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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말하는 경주(금성) 감숙성
(金城)은 세계 최초로 금으로 만들어진 성(城)
신라는 비단을 짜서 서역과의 교역을 주도한 나라이다. 실크로드를 열었던 나라가 바로 신라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오직 비단국(Serica) 신라(Sina)만이 중원 대륙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1165쪽에는 경주(慶州)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隋置. 尋改曰弘化郡. 唐復置. 改曰安化郡. 又改順化郡. 尋復爲慶州. 宋曰慶州安化郡. 後升爲慶陽府.
卽今甘肅慶陽縣 …
수나라 때 두었다가 홍화군이라 했는데 당나라 때는 안화군이라 했다. 그리고 다시 고쳐 순화군이라 했다.
다시 경주라고 했다가 송나라 때는 경주 안화군이라 했다. 후에 다시 경양부가 되었다.
지금의 감숙성 경양현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주(慶州) 편에는 " 爲慶州府別號樂浪淳化所定 "
경주를 별호로 낙랑(樂浪)이라고 하고 순화에 정했다. 라고 기록 한다는데 ....
순화현(淳化縣)은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것이 순화현(淳化縣)이었는데
지금은 감숙성 경양현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경상도 경주를 낙랑이라고 한 사실이 없으므로,
신라 때의 경주는 한(漢)나라 때의 낙랑(樂浪) 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경주가 순화(淳化)라는 것인데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이 경순왕 김부에게 내려준 봉지입니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가
그 봉호입니다.
그리고 경주(慶州)란 이름도 신라가 망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지요.
즉, 처음부터 신라의 수도가 아니라 당나라 때 ' 안화, 순화 ' 라고 부르던 것을 경순왕이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자 왕건은 동맹(同盟)의 답례로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와 혼인시키고 순화군을 경순왕에게
봉했으므로 그 이름자를 따서 경주(慶州)로 고쳐 식읍으로 떼어주고 제후로 삼았던 것입니다.
원래 신라의 수도는 계림, 또는 금성인데 그 곳이 제후의 땅으로 바뀌면서 경주가 된 것입니다.
지금 한반도 경주에는 계림도 있고 금성도 있고, 낭산, 명활산, 황룡사, 포석정 등이 마치 영화셋장처럼
한 곳에 뭉뚱거려져 있으니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말이 안됩니다.
위에 선화봉사고려도경/시봉편에 보면 신라가 고구려를 망하게 했을 때 이미 대륙의 서역에 있었음을
기록으로 확인 할 수가 있었습니다.
신라의 수도 금성, 계림은 감숙성에 있었던 것이 확실 합니다. 삼국시에는 고구려땅에 속했지만
이 곳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을 뿐 정확한 영토개념이 없었을 때 이기때문에 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쉽게 말해 조폭세력으로 말하자면 같은 지역 內에서 여러 파가 존재하지만 서로의 존립을 인정하면서
때로는 싸우고 위해주고 아웅다웅 하는것과 같다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금성은 감숙성 난주에 있습니다. 실크로드의 길목을 차지했고 서역과 국제무역의 요충지를 차지했던
신라를 말하자면 이정도는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고지도는 없으나 낙랑의 위치를 추정한 지도는
나중에 올려 드리겠습니다.
고려사절요 태조 을미18년
○ 봄 3월에 , 견훤의 아들 신검(神劒)이 그 아버지를 금산(金山 금제(金提))의 불사(佛寺)에 가두고 ,
그 아우 금강(金剛)을 죽였다.
견훤이 아들 10여 명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자 하니 , 그 형 신검ㆍ 양검(良劒)ㆍ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근심하며 번민하였다.
이 때 양검과 용검은 지방에 나가서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신검만이 홀로 옆에 있었다.
이찬(伊粲) 능환(能換)이 사람을 시켜 양검ㆍ 용검과 함께 몰래 모의하고 , 신검을 권하여 난을 일으키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왕이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 “나주(羅州)의 40여 군(郡)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풍화(風化)에 복종하고 있었는데 근년에 후백제에게 침략되어 6년 동안이나 바닷길이 통하지 않았으니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이 곳을 진무(鎭撫)하겠는??하니 , 공경(公卿)들이 유금필(庾금弼)을 천거하였다.
