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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제6권 / 세기(世紀) 6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8.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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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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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高句驪)는 혹 고려(高驪)라고도 되어 있으며, 동사(東史)에는
고구려(高句麗)라고 되어 있다. 대개 구려(句驪)라는 칭호는 고주몽(高朱蒙)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진한(秦漢) 시대에 이미 그 나라가 있었는데, 한 무제(漢武帝)가 멸망시키고 그 나라를 강등시켜 현(縣)으로
만들어서 현도군에 예속시켰다.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 갑신에 이르러서 고주몽이 비로소
옛 구려(句驪)의 땅에다가 나라를 세우고 이어 고구려(高句麗)라고 이름 하였다.
그렇다면 동방에 전후로 두 개의 구려란 나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해동의 여러 오랑캐와 구려(駒驪)의 족속들이 무왕(武王)이 상(商)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
《상서전(尙書傳)》
주이존(朱彜尊)이 말하기를,
“공안국(孔安國)이 《서전》 ‘뇌숙신지명(賄肅愼之命)’의 주(注)에서 이르기를, ‘해동의 구려(駒驪), 부여(扶餘),
한(馯), 맥(貊)의 족속들이 무왕이 상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서(周書)》
왕회편(王會篇)에는 ‘북쪽으로는 직신(稷愼)이 있고 동쪽으로는 예량(穢良)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구려나 부여란 명칭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구려 왕 주몽이 한 원제 건소 2년에 비로소
나라를 세웠는데 그 국호가 《동국사략(東國史畧)》에 실려 있다. 그러니 공안국이 조서를 받들고 《서전》을
지을 때에는 아마도 구려나 부여란 칭호의 나라가 중국에 통하지 않았을 듯한데, 하물며 무왕이 상을
이겼을 때이겠는가.”
하였다. 《경의고(經義考)》
○ 삼가 살펴보건대, 죽타(竹垞 주이존의 자(字)임)가 두 개의 구려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잘못 변증한 것이다.
○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북방대(北方臺)는 정동쪽의 고이(高夷)로 겸양(嗛羊)이었다. 《급총주서》
고이(高夷)는 동북쪽의 오랑캐로 고구려(高句驪)이다. 《급총주서주》
○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조선ㆍ예ㆍ맥(貉)ㆍ구려의 만이(蠻夷)에 설치하였다. 《한서》
○ 응소(應劭)의 주에는, “현도군 고구려현은 옛 구려호(句驪胡)이다.” 하였다.
○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1천 리에 있는데, 남쪽은 조선ㆍ예ㆍ맥(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인접하였으며, 땅이 사방 2천 리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은데, 백성들이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한다. 동이(東夷)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한다. 그러므로 언어와 법칙이 부여와
많이 같다. 무릇 다섯 부족이 있으니,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있다. 본래는 소노부가 왕이 되었으나 점차 미약하여져서 뒤에는 계루부가 대신 왕이
되었다.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는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에 속하게 한 다음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내려 주었다. 사람들의 성품은 급하고 기력(氣力)이 있으며, 전투에 익숙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옥저와 동예가 모두 이들에게 예속되었다. 《후한서》
○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는데, 스스로 선조는 주몽(朱蒙)이라고 말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다. 부여 왕이 하백의 딸을 붙잡아 실내에다 가두었는데, 햇빛이 비치므로 몸을 피하니 햇빛이
따라가서 비추었다. 그 뒤 얼마 후에 임신되어 닷되들이 만한 큰 알 하나를 낳았다. 부여 왕이 이를 내다
버려 개에게 주니 개가 먹지 아니하였고, 돼지에게 주니 돼지도 먹지 아니하였으며, 길바닥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해 갔다. 그 뒤 들에다 내다 버리니 뭇 새가 날아와 깃털로 그 알을 품어 주었다.
부여 왕이 그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어지지 않아 드디어 그 어머니에게 돌려보냈다. 그 어머니가 물건에
싸서 따스한 곳에 두었는데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이 아이가 자라나자 자(字)를 주몽(朱蒙)이라
하였는데, 당시 고구려의 속언에 주몽이란 활 잘 쏘는 자를 이른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반드시 이심을 품을 것이라 하여 제거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말을 치게 하였다. 주몽은 말을 치면서 남몰래 말의 좋고 나쁨을 시험하여, 준마는 먹이를
줄여 파리하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그러자 부여 왕이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파리한
말은 주몽을 주었다. 그 뒤에 들에 나가 사냥을 할 때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짐승 한 마리에 화살
한 개만을 쓰도록 주었는데, 주몽은 비록 화살 수가 적었으나 짐승을 매우 많이 잡았다.
이에 부여의 신하들이 또 죽이기를 꾀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너를 죽이려고 한다. 너는 재주와 지략이 있으니 멀리 떠나는 것이 옳다.” 하니, 주몽은
곧 오인(烏引)ㆍ오위(烏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도중에서 큰 강 하나를
만났는데,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고 부여 사람들은 매우 급히 추격하고 있었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해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지금 도망치는 중인데 추격하는 군사가 쫓아오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이 물을 건널 수 있겠는가?” 하니, 곧바로 어별(魚鼈)이 물 위로 떠올라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므로 주몽이 무사히 그 강을 건너게 되었다. 주몽이 다 건너자 어별이 흩어져 추격하던
기병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드디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마의(麻衣)를 입었고, 한 사람은 납의(衲衣)를 입었고, 한 사람은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살펴보건대, 《후주서(後周書)》에는 흘두골성(紇斗骨城)으로 되어
있다. 가서 거기에서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후위서》
○ 삼가 살펴보건대, 흘승골성은 바로 동사(東史)에서 말하는 졸본부여(卒本夫餘) 땅이다. 그 땅은
강계부(江界府)의 폐현(廢縣)인 여연(閭延)의 강 북쪽에 있다. 지지(地志)에 상세히 나온다.
고구려는 그 선조가 동명왕(東明王)으로부터 나왔는데, 동명왕은 본디 북이(北夷) 고리왕(橐離王)의
아들이다. 고리왕이 출행(出行)하였는데, 고리왕의 시아(侍兒)가 그 뒤에 임신하였다. 고리왕이 돌아와서는
죽이고자 하니, 시아가 말하기를, “앞서 하늘 위에서 무슨 기운 같은 것이 계란처럼 크게 뭉쳐 나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그 시아를 가두었는데, 뒤에 드디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아니하였다. 왕이
신기하게 여겨 그 어미에게 데려다 기르도록 허락하였다. 그 아이가 자라나면서 활을 잘 쏘므로 왕이 그
용맹을 꺼려 다시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이에 도망쳐 남쪽으로 가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어별(魚鼈)이 떼를 지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동명은 이를 타고 건넜다. 이어
부여(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그 뒤에 후손의 한 지파(支派)가 고구려의 종족이 되었다.
그 나라는 한(漢)나라의 현도군으로, 요동에서의 거리가 1천 리이며, 나라 가운데는 요산(遼山)이 있어서
요수(遼水)가 그곳에서 나온다. 《양서(梁書)》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명왕에 대한 일은 《후한서》 부여열전(夫餘列傳)에 이미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대개 동명왕은 고리국으로부터 도망하여 부여에 이르러서 왕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주몽(朱蒙)은
부여국으로부터 도망하여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서 살았다. 이들이 난을 피하여 도망을 치면서 물을
건널 때 어별이 다리를 놓아준 일은 서로 맞으나, 동명은 부여의 임금이고 주몽은 고구려의 임금이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이 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구려본기(句麗本紀)에는 이에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휘가 주몽(朱蒙)이다.”라고 하여 비로소 동명과 주몽을 합하여서 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시는 부여의 동명왕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하였다. 《양서(梁書)》에서 “동명이
처음에 부여에서 왕이 되었고 그의 후손 가운데 한 줄기가 별도로 고구려의 종자가 되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 성종조 때 시사(試士) 김천령(金千齡)이 고구려부(高句麗賦)를 지으면서
“동명이 혁혁한 기업을 열었고, 주몽이 그 여파를 계승하였네[東明啓其赫業 朱蒙承其餘波]”라고 하였는데,
이 설이 명확하다.
○ 고구려는 한나라 때에는 항상 현도군에 나와서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 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나아와
받아 가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 지역에다가 작은 성을 쌓고서 그 안에다가 조복과 의책을
놓아둔 다음 세시(歲時)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이 이 성을 책구루(幘溝漊)라고 한다.
《삼국지》
○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아내가 임신하였다. 주몽이 도망친 뒤에 한 아들을 낳았는데, 자(字)를
처음에는 여해(閭諧)라고 하였다. 성장한 뒤에 주몽이 도망가서 왕이 되었음을 알고는 그 길로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하고, 나랏일을 그에게 맡겼다. 주몽이 죽고 여달이 왕이
되었다. 여달이 죽자 아들인 여율(如栗)이 왕이 되었고, 여율이 죽자 아들인 막래(莫來)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하였다. 부여는 크게 패하여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막래의 자손들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후손
궁(宮)에 이르렀다. 《후위서》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세차(世次)가 동사(東史)와는 많이 어긋난다. 《삼국사기》 구려본기에 말하기를,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임신을 하였을 때 주몽은 고구려의 왕이 되어
있었다. 그 뒤에 예씨가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유리(類利)라고 하였다. 장성함에 미쳐 주몽에게 가서 태자가
되었다. 주몽이 졸하자 유리가 왕이 되었는데, 한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에 왕이 되었다.
이가 바로 유리왕(琉璃王)이다.” 하였으니, 여달(閭達)은 바로 유리(類利)이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유리가
졸하자 아들 무휼(無恤)이 왕이 되었으니, 이가 대무신왕(大武神王)으로, 신망(新莽) 천봉(天鳳) 5년(18)에
왕이 되었다. 5년에 부여를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무휼이 졸하자 그의 동생 해읍주(解邑朱)가 왕이 되니,
이가 민중왕(閔中王)이다. 한 광무제 건무(建武) 20년(44)에 왕이 되었다. 해읍주가 졸하자 대무신왕의 아들
해우(解憂)가 왕이 되니, 이가 모본왕(慕本王)이다. 건무 24년에 왕이 되었다. 해우가 졸하자 유리왕의
손자인 궁(宮)이 왕이 되니, 건무 29년에 왕이 되었다. 이가 태조왕(太祖王)이다.” 하였다. 이른바
여율(如栗)이니 막래(莫來)니 하는 이름은 지금 상고할 수가 없는데, 막래는 모본(慕本)이란 글자가 잘못된
것인 듯하다.
○ 구려는 큰물에 의지하여 나라가 일어났다. 서안평현(西安平縣)의 북쪽에 작은 강이 있어서 남해로
흘러들어 가는데, 구려의 별종이 이 작은 강에 의지하여 나라를 일으켰으므로 인하여 소수맥(小水貊)이라
이름하였다. 《삼국지》
○ 왕망(王莽)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니, 고구려 군사들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왕망이 억지로 보내니, 고구려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변방으로 나와 법을 어기고 노략질을 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그들에게 죽으니, 주군(州郡)에서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에게 살펴보건대, 추(騶)가 《삼국지》에는 도(騊)로 되어 있다. 그 허물을 돌렸다. 엄우(嚴尤)가 아뢰기를,
“맥인(貉人)들이 법을 어기는 것은 추(騶)로 인해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군(州君)으로 하여금 위안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대죄(大罪)를 가할 경우
그들이 드디어 배반할까 두렵고, 부여의 족속들 가운데 반드시 부화뇌동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현재 흉노(凶奴)를 이기지 못한 상황인데 부여와 예ㆍ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우환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이들을 위안하지 않았다. 이에 드디어 예ㆍ맥이 반란을 일으켰다. 왕망이 엄우에게
조서를 내려서 이들을 치게 하였다. 엄우가 고구려후 추를 꾀어서 국경 안으로 오게 하였다.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전하였다. 그러자 왕망이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지난번에 맹장(猛將)을 파견해 함께 천벌(天罰)을 행해 오랑캐를 주멸한 다음 그곳을 12부(部)로 나누었다.
