕복 택시비 8만원을 내라고 했다.
"누가 택시를 타고 청와대를 갔다 왔느냐?"
고 물었더니
"청와대에서 나보고 와서 일 해 달라"
고 사정을 해서 택시를 불러 타고 갔다 왔지요"
하고 아들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청와대에서 누가 와서 일해 달라고 했니?"
"대통령이지!"
얼굴 표정하나 변치 않고 말한다. 이런 정신질환자를 보호하고 있는 아비로서는 정신요양원을 갈 때마다 남의 자녀들도 내 자식처럼 측은히 생각했다. 이 이름도 모르는 소녀 에게
"그래 아빠도 보고 싶었지"
라고 화답하고 환한 얼굴로 잠시 아빠가 되어주었다. 이 말을 하면서도 아들 생각과 겹쳐서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그래도 나를 아빠로 불러준 어린 소녀에게 실망을 안겨주기 싫어서 5분간 아버지 노릇을 한 일이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아니 자랑스럽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