왕은 이르기를 , “나도 역시 이를 생각해 보았으나 그러나 요사이 신라로 가는 길이 막혔던 것을 금필이
이를 통하게 하였으니 그의 노고(勞苦)를 생각하니 다시 명하기가 어렵다” 고 하였다. 금필이 아뢰기를 ,
“신이 비록 아니 이미 노쇠(老衰)했사오나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 “경이 만약 명을 받든다면 어찌 이보다 더 기쁨이 있으랴” 하고 ,
금필로서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을 삼아 예성강(禮成江)까지 전송하고 어선(御船)을 주어 보내었다.
금필이 나주(羅州)에 가서 경략(經略)하고 돌아오니 , 왕이 또 예성강까지 행차하여 맞아 위로하였다.
○ 6월에 견훤이 막내 아들 능예(能乂)와 여자(女子 나인(內人)) 애복(哀福)과 사랑하는 첩 고비(姑比)등과 함께
나주(羅州)로 도망 나와서 고려에 들어와 붙어살기를 청하므로 장군 유금필과 대광(大匡) 만세(萬歲)와 원보(元
甫) 향예(香乂)와 오담(吳淡)ㆍ능선(能宣)ㆍ충질(忠質) 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견훤이 이르매 ,
다시 견훤을 일컬어 「상부」(尙父)라 하고 , 남궁(南宮)을 사관(舍館)으로 주고 , 위(位)는 백관의 위에 있었다.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 겸하여 금과 비단과 노비 각 40명과 말 10필을 내려주고 ,
후백제에서 항복해 온 사람 신강(信康)으로서 아관(衙官)을 삼았다.
○ 가을 9월에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황주(黃州)와 해주(海州)를 순시하고 돌아왔다.
○ 겨울 10월에 임술(任戌)에 신라왕 김부(金溥)가 시랑(侍朗) 김봉휴(金封休)를 보내어 들어와서 조회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섭시중(攝侍中) 왕철(王鐵)과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 등을 보내어 회보 하였다.
11월 갑오(甲午)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王都)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庶民)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혔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 구경꾼들이 쭉 둘러 서
있었다. 길 가에 있는 주(州)ㆍ현(懸)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癸卯)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오니 , 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고 들어와서 유화궁(柳花宮)에 머무르게 하였다.
계축(癸丑)에 왕이 정전(正殿)에 나아가 문무 백관을 모으고 예(禮)를 갖추어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신라왕에게 시집보내었다.
기미(己未)에 신라왕이 글을 올리기를 , “본국이 오랫동안 위란(危亂)을 겪어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으니
다시 기업(基業)을 보전할 희망이 없습니다. 원컨대 , 신하의 예(禮)로써 뵈옵고자 합니다” 하니 ,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에 신유(辛酉)에 뭇 신하들이 아뢰기를 ,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땅에는 임금이 둘이 없사오니 ,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으면 백성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 신라왕의 청을 들어주옵소서” 하였다.
임신(任申)에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서 재신(宰臣)과 백관을 모으고 이르기를 , “짐(朕)이 신라와 서로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을 맺어 두 나라가 각기 사직(社稷)을 보전하여 영원히 잘 지내기를 바랐었는데 이제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일컫기를 청하며 , 경(卿)등도 역시 옳다고 하므로 짐이 마음으로는 부끄럽게 여기나
의리로써 굳이 거절하기가 어렵다” 하고 , 이에 김부(金傅)의 뜰 아래서 뵈옵는 예(禮)를 받으니 뭇 신하들이
칭하(稱賀)하여 그 소리가 궁궐에 진동하였다.
김부를 제수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
八千戶)'로 봉하고 , 위(位)가 태자(太子)의 위에 있었다. 해마다 녹(祿) 1천석을 주고 ,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
(慶州)라하여 김부에게 주어 식읍(食邑)으로 하게 하였다. 그따라온 사람들도 모두 채용(採用)하고 토지와
녹(祿)을 주어 그전보다도 더 우대되었다. 또 신란궁(神鸞宮)을 세워 김부에게 주었다.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
(事審官)으로 삼아 부호장(副戶長) 이하 관직(官職) 등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功臣)들도 역시
이를 본받아 각기 그 주(州)의 사심관이 되었으니 , 사심관은 이 때에 시작되었다.
금성(金城)은 세계 최초로 주물(鑄物)로 만들어진 성(城)
★ 三國史記에 의하면 박혁거세 21년에 금성(金城)이 축성되었다.