그러고는 혹 오른팔을 자르기도 하고 왼쪽 겨드랑이를 베기도 하였으며, 혹 배를 가르기도 하고 혹 양쪽
어깨쭉지를 뽑기도 하였다. 금년에는 형(刑)이 동방(東方)에 있음에 장안(張晏)이 이르기를, “이해는
임신년으로, 형이 동방에 있었다.” 하였다. 먼저 맥(貊)의 부족을 치는 것이다. 오랑캐의 왕 추(騶)를 쳐 죽여
동방을 평정해 오랑캐들을 모두 멸망시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천지(天地)와 군신(群神),
사직(社稷), 종묘(宗廟)가 보우하신 복이며, 공경과 대부, 사민이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장수들이 용감하게
싸운 힘인 것이다.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이름을 고친 다음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가 알게 하라.”
하였다. 이에 맥족(貊族) 사람들이 더욱더 변경을 침범하였으며, 동북쪽과 서남쪽의 오랑캐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한서》
○ 《삼국지》에는, “고구려는 이때에 후국(侯國)으로 있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고구려사를 보면, 여러 왕 가운데 추(騶)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없다.
이는 유리왕(瑠璃王)으로, 유리(類利) 31년의 일이다.
○ 광무제 건무 7년 대무신왕 14년 12월에 고구려의 건(建)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후한서》
○ 8년 대무신왕 15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광무제가 그의 왕호를 회복시켜 주었다.
《상동》
○ 23년 민중왕(閔中王) 4년 겨울에 구려의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이 1만여 구를
이끌고 낙랑으로 와서 내속하였다. 《상동》
○ 25년 모본왕(慕本王) 2년 봄에 구려가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태원(太原)을 침입하였다.
살펴보건대, 본기(本紀)에는 이 일이 맥인들이 한 일로 기록하였다. 대개 소수맥(小水貊)과 구려가 같은
종족이므로 구려와 맥인을 매번 통칭한다.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부르니 모두 다시
통호(通好)하였다.
○ 선비(鮮卑)ㆍ만리(滿離)ㆍ고구려가 잇달아 와서 통호하면서 갓옷과 좋은 말을 바쳤는데, 광무제가 배나
되는 물품으로 상을 내려 주었다. 영평(永平) 연간에 제융의 위엄이 북방에 널리 퍼져 동쪽으로
현도ㆍ낙랑이 모두 와서 내부하여 들판에는 전쟁이 없었다. 이에 변경의 둔병(屯兵)을 모두 혁파하였다.
○ 그 뒤에 구려 왕 고궁(高宮)이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 능히 사물을 보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장성함에 미쳐서 용맹스럽고 튼튼하여 변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화제(和帝) 원흥(元興) 원년 태조왕 53년 봄에 고구려 사람들이 다시 요동에 침입하여 6개의 현을
노략질하자, 요동 태수 경기(耿夔)가 이를 격파하고 거수(渠帥)를 베었다. 《상동》
○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 태조왕 59년 고궁(高宮)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현도에 소속되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3월에 고궁이 예ㆍ맥과 함께 현도를 침입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 원초 5년 태조왕 66년고구려가 다시 예ㆍ맥과 함께 현도를 침입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후한서》
○ 건광(建光) 원년 태조왕 69년 정월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 태수 요광(姚光), 요동 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변경으로 가서 격파하였다. 《삼국지》에 “채풍과 요광이 고궁(高宮)이 끝내
두 군(郡)에 해가 된다고 여겨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강화(講和)하기를
청하자, 두 군이 진격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궁은 몰래 군사를 파견하여 현도성을 공격해서 후성(侯城)을
불살랐다.” 하였다. 예ㆍ맥의 거수(渠帥)를 쳐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노획하였다. 고궁이 이에 아들
고수성(高遂成)을 보내어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니, 고수성이 사신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요광 등이 이를 믿자 고수성이 이를 인하여 험한 곳에 웅거해 한의 대군을 차단하는
동시에, 몰래 3천 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해 성곽을 모두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었다. 이에 광양(廣陽)ㆍ어양(漁陽)ㆍ우북평(右北平)ㆍ탁군(涿郡) 등 속국(屬國)의 군사 3천여 기를
징발하여 함께 가서 구원하게 하였는데, 맥인들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 4월에 고궁이 다시 요동의 선비(鮮卑) 8천여 명과 요대(遼隊)를 요동의 속현(屬縣)이다.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이에 채풍 등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신창(新昌)에서 전사하였다. 공조(功曹)
경모(耿耗), 병조연(兵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호위하다가 함께
진중(陣中)에서 전사하니,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 《자치통감》 주에는, “이때에 선비가 이미 흉노의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이들을 도와
군사를 연합해 화란을 일으켰으므로 몰살된 것이다.” 하였다.
○ 12월에 고궁이 드디어 마한(馬韓)ㆍ예ㆍ맥의 군사 수천 기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주군(州郡)의 군사와 힘을 합해
토벌하여 격파하고, 고구려 군사 5백여 급을 참수하였다. 이해에 고궁이 죽고 아들 고수성(高遂成)이
즉위하였다. 요광(姚光)이 상언하여, 상(喪)을 틈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들 옳다고 하였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아뢰기를, “궁이 생전에 악독하였는데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뒤에 공격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사절을 보내어 조문(근조)하고, 지난날의
죄를 꾸짖은 다음 죄를 용서해 주어, 앞으로 그들이 착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안제(安帝)가 그 의견에 따랐다. 《이상 모두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사(高句麗史)에는, 태조왕(太祖王) 고궁은 한나라 광무제 건무(建武) 29년 계축에
즉위하여 환제(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에 모제(母弟) 고수성(高遂成)에게 선위하여 94년간 재위하였으며,
이 일은 고궁이 재위한 지 69년이 되는 해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사(漢史)에는 “이해에 고궁이
죽고 아들 고수성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한사와 동사(東史)에 기록된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 연광(延光) 원년(122) 동사(東史)의 연조(年條)는 상고할 수가 없다. 7월에 고구려가 항복하였다.
○ 고수성이 한나라의 포로들을 송환하고 현도군에 나아와서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리기를, “수성 등이
포학무도한 짓을 하였으니 그의 목을 자르고 젓을 담가 백성들에게 조리돌려 보이는 것이 마땅하나,
요행히 사면령(赦免令)이 내려진 때를 만나 죄를 빌며 항복을 청하였다. 그러나 선비ㆍ예ㆍ맥이 해마다
침입해 노략질하면서 백성들을 잡아간 숫자가 번번이 천 명이 넘었는데, 지금 겨우 수십 명만
돌려보내었으니, 이는 우리의 교화를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 고수성이
현관(縣官)들과 싸우지 않고 스스로 귀순하여 포로들을 돌려보내면, 그 숫자만큼 속전(贖錢)을 지급해 주되,
한 사람당 40필을 주고 어린이에 대해서는 반으로 쳐주라.”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차대왕(次大王) 고수성은 본초(本初) 원년에 즉위하였으니, 연광 원년과는 20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후한서》에서 이해의 일로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인 듯하다.
○ 질제(質帝)와 환제(桓帝) 연간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현(西安平縣)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대방 영(帶方令)을 죽였으며,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하였다. 《삼국지》
○ 환제(桓帝) 연희(延憙) 8년(165)에 고수성이 죽고 아들 고백고(高伯固)가 즉위하였다.
그 뒤에 예ㆍ맥이 모두 복속하여 동쪽 변경에 소요가 줄어들었다. 《후한서》
○ 삼가 살펴보건대, 구려사(句麗史)를 보면, 차대왕 고수성은 환제 연희 8년에 그의 신하인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되고, 그의 동생 고백고가 즉위하니, 이가 신대왕(新大王)이다.
그러니 한사(漢史)에 고백고를 고수성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연조(年條)가 맞지 않으므로 동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 환제(桓帝) 말기에 선비와 고구려의 후계자 고백고(高伯固)가 모두 한나라를 배반하여 노략질하였다.
사부(四府)가 모두 교현(橋玄)을 천거하여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삼고는 황월(黃鉞)을 주었다.
교현이 진(鎭)에 이르러서 군사들을 휴식시킨 다음 여러 장수(將守)들을 독려해 고백고 등을 토벌하니,
모두 격파되어 흩어져 달아났다. 직에 있은 지 3년 만에 변경이 안정되었다. 《상동》
○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 신대왕 5년 현도 태수 경림(耿臨)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수백 급을 참수하니,
고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예속되었다.
○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 웅거하자 고백고가 견가(犬加)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어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이상 모두 삼국지》
○ 삼가 살펴보건대, 이 조목에 대해 《삼국지》에는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고구려사에는 신대왕 5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지금 이에 의거하여 그해의 일로 기술하였다.
○ 희평(熹平) 연간에 고백고가 현도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 《상동》
○ 광화(光和) 2년(179)에 고백고가 죽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고발기(高拔奇)이고
둘째 아들은 고이이모(高伊夷模)였다. 고발기가 불초하자 나라 사람들이 고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고백고 때부터 자주 요동을 침입하고 또 망호(亡胡) 5백여 가를 받아들였다. 《상동》
○ 삼가 살펴보건대, 구려사에, “한나라 광화 2년에 신대왕(新大王)이 훙하자 둘째 아들
고이이모(高伊夷謨)를 왕으로 세우니 이가 바로 고국천왕(故國川王)이다.” 하였다. 《삼국지》에는
연차(年次)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동사(東史)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살펴보건대, 건안 원년(196)은 바로 고국천왕 18년이다.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출동하여 고구려를 격파하고 읍락을 불살랐다. 고발기(高拔奇)가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견가(犬加)와 더불어서 각각 하호(下戶) 3만여 구를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와서
항복하고 도로 비류수(沸流水)에 거주하였으며, 항호(降胡)들 역시 고이이모에게 반란하였다.
이에 고이이모가 다시 새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의 고구려가 있는 곳이 그곳이다. 고발기가 드디어
요동으로 갔는데, 구려국에 아들을 남겨 두고 갔는바, 바로 지금의 고추가(古雛加) 고교위거(高駮位居)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침입하자 현도가 요동과 힘을 합해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상동》
○ 고이이모가 아들이 없자 관노부(灌奴部)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고위궁(高位宮)이라
하였다. 고이이모가 죽자 고위궁이 왕이 되었는데, 바로 지금의 구려 왕 고궁(高宮)이다. 그의 증조인
고궁(高宮) 역시 나면서부터 능히 눈을 떠서 사물을 보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는데, 장성함에 미쳐서
과연 흉악하여 자주 침략하다가 마침내는 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다. 지금의 왕 역시 날 때 땅에
떨어뜨리자 눈을 떠서 사람을 보았다. 구려에서는 서로 비슷한 것을 ‘위(位)’라고 하는데, 그의 할아버지와
비슷하므로 위궁이라고 이름하였다. 고위궁은 용력(勇力)이 있었고 말을 잘 탔으며 사냥을 잘 하였다.
《상동》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구려사(句麗史)에는, 고국천왕의 이름은 고남무(高男武)이며, 일명
고이이모라고도 한다. 한나라 건안 2년(197)에 훙하자, 그의 동생인 고연우(高延優)가 즉위하였는데, 일명
위궁이라 하며, 바로 산상왕으로, 한나라 후제(後帝 촉한(蜀漢)의 후주(後主)를 말함) 건흥(建興) 5년(227)에
훙하였다. 처음에 산상왕이 아들이 없다가 뒤에 주통촌(酒桶村)의 여자를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고우위거(高憂位居)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여 동천왕이 되었다. 《삼국지》에 손권(孫權)이
선우(單于)로 삼은 것과 관구검이 환도(丸都)를 도륙한 것이 모두 동천왕에 있었던 일로, 왕의 이름을
분명하게 궁(宮)이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위궁(位宮)은 바로 동천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동사와 서로 다르게
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 손권(孫權) 가화(嘉禾) 2년에 동천왕(東川王) 7년 공손연(公孫淵)에게 사신을 보내었다. 공손연이 이에
앞서 백성들을 나누어 요동의 여러 현에다 두고, 중사(中使) 진조(秦朝) 등을 현도군에 안치하였는데, 진조
등이 현도 태수 왕찬(王贊)을 모살(謀殺)하려다가 도리어 왕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모두 성을 넘어서
달아나 고구려로 도망쳤다. 인하여 고구려 왕 고궁과 주부(主簿)에게 오왕(吳王)의 조서(調書)를 선포하면서
거짓으로 속이기를, “하사한 물품이 있었는데 요동에서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궁 등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조명(詔命)을 받았다. 그해에 고궁이 조의(皀衣) 25인을 보내 진조 등을
오나라로 송환하고 표(表)를 올려 칭신(稱臣)하며 초피(貂皮) 1천 매(枚)와 갈계피(鶡鷄皮) 10 구(具)를
공물로 바쳤다. 《상동》
○ 3년에 동천왕 9년 손권이 사자(使者) 사굉(謝宏), 중서(中書) 진순(陳恂)을 시켜서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고구려 왕 고궁을 선우(單于)로 책봉하고 의복과 진보(珍寶)를 더 하사하였다. 진순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하여 먼저 교위(校尉) 진봉(陳奉) 등을 보내어 미리 고궁을 알현하게 하였다. 그런데
고궁이 위(魏)나라 유주 자사(幽州刺史)의 밀지(密旨)를 받고는 오나라의 사신으로 하여금 자결하게 하려고
하였다. 진봉이 이 사실을 듣고는 도로 되돌아왔다. 이에 고궁이 주부(主簿) 착자(笮咨)와 대고(帶固) 등을
보내어 안평(安平)으로 가서 사굉과 만나 보게 하였는데, 사굉이 즉시 30여 명을 포박하여 인질로 삼았다.
고궁이 사죄하면서 말 1백 필을 바쳤다. 사굉이 이에 착자와 대고 등을 돌려보내고 조서와 하사 물품을
받들어서 고궁에게 주었다. 이때에 사굉이 탄 배가 작아서 말 80 마리만 싣고서 돌아왔다. 《상동》
○ 위 명제(明帝) 청룡(靑龍) 4년에 동천왕 10년 손권이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어서 고구려와 내통하여
요동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궁이 손권의 사신 호위(胡衛) 등의 수급을 참수하여 보내고
유주(幽州)로 나아왔다. 《상동》
○ 경초(景初) 2년에 동천왕 12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자, 고궁이 주부(主簿)와 견가(犬加)를 파견하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상동》
○ 제왕(齊王) 방(芳) 정시(正始) 3년에 동천왕 16년 고궁이 서안평(西安平)을 침입하였다. 《상동》
○ 5년에 동천왕 18년 유주 자사 관구검이 고구려가 자주 침입하여 배반한다는 이유로 제군(諸軍)의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독려하여 현도로 출병하였다. 그러고는 제도(諸道)를 따라 나가면서 토벌하였다.
이에 고구려 왕 고궁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로 나아가 주둔하여
갈구(梁口)에서 양(梁)의 음은 갈(渴)이다. 크게 싸웠다. 고궁이 잇달아 패해 달아나자 관구검이 이를
추격하였다. 살펴보건대,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추격하여 정현(頳峴)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관구검이
온갖 신고를 겪으면서 환도성(丸都城)에 올라가 고구려가 도읍한 곳을 도륙하여 1천여 급을 참획하였다.
처음에 고구려의 패자(沛者) 득래(得來)가 여러 번 고궁에게 간(諫)하였으나 고궁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득래가 탄식하기를, “곧바로 이 땅이 쑥밭이 되는 것을 보겠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어질게 여겼다. 관구검이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그 묘를 헐지 못하게 하고 그곳의 나무도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사로잡았으나 모두
놓아 보냈다. 고궁은 단신으로 처자식만을 데리고 도망쳤다. 관구검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상동》
○ 6년에 동천왕 19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고궁이 제가(諸加)만을 거느리고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치구루(置溝漊)이다. 관구검이 현도 태수 왕기(王頎)를 파견하여 추격하였다. 왕기가
옥저(沃沮) 땅 1천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공을 새겨 놓았다. 환도산(丸都山)에
이르러 새겨 놓았으며, 불내성(不耐城)에도 명(銘)을 새겨 놓았다. 여러 곳에서 죽이거나 항복받은 것이
8천여 구(口)였고, 공을 논하여 상을 받음에 후(侯)로 봉해진 자가 1백여 명이었다. 《상동》
○ 《진서(晉書)》에는, “강통(江統)이 말하기를, ‘정시 연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 형양(滎陽)의
부락에 그의 여종(餘種)을 이사시켜 놓았는데, 지금 1천여 명이나 되니, 몇 대가 지난 뒤에는 반드시 크게
불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하였다.
○ 그 뒤에 다시 중국과 통하였다. 《양서(梁書)》
○ 진 회제(晉懷帝) 영가(永嘉) 연간에 발해(渤海) 사람 고무(高撫)와 형 고고(高顧)가 난을 피하여 고구려로
도망쳐 왔다. 《후위서(後魏書)》
○ 처음에 영가 연간의 난리에 선비(鮮卑) 모용외(慕容廆)가 창려(昌黎)의 대극성(大棘城)을 차지하자
원제(元帝)가 평주 자사(平州刺史)를 제수하였다. 구려 왕 고을불리(高乙弗利)가 요동을 자주 침입하였는데,
모용외가 제압하지 못하였다. 《양서》
○ 원제(元帝) 태흥(太興) 2년 미천왕 20년 평주자사 동이교위(平州刺史東夷校尉) 최비(崔毖)가 백성들을
끌어 모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망(流亡)하는 자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최비는 모용외가 이들을
구류(拘留)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와 우문(宇文)ㆍ단국(段國) 등과 교결해 모용외를 정벌한 다음 그
지역을 나누어 가지기로 모의하였다. 삼국이 모용외를 치자, 모용외가 성문을 닫고 맞서 싸우지를 않으면서
우문씨에게 사신을 파견해 소와 술을 보내어 대접하였다. 그러면서 군사들에게 큰소리로 말하기를, “최비가
어제 사신을 보내왔다.” 하였다. 이에 두 나라는 우문씨를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실독관(宇文悉獨官)이 혼자서 자신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모용외의 성을 공격하였다. 모용외가 드디어
우문실독관을 대파하고는 그의 군사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최비는 모용외가 자신을 원수로 여길 것을
두려워하여 형의 아들 최도(崔燾)를 시켜 모용외에게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도록 하였다. 그때에 세 나라
사신도 또한 이르러 강화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라 최 평주(崔平州)가 시킨 것이다.”
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데리고 가 포위해서 공격한 지점을 보여 주며 병기로 위협하면서 말하기를, “너의
숙부가 세 나라를 사주해서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째서 거짓으로 와서 나를 축하하는가.”
하자, 최도가 두려워서 모두 자백하였다. 모용외가 이에 최도를 돌려보내었다. 그러고는 군사들을 이끌고
뒤를 쫓으니, 최비는 기병 수십 명과 함께 집을 버리고 고구려로 도망쳤다. 남아 있던 그의 무리는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진서》
○ 고구려의 장수 여노자(如奴子)가 하성(河城)에 웅거하니,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불의에 습격해
이를 사로잡고 그의 무리 1천여 호를 포로로 하였다.
○ 고구려가 자주 군사를 내어 요동을 치니, 모용외가 모용한(慕容翰)ㆍ모용인(慕容仁) 살펴보건대,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친 뒤에 모용외가 그의 아들 모용인을 시켜 요동을 진무하게 하였다. 등을 보내 토벌하였다.
고구려 왕 고을불리(高乙弗利)가 순순히 받아들이며 화평을 청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마침내 돌아갔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3년에 미천왕 21년 고구려가 요동을 침입하였는데, 모용인(慕容仁)이 그와 싸워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로부터는 감히 모용인의 국경을 범하지 못하였다. 《상동》
○ 성제(成帝) 함화(咸和) 6년(331) 고구려 왕 고을불리가 죽고 고쇠(高釗)가 대신 왕이 되었다. 《양서》
○ 살펴보건대, 구려사(句麗史)에는 “미천왕 고을불리가 진 성제 6년 신묘에 훙하자, 태자 사유(斯由)가
즉위하였는데, 이가 바로 고국원왕이다.” 하였다. 쇠(釗)는 사유의 절음(切音)인 듯하다. 고국원왕이 즉위한
해를 《양서》에서는 드러내어 적지 않았으므로 지금 동사에 따라서 바로잡는다.