『築京城 號曰金城…』
◇ 사기사전(史記辭典) 288쪽
『金城. 古縣名 故置今甘肅蘭州 西北黃河南岸 因金城關 在今甘肅蘭州北 當黃河西北山要隘處 大宛列傳渾邪王率
其民降漢 而金城 河西西竝南山至鹽澤空无玻奴 金屬鑄成的城墻 比喩城防堅固 地勢險要 留候世家 此所謂金城千
里 天府指國也』
금성은 옛 현의 이름이다. 옛날에 감숙성 난주에 두었다. 서북으로는 황하가 흐르는데, 황하의 남안에 金城의
관문이 있다. 지금의 감숙성 난주의 북쪽이다. 황하 서북으로는 산이 좁고 험한 요처이다.
대완열전에 의하면 토곡혼(吐谷渾) 왕이었던 혼사왕(渾邪王)이 백성들을 이끌고 한(漢)나라에 항복했던 곳이다.
금성은 서쪽으로 강이 있고, 남산(南山)을 지나 염택에 이르게 된다.
주물(鑄物)로 성(城)의 담장을 쌓았다.
성(城)의 방어가 견고하고 지세가 험했으므로 많은 제후들과 세가들이 머물렀다.
그리하여 금성(金城) 천리(千里), 하늘에서 정해준 나라라고 일컬어졌다.
응소(應邵)의 말에 의하면 처음에 성(城)을 쌓을 때 금(金)으로 쌓았다고 하여 금성(金城)이라 했다…
◇ 금성(金城)은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현재의 난주(蘭州)를 말한다.
신라의 금성이 서역(西域)으로 넘나드는 실크로드 길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통은 물론 전략상의 요충지이다.
★ 신라의 최초 왕의 칭호는 거서간(居西干)→이사금((尼師今)인데, 간(干, 汗)은
당시 천산(天山)과 알타이산 일대에 웅거하던 유목민족들의 왕의 호칭이다.
그리고 이사금(尼師今)이란 호칭 역시 청해성, 서장성, 감숙성 , 신강성 일대를 무대로 세력을 확장했던
천축(天竺)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노례왕 14년에 이서국(伊西國) 사람이 금성(金城)을 침공해왔다.
운문사(雲門寺)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제사납전기(諸寺納田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정관(貞觀) 6년 임진년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에서 밭을 바쳤다.
『伊西國. 弩禮王十四年 伊西國人 來攻金城 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 貞觀六年壬辰 伊西郡今郚村零味寺納田』
◇ 삼국사기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14년에도 이서국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 오므로 우리는 크게 군사를 들어 막아도 능히 물리치지 못하고 있던 차에…
『伊西古國來攻金城 我大擧兵防禦 不能攘…』
★ 남해왕(南解王. A.D.3년) 원년 낙랑병(樂浪兵)이 침입해 와 금성(金城)을 겹겹으로 에워쌓다.
『秋七月 樂浪兵至圍金城數重…』
11년 왜인(倭人)이 병선 100척을 보내어 해변의 민호를 노략질했다. 이에 육부의 정병으로 막게 했다.
낙랑이 이에 우리의 성 안이 빈 줄 알고 급히 금성을 공격해왔다.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內虛 來攻金城甚急…』
◇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37년.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이르러 근방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 금성(金城)을 포위하여 급히 치므로…
『三十七年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
◇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연지(燕地)'조에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들이 살고 있는데,
백여 국으로 나뉘어져 있다(樂浪海中有倭人分爲百餘國)라는 기록도 보인다.
★ 위(魏)와 왜(倭)는 한 뿌리에서 생겼다. 위(魏)나라가 망한 후 생긴 나라가 왜(倭)이다.
진(秦)나라 2세 호해(胡亥. B.C.209∼207) 때 위(魏)나라는 독립하여 도읍을 평양(平陽)에 정했다.
산서성 임분현(臨汾縣)이다.
위나라는 황하를 중심으로 산서성 중부와 하남성 일부 지역에서 활동을 했다.
그후 한고조 유방에게 망한다. 한고조 3년이다.
위(魏)나라가 망한 후 왜국(倭國)을 세웠다.