○ 삼가 살펴보건대, 《수서(隋書)》에 “고구려 왕 고위궁의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昭列帝)라 하는데,
모용씨(慕容氏)에게 격파되었다.” 하였는데, 고국원왕의 이름을 소열제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 함강(咸康) 2년 고국원왕 6년 2월 경신에 고구려 왕이 진(晉)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 《진서》
○ 《설수원경전(薛收元經傳)》에는, “고구려가 방물을 바쳤다. 동이가 배를 타고 온 것이다. 이때에 모용외가
요동에서 선우(單于)라고 칭하면서 동이 교위(東夷校尉) 최비(崔毖)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최비가
고구려와 함께 모용외를 정벌하였으나 모용외에게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갔다. 고구려가 와서 조공을 바친
것은 모용외를 두려워해서 중국에 붙으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연(燕)의 모용황(慕容皝)이 모용인(慕容仁)을 평곽(平郭)에서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모용인의 장수 동수(佟壽)ㆍ곽충(郭充)이 고구려로 도망갔다. 《자치통감》
○ 3년 《자치통감》에는 5년으로 되어 있다. 고국원왕 7년 연왕 모용황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군사가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고구려 왕 고쇠가 동맹을 요청하자, 되돌아왔다. 다음 해에 고쇠가 세자를 보내어
모용황에게 조알하였다. 《진서》
○ 4년에 고국원왕 8년 조왕(趙王) 호(虎)가 연을 정벌하니, 연나라 사람들이 두려워서 떨었다. 연의 거취
영(居就令) 유홍(游泓), 동이 교위(東夷校尉) 봉추(封抽), 호군(護軍) 송황(宋晃) 등이 모두 호(虎)에게
내응하였다. 그러나 조나라 군사가 크게 패함에 미쳐서 연왕 모용황이 군사를 나누어 반란을 일으킨 여러
성을 토벌하였다. 이에 봉추ㆍ송황ㆍ유홍 세 사람이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 조왕 호가 배 3백 척으로 곡식 30만 곡(斛)을 운반하여 고구려로 찾아갔다. 그러고는
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 왕전(王典)으로 하여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닷가에서 둔전(屯田)을
일으키게 하여 연을 칠 것을 꾀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7년에 고국원왕 11년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삼고 평곽(平郭)을
진무하게 하였다. 모용각이 백성들을 잘 어루만지면서 여러 차례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자, 고구려가
두려워서 감히 국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상동》
○ 8년 고국원왕 12년 10월에 연왕 모용황이 도읍을 용성(龍城)으로 옮겼다. 건위장군(建威將軍)
모용한(慕容翰)이 모용황에게 말하기를,
“우문씨가 강성해진 지 오래여서 누차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문일두귀
(宇文逸豆歸)가 나라를 찬탈하여 백성들이 귀부하지 않고 있으니, 지금 만약 이들을 공격할 경우 백 번
치면 백 번 다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 항시 기회를 엿보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고구려에서 우문씨가 이미 망하여서 화가 장차 자신들에게 미칠 것을 알 경우, 반드시 빈틈을 노려
나라 깊숙이 쳐들어와 우리나라에서 방비하지 않고 있는 틈을 타 습격할 것입니다. 군사를 국내에 조금만
남겨 둘 경우에는 나라를 지킬 수가 없고, 많은 군사를 많이 남겨 둘 경우에는 정벌할 군사가 부족할
것이니, 이는 뱃속에 든 우환거리로, 먼저 이를 제거하여야만 합니다. 그들의 세력으로 볼 때 일거에 이길
수가 있으며,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고 있는 우문씨의 군사들은 반드시 멀리까지 와서 이익을 다투지는
않을 것입니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다음에 다시 우문씨를 취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입니다.
두 나라가 이미 평정되어 동해(東海)의 이익을 모두 우리나라에서 독차지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군사가
강해져서 뒤를 돌아다볼 걱정이 없어진 다음에야 중원(中原)을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모용황이 말하기를,
“좋다. 고구려를 치겠다.”
하였다. 고구려로 진격하는 길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북쪽 길은 북치(北置)에서 나가고, 남쪽 길은 남협(南陜)으로부터 목저성(木底城)으로 들어간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평탄한 북쪽 길을 따라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모용한이 말하기를,
“고구려에서는 일반적으로 헤아려 보고는 반드시 대군이 북쪽 길을 따라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을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병을 이끌고 남쪽 길을 따라
공격하여 그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때 치면 환도(丸都)는 취하려고 애쓸 것도 없을 것입니다.
고구려 왕이 환도에 있었다. 그런 다음 따로 일부의 군사를 북쪽 길로 내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 복심(腹心)이 이미 무너졌으니 사지(四肢)를 움직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모용황이 이를 따랐다. 11월에 모용황이 친히 경병(勁兵) 4만 명을 거느리고 남협으로부터 침입하니,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을 파견하여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나가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 왕 고쇠는 과연 아우인 고무(高武)를 파견하여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북쪽 길을 막게 하고, 자신은 약졸(弱卒)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비하였다. 모용한
등이 먼저 이르러 고구려 왕 고쇠와 교전하였는데, 모용황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뒤를 이어 왔다.
좌상시(左常侍) 선우량(鮮于亮)이 말하기를,
“신이 포로로서 왕께서 국사(國士)로 대우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바로 신이 목숨을 바칠 날입니다.”
하고는, 혼자서 몇 기(騎)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진으로 쳐들어가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적들이 모두
무너지면서 고구려 진이 크게 혼란에 빠졌다. 군사들이 이를 틈타서 쳐들어가자, 고구려 군사가 크게
패배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를 죽이니,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몰아 추격해서 드디어 환도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쇠가 단기(單騎)로 달아났다.
경거장군(輕車將軍) 모여니(慕輿埿)가 추격하여 고구려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처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이때 마침 왕우(王寓) 등이 북쪽 길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말미암아 모용황은 끝까지
추격하지 아니하고,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오지 아니하였다. 모용황이 돌아가려 할
즈음에 한수(韓壽)가 말하기를,
“고구려의 땅을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왕이 도망하고 백성은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고
있으나, 대군이 떠나고 나면 반드시 다시금 한데 모여 남은 무리들을 수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후환거리가 될 것이니, 그 아비의 시체를 싣고 그 생모(生母)를 포로로 잡아갔다가 고구려 왕이 제 몸을
묶고 스스로 귀복하여 오기를 기다린 연후에 이를 돌려주고 은혜와 신의로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니, 모용황이 그 말을 따라 고쇠의 아버지인 고을불리(高乙弗利)의 묘를 파헤쳐 그 시체를 싣고,
부고(府庫)에 있는 누대(累代)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포로로 하고, 궁성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파괴한 뒤 돌아갔다. 《상동》
○ 강제(康帝) 건원(建元) 원년 고국원왕 13년 2월에 고구려 왕 고쇠가 그의 동생을 보내어 연나라에 대해
신하라고 칭하면서 연에 조알하였는데, 진기한 물품 1천여 가지를 바쳤다. 연왕 모용황이 이에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보내었으나 어머니 주씨를 머무르게 해 볼모로 삼았다. 《상동》
○ 위나라 건국(建國) 7년에 고국원왕 14년 모용황이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를 정벌하였다. 우문일두귀가
모용황에게 패하고 멀리 막북(漠北)으로 달아났다가 드디어 고구려로 달아났다. 《후주서(後周書)》
○ 진 목제(晉穆帝) 영화(永和) 원년 고국원왕 15년 10월에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남소(南蘇)를 남소성은 남협(南陜)의 동쪽에 있는데,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뒤에
남소주(南蘇州)를 두었다. 함락하고 수병(戍兵)을 두고서 돌아갔다. 《자치통감》
○ 5년에 고국원왕 19년 고구려 왕 고쇠가 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으로 송환하니, 연왕
준(雋)이 송황을 사면하고 이름을 고쳐 송활(宋活)이라고 한 다음 중위(中尉)를 제수하였다. 《상동》
○ 11년 고국원왕 25년 12월에 고구려 왕 고쇠가 연에 사신을 보내 볼모를 바치고 조공을 보내면서
어머니 주씨를 석방해 줄 것을 간청하니, 연왕 준(雋)이 이를 허락하고는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勺龕)을
시켜 고구려 왕 고쇠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고쇠를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征東大將軍營州刺史)에 제수하고 낙랑공(樂浪公)에 봉하였으며, 왕의 칭호는 전대로 두었다. 《상동》
○ 해서공(海西公) 5년에 고국원왕 40년 부견(苻堅)이 업성(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모용위(慕容暐)가
도망치자, 부견의 장수 곽경(郭慶)이 이를 잡아 보내었고, 남은 무리들을 끝까지 추격하였다.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곽경이 이를 추격하여 요해(遼海)에 이르니, 고구려에서 모용평을
포박하여 보내었다. 《진서》
○ 모용원진(慕容元眞)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환도성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위의 함강(咸康) 8년 기사에
보인다. 이 뒤로부터 고구려 왕 고쇠가 사신을 보내어 조알하였으나, 원수에게 가로막혀서 직접 오지는
못하였다. 고쇠는 그 뒤에 백제에게 살해당하였다. 《후위서》
○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고국원왕 41년에 백제가 침공해 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훙하였다.” 하였다.
○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0년 고국양왕 2년 6월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공해서 드디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켰다. 이로부터 연이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였다.
○ 11월에 모용농(慕容農)이 용성(龍城)에 이르러서 고구려를 공격해 다시 요동과 현도 두 군을 수복하였다.
그전에 유주(幽州)와 기주(冀州) 지방의 유민(流民)들이 많이 고구려에 들어가 살았는데, 모용농이
표기사마(驃騎司馬) 범양(范陽)ㆍ방연(龐淵)을 요동 태수로 삼고 그들을 불러 안무(安憮)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이해의 사실은 사군사실조(四郡事實條)에 상세하게 보인다.
○ 모용보(慕容寶)가 즉위하여 고구려 왕 고안(高安)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ㆍ대방 두 나라 왕에
봉하였다. 고안이 비로소 장사(長史)ㆍ사마(司馬)ㆍ참군(參軍) 등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뒤에는 요동군을
경략하였다. 《양서》
○ 살펴보건대, 모용보는 진 효무제(晉孝武帝) 태원(太元) 21년(396)에 참호(僣號)를 써서 즉위하였으니,
바로 광개토왕 5년이다.
○ 위(魏)나라 태조 천흥(天興) 원년 광개토왕 7년 정월에 고구려의 잡이(雜夷)를 옮겨 경사(京師)를 채웠다.
《후위서》
○ 진나라 안제(安帝) 융안(隆安) 4년에 광개토왕 9년 고구려 왕 고안이 연을 섬기는 태도가 거만하자,
2월 병신에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스스로 3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하였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煕)로 선봉(先鋒)을 삼아 신성(新城)과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방으로, 서남쪽으로는
산동(山東)과 가까이 있고, 북쪽은 남소(南蘇)ㆍ목저(木底) 등의 성과 접하였다. 남소 두 성을 빼앗은 다음,
7백여 리의 땅을 개척하여 5천여 호를 이주(移住)시키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원흥(元興) 원년 광개토왕 11년 5월에 고구려가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니, 연의 평주 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상동》
○ 3년 광개토왕 13년 12월에 고구려가 연을 침입하였다. 《상동》
○ 의희(義煕) 원년에 광개토왕 14년 고구려가 연의 군(郡)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였다. 연왕
모용희(慕容煕)가 고구려를 쳤는데 황후(皇后) 부씨(苻氏)를 따라오게 하고는 충거(衝車)와 지도(地道)를
만들어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였다. 성이 거의 함락될 무렵에 모용희가 말하기를, “원수의 성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고서 짐(朕)이 황후를 데리고 연(輦)을 타고 들어가겠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지 못한
장사들이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이로 인해 성안에서 굳게 방비한 탓에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때 마침 눈이 크게 내려서 사졸들이 많이 죽었다. 이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진서》
○ 2년에 광개토왕 15년 연왕 모용희가 거란(契丹)을 습격하였다. 정월에 경북(陘北)에 이르렀는데, 거란의
군사가 두려워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황후 부씨가 말을 듣지 않았다. 무신(戊申)에 드디어 치중(輜重)을
버리고 경병(輕兵)으로 고구려를 습격하였다. 2월에 연나라 군사가 3천여 리를 행군하였는데, 군사와 말이
피로해지고 얼어 죽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4년 광개토왕 17년 3월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북연(北燕)에 조빙하였으며, 또 종족(宗族)의 의를
폈다. 북연의 왕 모용운(慕容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그에 보답하였다. 처음에 연왕
모용보(慕容寶)가 고운(高雲)을 건위장군(建威將軍)으로 삼고 석양공(夕陽公)에 봉한 다음 양자로 삼았는데,
고운은 고구려의 지속(支屬)이다. 《진서》에 “고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지서(支庶)인데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고 하므로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고구려를 격파한 다음
청산(靑山)으로 옮겨 살게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대대로 연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고운은 신중하고
말수가 적어 사람들이 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풍발(馮跋)만은 그의 뜻과 기국을 기이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서 친구가 되었다. 연왕 모용희가 음탕하고 잔학하자 풍발이 고운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모용희를 잡아 죽였다. 고운은 천왕(天王)의 자리에 올라 성씨를 다시 고씨로 고쳤다. 《상동》
○ 9년에 장수왕 원년 고구려 왕 고련(高璉)이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자백마(赭白馬)를 바치었다. 고구려 왕 고련을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고구려 왕
낙랑공(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으로 삼았다. 《송서》
○ 살펴보건대, 고구려가 중국에서 책명(册命)을 받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 10년에 장수왕 2년 연왕 풍발(馮跋)의 동생 풍비(馮丕)가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에 있었는데,
풍발이 불러서 좌복야(左僕邪)로 삼고 상산공(常山公)을 봉하였다. 《자치통감》
○ 송(宋) 영초(永初) 원년에 장수왕 8년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구려 왕 낙랑공(使持節都督營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麗王樂浪公)
고련(高璉)이 바다 바깥에서 의리를 지키면서 멀리까지 와 공물을 바쳤다. 정사를 새로 펴면서 연호를
제정하였으니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고구려 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삼고,
지절 도독(持節都督) 및 왕공(王公)의 칭호는 그전대로 두도록 하라.”
하였다. 《송서》
○ 3년에 장수왕 10년 고련에게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가하고 평주제군사(平州諸軍事)를 더하였다. 《상동》
○ 소제(少帝) 경평(景平) 2년에 장수왕 12년 고구려 왕 고련이 장사(長史) 마루(馬婁) 등을 보내 대궐에
나와 방물을 바쳤다. 이에 송나라에서도 알자(謁者) 주소백(朱邵伯)과 부알자(副謁者) 왕소자(王邵子) 등을
보내어 조서를 조서는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내려 위로하였다. 《상동》
○ 위 세조(魏世祖) 때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이때는 바로 세조 태연(泰延) 원년(435)으로 장수왕
23년이다. 고구려 왕 고쇠(高釗)의 증손자 고련이 비로소 사신을 안동(安東)으로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방물을 올렸으며, 아울러 국휘(國諱)도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위(魏)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어
황제의 세계(世系)와 국휘를 기록하여 그 나라로 보내 주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어 고련에게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 왕
(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제배하였다. 이오가 고구려 왕이 있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가지 사정을 탐방하고는 말하기를, “요동에서 남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작은 바다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옛
부여(夫餘)에 이른다. 백성들의 호구 수는 전위(前魏) 때에 비해 3배에 이르며, 지역이 동서는 2천 리이고,
남북은 1천여 리이다.” 하였다. 그 뒤로는 공물을 바치는 사신이 서로 잇달아 해마다 황금 2백 근,
백은(白銀) 4백 근을 바쳤다. 《후위서》
○ 송 문제(宋文帝) 원가(元嘉) 12년 장수왕 23년 6월 무신에 위나라에서 낙평왕 비(樂平王丕),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도하(徒何), 굴원(屈垣) 등에게 명하여 연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연나라가 날로
위태로워지자 태상(太常) 양민(陽㟭)이 다시 연왕에게 속히 태자를 보내어 입시하게 하라고 권하니, 연왕이
말하기를,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 만약 일이 급하게 될 경우 동쪽으로 가 고구려에 의지하였다가 후일을
도모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양민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신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잘 지내지만 끝내는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연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몰래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고구려에 보내 자신을 맞이해
주기를 청하였다. 《자치통감》
○ 13년 장수왕 24년 2월에 연왕이 위에 들어와 조공하면서 시자(侍子)를 보내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위나라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고 하였다. 임진에 사자 10여 명을 파견하여
동방의 고구려 등 여러 나라로 가서 고유(告諭)하게 하였다. 연왕의 죄를 고유하여 그들로 하여금 연나라와
통하지 못하게 하고, 혹 도망칠 경우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 3월 신미에 위나라 평동장군(平東將軍) 아청(娥淸)과 안서장군(安西將軍) 고필(古弼)이 정예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 4월에 고구려가 장수 갈로(葛盧)와 살펴보건대, 갈로는 《위서(魏書)》 본기(本紀)에는 갈만로(葛蔓盧)로
되어 있으며, 《북사》에는 갈거로(葛居盧)로 되어 있다. 맹광(孟光)을 보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陽伊)와 함께 화룡(和龍)에 이르러 연왕을 맞이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임천(臨川)에 주둔하였다.
연의 상서 영(尙書令) 곽생(郭生)이 백성들이 옮겨 가는 것을 꺼림을 인하여 성문을 열고 위나라의 군사를
불러들였는데, 위나라 군사들이 의심하고서 들어가지 않았다. 곽생이 드디어 군사를 정돈하여 연왕을
공격하였다. 이에 연왕이 고구려의 군사를 이끌고 동쪽 문으로부터 들어가 궁궐 아래에서 곽생과 싸웠는데,
곽생이 유시에 맞아 죽었다. 갈로와 맹광이 성안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떨어진 옷을 갈아입도록
하고 연나라 무기 창고에서 날카로운 무기를 가져다가 나누어 주고는 성안을 크게 노략질하였다.
○ 5월에 연왕이 용성(龍城)에 있는 호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우니, 불이 열흘 동안
꺼지지 아니했다. 부인들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서 중간에 있게 하고, 양이 등이 정예로운 군사를 정돈하여
밖에 있게 하고,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뒤에 있게 한 다음 잇따라 나아갔는데, 앞뒤가 80여 리에
뻗쳤다. 《이상 모두 상동》
○ 살펴보건대, 《북사》 고필열전(古弼列傳)에는, “고필의 부장 고구자(高苟子)가 적군(賊軍)을 치려고 하자
고필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 중지시켰으므로 풍홍(馮弘)이 달아날 수가 있었다.” 하였다.
○ 풍문통(馮文通)이 요동에 이르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께서 멀리 야차(野次)에 나오시느라 군사와 말이 얼마나 피로하셨습니까?” 하니, 풍문통이
부끄럽고 화가 나 ‘제(制)’라 칭하면서 답하여 사양하였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평곽(平郭)에 있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북풍(北豐)으로 옮겨 있게 하였다. 풍문통은 본시 고구려를 업신여겼으나, 고구려의 정사와 형법
및 상주고 벌주는 것이 자기 나라와 같았다. 고구려에서는 그를 시종하던 사람들을 빼앗고 그의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데려다 볼모로 삼았다. 그러자 풍문통이 분하게 여겨 남쪽으로 도망치려고 도모하였다.
《후위서》
○ 무오(戊午)에 위나라 임금이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연왕을 잡아
보내라고 하였다.
○ 9월에 고구려가 위나라로 연왕을 잡아 보내지 않으면서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풍홍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위나라 임금이 고구려 왕이 조명(詔命)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치기로 의논하고, 농우(隴右)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다. 이때 낙평왕(樂平王) 비(丕)가 말하기를,
“화룡(和龍)이 새로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여 군비를 풍부히 한 뒤에 나아가
취하면 고구려를 일거에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위나라 임금이 출병을 중지하였다. 《자치통감》
○ 15년이다. 장수왕 26년 이에 앞서 의희(義煕 동진 안제(安帝)의 연호임) 초에 모용희(慕容煕)가 그의
부하인 풍발(馮跋)에게 살해되었는데, 풍발이 스스로 서서 임금이 되고는 스스로 연왕이라고 칭호하였다.
풍발이 죽자 그의 아들 풍홍(馮弘)이 즉위하였는데, 태조(太祖) 때에 매번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그 뒤 색로(索虜)에게 공격당하자 풍홍이 패하여 고구려 북풍성(北豐城)으로 달아나서 표문을 올려 맞아
주기를 구하니, 태조가 사자 왕백구(王白駒)ㆍ조차흥(趙次興)을 보내 풍홍을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고구려로 하여금 풍홍을 도와서 보내 주도록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련은 풍홍을 남조(南朝)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 장수 손수(孫漱)ㆍ고구(高仇) 등을 보내어 풍홍을 습격하여 죽였다. 살펴보건대, 《후위서》에
“태연(太延) 4년(438) 3월에 고구려가 풍문통의 자손들을 살해하였는데, 한꺼번에 죽은 자가 10여
명이었다.” 하였고, 《통감》에는 “고구려에서 풍홍의 시호(諡號)를 소성황제(昭成皇帝)라고 하였다.” 하였다.
이에 왕백구 등이 거느리고 온 군사 7천 명으로 손수 등을 엄습해서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고구려 왕 고련이 왕백구 등이 함부로 죽였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 붙잡아서 송에 보내니, 송나라 임금이
멀리 있는 나라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 왕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풀어 주었다.
《송서》
○ 16년에 장수왕 27년 고구려 왕 고련이 매년마다 사신을 보내었다. 태조가 북방을 토벌하고자 하여
고련에게 조서를 내려 말을 보내라고 하니, 고련이 말 8백 필을 바쳤다. 《상동》
○ 세조 효건(孝建) 2년에 장수왕 43년 고구려 왕 고련이 장사(長史) 동등(董騰)을 보내어 국상(國喪)의
2주기를 조문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상동》
○ 대명(大明) 7년 장수왕 51년 7월 을해에 조서를 조서는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내려 고구려 왕
고련에게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를 가하고, 지절ㆍ상시ㆍ도독(持節常侍都督) 및
왕공(王公)의 칭호는 예전대로 하도록 하였다. 《상동》
○ 명제(明帝) 태시(泰始) 3년에 장수왕 55년위(僞)나라의 동래 태수(東萊太守) 국연승(鞠延僧)이 그의 무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에 웅거하여 공물을 바치러 오는 고구려의 사신을 억류하였다. 이때에
유회진(劉懷珍)이 동해(東海)에 있으면서 영삭장군(寧朔將軍) 명경부(明慶符)와 용양장군(龍驤將軍)
왕광지(王廣之)를 보내어 국연승을 쳐서 항복시키고 고구려의 사신을 경사(京師)로 보내었다. 《남제서》
○ 태종 태시(泰始) 연간과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연간에는 공물을 바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송서》
○ 위 효문제(魏孝文帝) 연흥(延興) 원년 장수왕 59년 9월에 고구려 백성 노구(奴久) 등이 서로 이끌고 와서
항복하자, 각각 전택(田宅)을 하사하였다. 《후위서》
○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구려 왕 고련에게 조칙을
내려 딸을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고련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나의 딸은 이미 출가하였기에 동생의 딸
중에서 골라 보내어 조칙에 응하겠습니다.” 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상서(尙書) 이부(李敷) 등을 파견하여 국경까지 가서 예물을 고구려에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고련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중국 조정에서는 지난날에 풍씨(馮氏)와 혼인을 맺었다가 얼마 뒤에 풍씨의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은감(殷鑑)이 멀지 않으니 적당한 핑계를 대어 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고련이 이들의 말에 현혹되어, 마침내 글을 올려 동생의 딸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가 속이는 것이라 의심하여 또다시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어 심하게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만약 동생의 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다시 종친의 딸 가운데서 뽑아 보내어도 된다.” 하였다.