그 후 왜국은 지나대륙 남부로 이동했고, 백제의 속국이 되어 행정의 지배를 받았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강성하던 남북조시대에는 발붙일 곳이 없자 이주(夷州)였던 지금의 대만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백제가 망하자 백제의 군신(君臣)과 합세하게 되고,
유구(琉球) 열도를 타고 구주(九州)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 왜인들은 당시 산서 하남 등지에서 황하의 물길을 타고 금성까지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지도를 보면 금성 주위를 수많은 물길이 에워싸고 있다.
‘樂浪海中有倭人分爲百餘國’이란 낙랑 땅에 속한 황하 일대에 근거하여
백여 소국으로 흩어져 활동하던 왜인(倭人)들을 일컫는다.
강역(지도 생략)
한(漢)나라 때의 낙랑지(樂浪地)
♣ 2001년 중학교 국사 47쪽에 실린, 신라 진흥왕 때의 강역.
신라의 전성기에도, 낙랑 유적지로 자리매김한 고구려의 평양 일대를 빼앗지 못했다.
★ 고구려ㆍ신라ㆍ백제의 강역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지명이 낙랑(樂浪)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종합하자면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한나라가 낙랑을 사이에 두고 맞물려 있는 형국이다.
낙랑은 백제의 동쪽, 고구려의 남쪽, 한(漢)나라의 북쪽, 그리고 신라와는 매우 근접한 거리에 처해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건국 초에는 낙랑이 금성(金城)을 수시로 침범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열전 온달(溫達)편에 보면,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樂浪)의 언덕에 모여
전렵(田獵)을 한다고 한다.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설화를 보듯, 고구려는 낙랑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킨 주역이다.
★ 그러나 구당서(舊唐書) 東夷篇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新羅國…其國在漢時樂浪也. 東及南方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隣高麗. 東西千里. 南北二千里. 有城邑村落.
王之所居曰金城 周七八里 衛兵三千人 設獅子隊 文武官 凡有十七等, 其王金眞平, 隋文帝時 授上開府樂浪郡公…』
신라국은…한(漢)나라 때 낙랑의 땅이었다.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해 있으며,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동서로 1천 리, 남북으로 2천 리이다. 성과 읍, 촌락이 있었다.
왕이 있던 곳은 금성(金城)이었다.
★ 수서(隋書) 東夷傳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新羅國在高麗東南居 漢時樂浪之地』
신라는 고구려 동남에 살았는데, 이곳은 한(漢)나라 때의 낙랑 땅이다.
북사(北史)에도 역시 신라는 본래 진한(辰韓)의 뿌리인데, 고구려 東南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한(漢)나라 때의 낙랑(樂浪) 땅이라고 했다.
★ 수서(隋書) 신라편 계속
『金眞平開皇十四年 遣使貢方物高祖拜 眞平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진평왕이 개황 14년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공물과 방물을 바치고 고조를 배알했다.
진평왕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 삼국유사 진한(辰韓)편에서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燕)나라 사람들이 피신해온 곳이다.
그러므로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읍과 마을을 사탁(沙涿), 점탁(漸涿)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又崔致遠云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 云沙涿 漸涿等[羅人方言, 讀涿音爲道 故今或作沙梁,
梁亦讀道]』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38년을 보면, 중국 사람이 진란(秦亂)에 시달려 동쪽으로 오는 자가 많아서
대개 마한 동쪽에 처하여 진한(辰韓)과 섞여 살더니 이에 이르러 점점 성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
◇ 진(秦)나라 사람들이 부역을 피해 동쪽으로 왔고, 최치원의 연(燕)나라와도 연관이 되는 곳에
탁수(涿水)가 있다. 진(秦)의 동쪽, 연(燕)나라의 변경에 해당하고, 낙랑(樂浪) 땅과도 연결되는 곳.
중국고금지명대사전 821쪽.
『涿水. 在京兆涿縣西. 源出直隸涿鹿縣涿鹿山, 逕縣境, 又南爲俠河. (水經注)涿水, 世亦謂桃水. (寰宇記)涿水源出范
陽縣西土山下…』
탁수는 경조현 서쪽에 있다. 직예성 탁록현 탁록산에 근원을 두고 있다.
경조현 경계를 지나 남으로 가면 협하가 된다.
수경주에서는 탁수라 하고, 보통 세간에서는 도수라 이른다.
환우기에는, 탁수는 범양현 서쪽 토산 아래 근원을 두고…
★ 남사(南史) 79권 이맥전(夷貊傳).