그러자 고련이 “만약 천자께서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면 삼가 조칙을 받들겠다.” 하였다. 그런데
마침 현조가 붕어하여 그 일이 중지되었다. 《상동》
○ 《북사》에는, “정준(程駿)이 연흥(延興) 말기에 사신이 되어 고구려 왕의 조카딸을 맞이하러 고구려로
갔다. 정준이 평양성에 이르자 어떤 자가 고구려 왕 고련에게 권하기를, ‘위나라는 예전에 연나라와 혼인을
맺고서도 얼마 있다가 연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는 사신이 연나라의 험하고 평탄함에 대해서 낱낱이
고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조카딸을 보내면 아마도 풍씨(馮氏)가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련이 조카딸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정준이 한 해가 넘도록 고구려 왕과
왕복하면서 의리를 들어 책하자, 고구려 왕이 분을 못이겨 정준의 부하들에게 내리는 주식(酒食)을 끊어
핍박하고자 하였으나, 위나라를 꺼려서 감히 해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 헌문제(獻文帝)가 죽어 정준이
돌아왔다.” 하였다.
○ 태화(太和) 원년에 장수왕 65년물길국(勿吉國)이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날의 숙신국(肅愼國)이다.
이해에 사신 을력지(乙力支)를 보내어 조공을 바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먼저 고구려의 열 부락을 격파한 다음 비밀히 백제(百濟)와 모의하여 수도(水道)를 따라서
서로 힘을 합쳐서 고구려를 취하고자 합니다. 이에 을력지를 파견하여 대국에 사신으로 보내니, 그에 대한
가부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조칙을 내리기를,
“세 나라는 모두 우리의 번국(藩國)이니 서로 잘 지내면서 침범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을력지가 이에 돌아갔다. 《문헌통고》
○ 3년에 장수왕 67년 고구려에서 몰래 유유(蠕蠕)와 더불어서 모의해 지두간(地豆干)을 취하여 나누어
가지기로 하였다. 거란(契丹)에서는 그들의 침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부락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와서 내부(內附)하였다. 《후위서》
○ 제(齊) 태조 건원(建元) 2년 장수왕 68년 4월 병인에 고려왕 낙랑공 고련(高璉)의 칭호를 올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하였다. 《남제서》
○ 위 고조 때 고구려 왕 고련이 바치는 공물이 전에 비해 배로 늘었고, 그에 대해 보답으로 내리는 것도
점점 불어났다. 이때에 광주(光州)의 관리가 고구려 왕 고련이 숙도성(肅道成)에게 파견한 사신 여노(餘奴)
등을 바다에서 잡았다. 이에 고조가 조서를 조서는 예문지(藝文志)에 상세하게 나온다. 내려 고련을
꾸짖었다. 《후위서》
○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장수왕 68년 4월에 남제에서 왕에게 표기대장군을 책봉하였다.
이에 왕이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어 들어가서 사례하게 하였는데, 광주(光州)의 바다에 이르러서
위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하였다.
○ 제 건원(建元) 3년에 장수왕 69년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는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사신이 항상 왕래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서쪽으로 위(魏) 오랑캐의 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어서 위
오랑캐의 나라에도 역시 사신을 보내었지만, 세력이 강성하여 위 오랑캐 나라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 위
오랑캐 나라에서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묵는 관저를 지었는데, 제나라 사신의 관저가 가장 크고, 고구려가
그다음이었다. 《남제서》
○ 무제(武帝) 영명(永明) 7년에 장수왕 77년 평남 참군(平南參軍) 안유명(顔幼明)과 용종복야(冗從僕射)
유사효(劉思斅)가 위 오랑캐의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위 오랑캐 나라의 초하룻날 조회에서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이에 안유명이 위 오랑캐 나라의 주객랑(主客郞) 배숙령(裴叔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중국 천자의 명을 받고 경의 나라에 왔다. 우리와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오로지 위나라가 있을
뿐이다. 그 나머지 외방 오랑캐들은 우리나라에 비해 하찮은 존재이다. 더구나 저 동쪽 오랑캐인
소맥(小貊)은 우리 조정을 신하로 섬기고 있다. 그런데 지금 감히 우리와 나란히 앉게 한단 말인가.”
하고, 유사효도 위나라 남부 상서(南部尙書) 이사충(李思沖)에게 말하기를,
“우리 성조(聖朝)에서는 위나라의 사신을 대우함에 있어서 일찍이 작은 나라와 나란히 서게 한 적이
없었음을 경 역시 잘 알 것이다.”
하니, 이사충이 말하기를,
“사실 그 말이 맞다. 다만 정사(正使)와 부사(副使)가 전(殿) 위로 오르지 못할 뿐, 이 자리도 매우 높은
데이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였다. 이에 유사효가 말하기를,
“옛날에 이도고(李道固)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는 바로 의관(衣冠)으로 간격을 두었다. 위나라의 사신이 필시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올 것이니, 어찌 쫓겨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안유명이 또 위 오랑캐 나라의 임금에게 말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어금버금하기로는 오로지 제나라와 위나라가 있을 뿐인데, 변경의 작은 오랑캐가 감히
신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하였다. 《상동》
○ 위 태화(太和) 15년에 장수왕 79년 고구려 왕 고련이 죽었는데, 나이가 1백여 세였다. 고조가 동쪽
교외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자치통감》에, “위나라 임금이 장수왕을 위하여 소식(素食)을 하고 현관(玄冠)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거애하였다.” 하였다. 그러고는 알자복야(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파견하여
책명(策命)으로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고 하였다. 또 대홍려(大鴻臚)를 파견하여 고련의 손자 고운(高雲)에게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제수하고, 의관(衣冠), 복물(服物),
거기(車旗) 등의 장식을 내려 주었다. 또 고운에게 조서를 내려 세자를 입조(入朝)시켜서 교구(郊邱)의
제사에 참여시키게 하였다. 그러자 고운이 글을 올려서 세자가 병이 났다는 핑계로 사양하면서, 그 대신
종숙(從叔)인 고승우(高升于)를 보내어 사신을 따라 대궐로 나아가게 하니, 고조가 엄하게 꾸짖었다. 이
뒤로는 해마다 공물을 바치었다. 《후위서》
○ 제 울림왕(齊鬱林王) 융창(隆昌) 원년에 문자왕 3년 고려왕 낙랑공 고운(高雲)을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영평이주제군사 정동대장군 고려왕 낙랑공
(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麗王樂浪公)으로 삼았다. 《남제서(南齊書)》
○ 양 무제(梁武帝) 천감(天監) 원년 문자왕 11년 4월 무진에 거기장군 고구려 왕(車騎將軍高句麗王) 고운의
호를 올려 거기대장군으로 삼았다. 《양서(梁書)》
동이의 여러 나라 가운데서 조선이 가장 강대하였는데, 기자의 교화를 받아 그 기물(器物)이 예악(禮樂)에
합당하였다고 한다. 위나라 때 조선 동쪽에 있는 마한ㆍ진한 등의 족속이 대대로 중국에 통하였다.
진(晉)나라가 양자강을 건너간 뒤부터 바다를 건너 온 동이의 사신으로는 고구려와 백제가 있었다.
송(宋)ㆍ제(齊) 시대에도 항상 직공(職貢)을 통하였고, 양(梁)나라가 흥기하여서는 또 더욱 빈번히
왕래하였다. 《상동》
○ 위나라 정시(正始) 연간에 살펴보건대, 정시 원년은 바로 문자왕 13년이다. 세조가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인견하였다. 그러자 예실불이 앞으로 나아가서 아뢰기를,
“고구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위나라를 섬기면서 여러 대에 걸쳐 충성을 다하여, 저희 나라에서
산출되는 물품을 빠짐없이 조공하였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산출되고 가(珂)는 섭라(涉羅)에서
산출됩니다.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었는데, 국왕인 신 고운(高雲)은
오로지 끊어진 나라를 이어 주는 의리를 생각해서 이들을 모두 경내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위의 두 가지 물품을 왕부(王府)에 바치지 못하는 것은 실로 백제와 물길 두 도적 때문입니다.”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시경》에 ‘술병이 비는 것은 오로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지난날 공물을 빠뜨린 것은 그 책임이 오로지 연수(連帥)에게 있다. 경은
마땅히 짐의 전지를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서, 위압하고 회유하는 방도를 잘 써서 못된 무리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동쪽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두 읍(邑)으로 하여금 다시 옛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상공(常貢)에서 빠뜨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후위서》
○ 양(梁) 천감(天監) 7년 문자왕 17년 2월 을해에 거기대장군 고려왕 고운(高雲)을 무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撫軍大將軍開府儀同三司)로 삼았다. 《양서》
○ 11년과 15년에 고운이 자주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상동》
○ 위나라 효명제(孝明帝) 희평(煕平) 원년에 문자왕 25년 유유(蠕蠕)의 임금
○ 위나라 효명제(孝明帝) 희평(煕平) 원년에 문자왕 25년 유유(蠕蠕)의 임금 배노(配奴)가 용병을 잘하여
서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드디어 그 강역이 넓어져서 동쪽으로는 옛 조선 땅의
서쪽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건너서 한해(瀚海)에까지 다달았고, 남쪽으로는 대적(大磧)에까지
이르렀다. 《문헌통고》
○ 신귀(神龜) 2년에 문자왕 28년 고운(高雲)이 죽었다.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거애(擧哀)하였고,
사신을 보내어 책명을 내려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추증하고, 또 그의 아들인 세자 고안(高安)을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였다.
《후위서》
○ 양(梁) 보통(普通) 원년 안장왕 2년 2월 계축에 고구려 세자 고안을 영동장군 고려왕 지절
독영평이주제군사(寧東將軍高麗王持節督營平二州諸軍事)로 삼았다. 《양서》
○ 위 정광(正光) 원년에 안장왕 2년 광주(光州) 해상에서 또 소연(蕭衍)이 고안에게 주는
영동장군(寧東將軍)의 의관과 칼, 패물(佩物) 및 사신으로 가던 강법성(江法盛) 등을 잡아 경사(京師)로
보내었다. 《후위서》
○ 양 보통 7년에 안장왕 8년 고안이 졸하고 그의 아들 고연(高延)이 즉위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고연에게 작위(爵位)를 승습하게 하였다. 중대통(中大通) 4년과 6년, 대동(大同) 원년에
여러 차례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양서》
○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 “안장왕은 13년간 재위하였으며, 양나라 중대통 3년에 훙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보통 7년에 졸하였다고 하였으니,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 위 출제(出帝) 초에 살펴보건대, 출제 원년은 바로 안원왕(安原王) 2년(532)이다. 조서를 내려서 고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 왕
(使持節散騎常侍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가하고 의관과 의복, 수레, 깃발 등을
하사하였다. 《후위서》
○ 효정제(孝靜帝) 천평(天平) 연간에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천평 원년은 바로 안원왕
4년(534)이다. 고구려사에는 이해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서를 내려 고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
(侍中驃騎大將軍)을 가하고 나머지 직위는 예전대로 하게 하였다. 고연이 죽자 그의 아들 고성(高成)이
즉위하였다. 무정(武定) 연간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쳤다. 《상동》
고구려가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것이 동이의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으뜸이었고, 경사(慶事)와 애사(哀事)에
중국에서 내려 주는 것도 역시 가장 넉넉하였다. 《상동》
○ 서위 문제(西魏文帝) 대통(大統) 12년에 양원왕 2년 고련(高璉)의 5대손 고성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후주서(後周書)》 ○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양원왕의 이름이 고평성(高平成)으로 되어
있다.
○ 양 태청(太淸) 2년 양원왕 4년 3월 갑진에 무동장군 고려왕(撫東將軍高麗王) 고연(高延)이 졸하였다.
그의 아들을 영동장군 고려왕 낙랑공(寧東將軍高麗王樂浪公)으로 삼았다. 《양서》
○ 살펴보건대, 안원왕 고보연(高寶延)은 양 대동(大同) 11년(545)에 훙하였는데, 대개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고한 것이다.
○ 북제 문선제(北齊文宣帝) 천보(天保) 원년 양원왕 6년 9월 계축에 산기상시 거기장군 영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려왕(散騎常侍車騎將軍領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麗王) 고성을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로 삼고 나머지 관작은 예전대로 하였다. 《북제서》
○ 3년에 양원왕 8년 문선제(文宣帝)가 영주(營州)에 이르렀다. 박릉(博陵) 최류(崔柳)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위나라 말기에 고구려로 유망하여 들어간 사람들을 송환시키기를 요구하였는데, 최류에게
칙명하기를, “만약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조처하라.” 하였다. 최류가 고구려에 이르러
이를 허락받지 못하자, 두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고구려 왕 고성을 주먹으로 쳐서 용상 밑으로
넘어뜨렸다. 그러자 고성의 좌우에 있던 고구려의 신하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감히 움직이지 못하면서
사죄하였다. 최류가 5천 호를 이끌고 돌아와 복명하였다. 《북사》
○ 4년 양원왕 9년 문선제가 북쪽으로 거란(契丹)을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에 다시
돌궐(突厥)에게 핍박당하자, 거란은 1만여 가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부쳐 살았다. 《문헌통고》
○ 후주 명제(後周明帝) 무성(武成) 원년(559)에 고성이 죽고 아들 고탕(高湯)이 즉위하였다. 《후주서》
○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사에는 평원왕(平原王) 고양성(高陽成)이 무성 원년에 즉위하였다고 하였으니,
《후주서》에서 이름이 고탕(高湯)이라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연차를 드러내어 적지 않았으므로
동사에 의거하여 바로잡는다.
○ 북제 폐제(北齊廢帝) 건명(乾明) 원년 평원왕 2년 2월 을사에 고구려 왕의 세자 고탕을 사지절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려왕(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으로 삼았다. 《북제서》
○ 진(陳)나라 세조(世祖) 천가(天嘉) 3년 평원왕 4년 2월 기유에 고구려 왕 고탕을 영동장군(寧東將軍)으로
삼았다. 《진서(陳書)》
○ 후주 무제(後周武帝) 건덕(建德) 6년에 평원왕 19년 고탕이 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고조가
고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개국공 요동왕(上開府儀同大將軍遼東郡開國公遼東王)으로 삼았다. 《후주서》
[주-D001] 겸양(嗛羊) :
양이면서 뿔이 네 개 나 있어서 양 같으면서도 양은 아닌 동물이다.
[주-D002] 부여의 별종(別種) :
고구려가 부여와 같은 계통의 민족이었음을 말한다. 이들은 예맥족(濊貊族)이라고 부르는데, 백제의 지배층
및 동예(東濊) 등이 이에 포함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327쪽》
[주-D003] 소노부(消奴部) :
《삼국지》에는 연노부(涓奴部)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소노부가 맞다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359쪽》
[주-D004] 주몽(朱蒙) :
주몽은, 《삼국유사》 왕력(王曆)에는 ‘추몽(鄒蒙)’이라 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記)》 천지기(天智紀)에는
‘중모(仲牟)’라 하였고, 호태왕비(好太王碑)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추모(鄒牟)’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혹은 상해(象解)라고도 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이병도는 “상해는 중모(衆牟)의 와오(訛誤)이다.” 하였다.
《이병도, 國譯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77, 213쪽 주》
[주-D005] 하백(河伯)의 딸 :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에는 이름이 ‘유화(柳花)’라고 하였다.
[주-D006] 오인(烏引)ㆍ오위(烏違) 등 두 사람 :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는 조이(鳥伊)ㆍ마리(摩離)ㆍ협보(陜父) 세 사람으로 되어 있다.
[주-D007] 큰 강 :
《양서(梁書)》에는 엄체수(淹滯水)로 되어 있는데, 엄체수는 소요수(小遼水)로, 오늘날의 혼하(渾河)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엄사수(淹㴲水)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의 소주(小註)에 “일명 개사수(蓋斯水)니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개사수가 압록강의 동북쪽에 있다는 설은
주몽의 본국(本國)을 동부여(東夫餘)로 잘못 안 데서 나온 것이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북부여(北夫餘)의
위치가 지금의 농안(農安) 부근이었으므로, 여기의 대수(大水)는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을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17쪽 주》
[주-D008] 보술수(普述水) :
《삼국사기》에는 ‘모둔곡(毛屯谷)’으로 되어 있다. 비류수(沸流水)와 같은 말로, 오늘날의 혼하(渾河)로
비정된다.
[주-D009] 흘승골성(紇升骨城) :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 위치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으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환인현(桓仁縣)의 혼강(渾江) 일대로 비정되는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10] 고구려 군사 :
이병도는 이에 대해 “이는 신흥 고구려국의 군사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흥경(興京) 노성(老城)으로
옮겨 간 한(漢)의 제2 현도군의 치현(治縣)인 고구려현의 군사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國譯三國史記 227쪽 주》
[주-D011]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 :
왕망(王莽)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한 것은 유리왕(琉璃王) 31년이기 때문에 일단 유리왕을 생각할 수 있으나,
앞뒤를 재어 볼 때 이는 설득력이 없다. 《삼국사기》를 보면 “엄우(嚴尤)가 고구려의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참수하였다.”고 되어 있어 중국 측 사서(史書)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이병도는 이에 대해 “이는 물론 신흥
고구려국의 왕을 말한 것이나, 이때 고구려 왕의 이름은 추(騶) 즉 추모(鄒牟)가 아니라 다음 왕인 유리왕
때에 해당되는 바, 유리왕이 즉위한 사실을 모르고 전왕이 그대로 재위하고 있는 것으로 오인한 것인
듯하다.”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D012] 엄우가 …… 전하였다 :
이 부분이 《삼국사기》에는 “아장(我將) 연비(延丕)를 꾀어 목 베었다.”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엄우에게 살해된 것은 고구려 왕이 아니라 고구려 왕이 보낸 장수로, 그 이름이 꼭 연비인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당시 한에서 그를 고구려후 추라고 한 것은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면 과장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D013] 하구려(下句麗) :
고구려에 대해 멸시해서 붙인 칭호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백제에 대해 ‘백잔(百殘)’이라고 칭하였다.
[주-D014] 잠지락(蠶支落)의 대가(大加) :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제2에는 ‘잠우락부(蠶友落部)의 대가(大家)’로 되어 있다.
[주-D015] 고궁(高宮) :
제6대 태조왕(太祖王)의 이름으로,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雛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三國史記 卷15
高句麗本紀 第3》
[주-D016] 고구려가 …… 공격하였다 :
이에 대해 이병도는, “화려성은 낙랑의 동부 도위(東部都尉)가 관할하는 현(縣)의 이름으로, 지금의
영흥(永興)에 해당되는데, 이곳은 현도와는 상관이 없는 곳이다. 그런즉 ‘현도를 침입하였다.’는 기사와
‘화려성을 공격하였다.’는 기사를 각각 별개의 기사로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후자를 어떤 착오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41쪽 주》
[주-D017] 아들 고수성(高遂成) :
《삼국사기》에는 ‘아우 고수성’으로 되어 있다.《三國史記 卷15 高句麗本紀 第3》
[주-D018] 요대(遼隊) :
지금의 해성(海城) 서쪽이다.
[주-D019] 신창(新昌) :
요동의 속현(屬縣)으로, 요양의 서북쪽에 있는 듯하다.
[주-D020] 공조(功曹) :
한나라의 관명으로 서사(書史)를 맡은 하급 관리이다.
[주-D021] 병마연(兵馬掾) :
병마는 군사를 맡은 하급 관리를 말하고, 연(掾)은 보좌관, 또는 속관(屬官)을 뜻하는 바, 바로 지방 군현의
군사를 맡은 하급 관리이다.
[주-D022] 마한(馬韓) :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 70년 조 기사의 소주(小註)에, “마한은 백제 온조왕(溫祚王)
27년(9)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하였다고 하니, 혹 이미 멸망한 뒤에 다시
부흥한 것인가.” 하였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마한이 멸망한 것은 실상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로
생각되므로 이때 넉넉히 그 존립을 유지하였을 것이나, 고구려와 마한은 지리상이나 정치상으로 동떨어진
관계에 있었는바, 이는 오전(誤傳)일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43쪽 주》
[주-D023] 견가(犬加) :
《삼국지》에는 대가(大加)로 되어 있으나 원문에 따라 견가로 번역하였다.
[주-D024] 주부(主簿) :
일명 울절(鬱折), 오졸(烏拙)이라고도 하는 고구려의 관직으로, 국가의 기밀, 법의 개정, 군사의 징발 등의
일을 맡았다. 이 주부에 대해서 김철준(金哲俊)은 ‘중국의 영향으로 된 명칭으로 왕권(王權)을 배경으로
하여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거나 대로(對盧)나 패자(沛者) 아래서 직접 국사를 총리(總理)한 관직’으로 보고
있으며, 이종욱(李鍾旭)은 ‘우태(于台)와 함께 국왕 직속의 통치 기구에 편입된 자들에게 준 관등(官等)’으로
보았으며, 신형식(申瀅植)은 이를 신라의 상대등(上大等)에 대비하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ㆍ272쪽》
[주-D025] 비류수(沸流水) :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이다. 《고려사》에서는 이를 평양의 동북쪽으로 추정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평안도 성천(成川)으로 비정하였으나,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며, 동가강의 상류라는 것이
통설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4쪽》
[주-D026] 고추가(古雛加) :
김철준(金哲俊)은 이를 고구려의 왕족, 본래 국주(國主)였던 소노부(消奴部)의 적통대인(嫡統大人),
왕비족(王妃族)에게 준 칭호로, 대부족장(大部族長)이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기백(李基白)은 신라의 갈문왕(葛文王)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고추가는 역시 하나의 관직으로서
시대에 따라서 그 성격도 조금씩 변하여졌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70쪽》
[주-D027] 환도(丸都) :
고구려의 옛 도성으로 지금의 통구(通溝)이다. 서기 2세기경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이 도읍한 이후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300년간의 수도였다. 환도는 국내성(國內城)과 함께 그 위치와 양자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종래에는 양자를 별개의 도성으로 보아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로 국내는 환도의 한역명(漢譯名)이라 생각하고 국내성과 환도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1쪽》
[주-D028] 조의(皀衣) :
고구려 초기의 중앙 관직으로, 국가의 기밀, 법령 제정, 군사의 징발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고 생각되며,
중국의 종3품관에 해당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D029] 사마선왕(司馬宣王) :
사마의(司馬懿)를 가리킨다.