『新羅其事詳北史在百濟東南五十餘里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麗百濟接 魏時新盧 宋時新羅或曰斯羅 其國小不能
自通使聘…其俗呼 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亦中國之言郡縣也. 國有六啄評 五十二邑勒 土地肥美
宜植五穀多桑麻作縑布服 牛乘馬男女有別 其官名有子 襦旱支 壹旱支 齊旱支 謁旱支 壹吉支 奇貝旱支…』
신라에 대해서는 북사(北史)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신라는 백제의 동남 50여리에 있다. 그 땅은 동쪽으로 대해를 접하고 남북으로는 구려와 백제와 접하고 있다.
위(魏)나라 때 신로라고 했고, 송나라 때에는 신라 혹은 사라라고도 했다.
그 나라는 작아 스스로 사신을 파견할 정도가 되지 못했다.…
그 나라 풍속을 보면, 성(城)을 건모라하고 했다. 읍이 성 안에 있으면 탁평이라 했고,
성 밖에 있으면 읍륵이라 했는데, 중국의 군현에 해당한다.
나라에는 6개 탁평이 있고, 52개 읍륵이 있었다. 토지는 비옥했다. 오곡을 재배했고, 뽕나무와 마(麻)가 많았다.
합사 비단으로 옷을 해 입었다. 소와 타는 말이 있었고 남녀가 유별했다.
관명(官名)이 있었는데, 유한지(襦旱支)ㆍ일한지(壹旱支)ㆍ제한지(齊旱支)ㆍ알한지(謁旱支)ㆍ일한지(壹旱支)ㆍ
기패한지(奇貝旱支)이다…
★ 양서(梁書)에 의하면 ‘新羅辰韓亦曰秦韓相去萬里’라고 했다.
신라는 진한(辰韓)이다.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신라와 진한은 서로 1만 리나 떨어져있다고 했다.
신라가 진한에서 생겨났으나, 진한이 생겨난 곳으로부터 1만 리나 떨어진 곳에 신라가 건국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처음 하북성 탁수(涿水) 일대에서 진한이 생겨났으나, 서쪽으로 점차 이동해
신라가 건국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신라 땅에는 뽕나무가 많고, 일찍부터 신라 사람들이 귀한 비단으로 옷을 해 입었다는 사실이 남사(南史)와
여러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비단 생산국이다.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속집(續集) 권1 본문 113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新羅國有第一貴族金哥其遠祖名旁㐌. 有第一人甚有家財其兄旁㐌. 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묘乃求蠶穀種於
弟弟蒸而與之㐌不知也. 至蠶時有一蠶生焉. 目長寸餘居旬大如牛食數樹葉不足其弟知之. 伺間殺其蠶經曰四方百里
內蠶飛集其家國人謂之巨蠶意其蠶之王也…』
신라의 제일 귀족에 김가(金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먼 조상은 방이(芳㐌)이다.
그는 집의 재산에 대한 악착같기가 제일이라고 할만했다.
그 형은 방이로 인해 집에서 나가 걸식을 했다. 나라사람들이 남아도는 땅 1두를 주었다.
이에 동생에게서 누에와 곡식의 종자를 구했다.
동생은 쪄서 그에게 주었는데 방이는 이를 알지 못했다.
누에 칠 때가 되어 누에 한 마리가 살아났다. 눈 길이가 1촌쯤 되고 열흘쯤 되자 소처럼 커져 나뭇잎을
수없이 먹어치워도 부족했다. 그 동생이 이를 알고 그 누에를 죽일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날이 지날수록
사방 백리 안에 있는 누에들이 그 집으로 날아들었다.
나라사람들은 그를 거잠(巨蠶)이라 일컬었다. 누에의 왕이라는 뜻이다.
◇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은 당태종(唐太宗) 때 태상(太常)으로 있던 하성식(叚成式)이 지은 책으로
총 44권으로 되어있다. 이 글은 제1권 지낙고상(支諾皐上)편에 실려 있는데, 신라가 비단국이 된
비사(秘史)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비단을 짜서 서역과의 교역을 주도한 나라이다. 실크로드를 열었던 나라가 바로 신라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오직 비단국(Serica) 신라(Sina)만이 중원 대륙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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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나 이 조그만 한반도에 앉아 남이 쓴 글만 읽고 고대사를 추정해야 하나?
직접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고대사를 확인하고 싶다.
마음 준비는 되었는데 돈 준비가 안 되어 있어 로또를 살 뿐이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