[주-D030] 갈구(梁口) :
이병도는 갈구(梁口)를 동가강(佟佳江)과 그 지류인 부이강(富爾江)이 합류되는 곳인 지금의
부이강구(富爾江口)로 비정하였다.《國譯三國史記 263쪽 주》
[주-D031] 정현(頳峴)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제5에는 “동천왕이 이때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죽령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는 함흥(咸興)의 황초령(黃草嶺)이라고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65쪽 주》
[주-D032] 패자(沛者) :
고구려 때 최고 집정관(執政官)의 하나로, 기록에는 패자의 직능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로(對盧)와 함께 왕을 보좌한 좌우상(左右相)의 하나로서 국정을 총리하는 관직으로
추측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1쪽》
[주-D033] 매구(買溝)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大武神王條)에, 30년(대무신왕13) 7월에 매구곡 사람 상수(尙須)가
그의 동생 위수(尉須), 사촌 동생 우도(于刀) 등과 함께 고구려에 내투(來投)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매구를 매구루(買溝漊)ㆍ매구곡과 동일한 지명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 위치는 함경도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34] 왕기가 …… 이르러 :
이병도는 이에 대해 “《위지(魏志)》에 나오는 ‘옥저 땅 1천여 리를 지나서’란 부분은 위나라 군사가 환도
방면에서 척량산맥(脊梁山脈)을 넘어 함흥 지방을 거쳐 원산(元山)ㆍ안변(安邊) 방면의 불내성(不耐城)에
이르는 과정을 추산한 숫자로, 이는 동천왕의 행방과 위나라 군사의 추격을 북옥저(北沃沮)로 알고 잘못
말한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65쪽 주》
[주-D035] 환도산(丸都山)에 …… 새겨 놓았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환도산에 새겨 놓았다는 것은, 환도를 함락시킨 뒤에 관구검이 환도성의 북쪽, 곧
지금의 소판분령(小板岔嶺)에 비석을 세운 것을 말한 것이고, 불내성에 새겨 놓았다는 것은, 왕기의
별견대(別遣隊)가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아 패하여 낙랑 방면으로 철수한 뒤, 낙랑 태수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 궁준(弓遵)이 그 뒤를 이어 고구려군이 점거하였던 동예(東濊) 지방의 불내성을 쳐서 항복받고 그곳에
비석을 세운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65쪽 주》
[주-D036] 대극성(大棘城) :
지금의 금주성(錦州省) 금현(錦縣)이다.
[주-D037] 신성(新城) :
신성은 고국원왕(故國原王) 5년(335)에 수축되어 고구려의 서방 요충이 되었고, 수(隋)ㆍ당(唐)과의 항쟁
때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으며,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에서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이곳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 이병도는 지금의 만주 봉천(奉天) 무순성(撫順城) 뒤편의 북쪽
산 위에 남아 있는 고구려산성지(高句麗山城址)로 비정하였고,《國譯三國史記 269쪽 주》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신성은 요하와 살이허산성 사이에 있는 무순(撫順)의 고이산성이 틀림없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93쪽》
[주-D038] 용성(龍城) :
지금의 금주성(錦州省) 조양(朝陽)이다.
[주-D039] 고구려로 …… 좁았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북쪽 길은 지금의 흥경(興京)에서 통화현(通化縣)을 거쳐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로
나오는 길인 듯하고, 남쪽 길은 흥경에서 부이강구(富爾江口)를 거쳐 하천 골짜기를 따라 통구에 이르는
길인 듯하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77쪽 주》
[주-D040] 남협(南陜) :
《동사강목》 제2에 “남협은 지금의 연산관(連山關) 통원보(通遠堡)에서 봉성(鳳城)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
하였다.
[주-D041] 목저성(木底城) :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목기(木奇)이다.
[주-D042]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 :
《동사강목》에서는 “가(加)는 고구려의 관명에 상가(相加)ㆍ대가(大加)ㆍ소가(小加) 등의 관명이 있다.”고
하여, 아불화도(阿佛和度)를 이름으로, 가(加)를 직명으로 보았다. 《자치통감》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보았다.《東史綱目 第2上》
[주-D043] 남소(南蘇) :
신성(新城)과 함께 연(燕)과 접경 지역에 있던 고구려의 중진(重鎭) 가운데 한 성이다. 남소성의 지리적인
위치에 대하여 북한의 《조선전사》에서는 요령성(遼寧省) 무순현(撫順縣) 동북쪽에 있는 살허이성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봉천(奉天) 경현(京縣)의 경계에 있다.”
하였는바, 이로 보면 지금의 심양(瀋陽) 부근의 신성(新城)과 가까운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513쪽》
[주-D044] 해서공(海西公) :
진(晉)나라의 폐제(廢帝) 사마혁(司馬奕)의 봉호(封號)이다.
[주-D045] 고안(高安) :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이다. 담덕(談德)이라고도 한다. 진(晉)나라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7년(392)에
즉위하였다.
[주-D046] 고구려가 …… 도망쳤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고구려의 이 원정은 연나라의 수도 가까이 깊이 쳐들어갔던 것이므로, 그간
실지(失地) 회복은 물론이요, 전날 연에 대한 큰 보복전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기백을 한껏 나타낸 것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83쪽 주》 숙군성(宿軍城)은 《동사강목》 제2에 “숙군성은 용성(龍城) 동북쪽에
있는데, 연나라 평주 자사(平州刺史)의 관할지이다.” 하였다. 이병도는, “연의 수도 용성(龍城)은 지금의
조양(朝陽)이거니와 그 동북쪽이라면 지금 어느 곳일까? 지금의 금주성(錦州省) 광녕(廣寧)이 아닌가 싶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83쪽 주》
[주-D047] 경북(陘北) :
산서성(山西省) 대현(代縣) 서북쪽 구주산(句注山)의 북쪽 지역이다. 구주산의 남쪽은 경남(陘南)이다.
[주-D048] 고화(高和) :
이병도는, “고화는 앞서(고국원왕 12년 12월) 전연의 왕 모용황이 고구려의 국도인 환도성을 무찌르고 남녀
5만여 구를 노략하여 갔을 때 잡혀간 포로 가운데 한 사람으로, 대대로 연의 신하가 된 자이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285쪽 주》
[주-D049] 고련(高璉) :
장수왕의 이름으로, 거련(巨連)이라고도 한다. 413년에 즉위하였다.
[주-D050] 자백마(赭白馬) :
도화(桃花)의 색깔을 띤 말로, 준마(駿馬)를 뜻한다.
[주-D051] 책성(柵城) :
발해에서 예(濊)의 옛 땅을 동경(東京)으로 삼은 다음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고 불렀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함경북도 종성(鍾城)이라
하였으며, 이병도는 지금의 훈춘(琿春)으로 보았다.
[주-D052] 화룡(和龍) :
위진남북조 시대 때 용성현(龍城縣)의 별칭으로, 지금의 조양(朝陽)이다.
[주-D053] 색로(索虜) :
위진남북조 시대 때 남조 사람들이 북조 사람들을 천시해서 부르던 칭호이다.
색두(索頭)ㆍ색두노(索頭虜)라고도 하는데, 북조 사람들이 변발(辮髮)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북조에서는
남조를 도이(島夷)라고 칭하였다.
[주-D054] 대명(大明) …… 51년 :
이 부분의 원문은 ‘七年 長壽王四十八年 ’이다. 효건(孝建)의 연호는 3년까지 밖에 없는데, 편찬자가
대명(大明)의 연호를 빠뜨리고 기록하여, 효건 7년으로 보아 장수왕 48년이라 하였다. 이는 대명 7년으로,
대명 7년은 장수왕 51년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5]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개부(開府)는 관사(官司)를 설치해 속관(屬官)을 둘 수 있다는 뜻이고, 의동삼사(儀同三司)는 의장(儀仗) 등
모든 위의(威儀)를 천자국의 삼사(三司) 즉, 삼공(三公)과 동일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한나라의
제도로, 이후 중국에서 우리나라 왕들에게 관직을 제수할 경우 이 칭호가 붙었다.
[주-D056] 위(僞)나라의 …… 억류하였다 :
이 부분은 원문이 ‘沈文秀爲東萊太守鞠延僧數百人據城劫留高麗獻使’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것으로, 문리가 연결되지 않기에 《남제서(南齊書)》 권27 열전 제8에 의거하여 ‘沈文秀爲’를
‘沈文秀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위(僞)는 송(宋)나라에서 북위(北魏)를 지칭할 때 붙이는 글자이다.
[주-D057] 육궁(六宮) :
천자를 모시는 황후와 다섯 부인을 말한다.
[주-D058] 물길국(勿吉國) :
물길은 말갈(靺鞨)의 별칭이다. 물길은 숙신족(肅愼族)의 하나로 고구려 북쪽 송화강(松花江) 하류에 있던
소국(小國)이다. 5세기 말에는 부여를 공략하는 등 강력한 팽창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6세기 말에 말갈에
흡수되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8쪽》
[주-D059] 유유(蠕蠕) :
북방에 있는 오랑캐 종족의 이름이다. 처음에는 유연(柔然)이라 칭했고, 송나라와 제나라 때에는
예예(芮芮)라고 칭하였으며 그 뒤에는 유유라 칭했다.
[주-D060] 지두간(地豆干) :
실위(室韋)의 서쪽에 있는 나라 이름이다.《東史綱目 第2下》
[주-D061] 숙도성(肅道成) :
남제(南齊) 태조(太祖)의 이름이다.
[주-D062] 위(魏) 오랑캐의 나라 :
남제(南齊)에서 북위(北魏)를 천시해서 부르는 말이다.
[주-D063] 심의(深衣) :
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옷으로, 흰 비단으로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깃을 두른 옷이다.
[주-D064] 고운(高雲) :
21대 왕인 문자왕(文咨王)의 이름으로, 고나운(高羅雲)이라고도 한다. 장수왕의 아들인 고조다(高助多)가
일찍 죽었으므로 손자인 고운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문자왕은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주-D065] 섭라(涉羅) :
탐라(耽羅)를 말하는바, 지금의 제주도로, 탐모라(耽牟羅)라고도 한다. 탐라는 동성왕(東城王) 20년(498)에
백제에 복속하였다.
[주-D066] 술병이 …… 부끄러움이라 :
《시경》 소아(小雅) 요아편(蓼莪篇)에 나오는 시로, 자식이 불민한 것은 부모의 수치란 뜻이다. 여기서는
고구려에서 방물을 바치지 못하는 것은 그 책임이 실제로는 고구려의 지방관에게 있다는 뜻이다.
[주-D067] 두 읍(邑) :
부여와 섭라를 가리킨다.
[주-D068] 한해(瀚海) :
사막(沙漠)을 가리키기도 하고 북해(北海)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사막의 이름으로, 지금의 몽고
대사막을 말한다.
[주-D069] 고안(高安) :
22대 왕인 안장왕(安藏王)의 이름이다. 고흥안(高興安)이라고도 한다.
[주-D070] 소연(蕭衍) :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이름이다.
[주-D071] 고연(高延) :
23대 왕인 안원왕(安原王)의 이름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장왕은 13년간 재위하였으며, 양나라
중대통(中大通) 3년(531)에 훙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안원왕의 휘는 고보연(高寶延)으로, 안장왕의
동생이라고 하였는바, 이 기사는 잘못되었다.《三國史記 卷19 高句麗本紀 第7》
[주-D072] 영주(營州)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창려현(昌黎縣)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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