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영 (KIN 지구촌동포연대 활동가)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 <제8회 재외동포NGO대회 in Sakhalin>이라는 이름으로, <사할린한인 역사기념관 건립>에 대해 논의하고, 사할린한인의 역사와 대면하기 위해 한국․일본․중국동포, 그리고 일본인으로 구성된 38명이 사할린 현장을 찾았다.
참관자들은 사할린 남쪽의 코르사코프부터 남서쪽의 포자르스코예(미즈호 학살 사건. 민간인에 의한 27인 학살 사건), 홈스크, 고르노자보드스크까지. 강제동원이 극심했던 브이코프에서 비포장도로를 7시간을 타고 가야하는 레오니도보(카미시스카 학살 사건. 일본 경찰에 의한 18인 학살 사건), 뽀로나이스크까지.
짧은 일정 동안 아픔의 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역사와 대면하고, 진행되고 있는 삶들과 만났다. / 편집자 주 | |
“숨이 가빠서 더 이상 말을 못하겠어.”
강제동원이 가장 극심했던 나이부찌(현 브이코프)탄광에서 징용 당시 상황, 작업하던 상황 등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던 91세의 할아버지(박영권. 1921년생. 대구 출신)는 가뿐 숨을 들이시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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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 박영권씨(91세). [사진제공-이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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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광 견학을 마치고(최연소 참가자 2인). [사진제공-이은영] |
나이부치(內淵, 현 브이코프). 사할린 주도(州都)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달리면 돌린스크(당시 대규모 제지공장이 있었던 곳)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산길로 반시간 정도 달리면 브이코프에 도착한다.
이곳은 미쓰비시광업주식회사가 소유했던 남부지방의 최대 탄광 중 하나로, 이곳에서는 캐낸 석탄에서 항공기용 휘발유를 만들었다. 강제동원이 가장 극심했던 곳이기도 하며, 여러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부 조선인 노동자 기숙사에만 1천명 이상의 독신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 나이였을 것이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열심히 보고, 열심히 이야기하고, 열심히 듣던 17세의 동갑내기 청소년. 7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은 폐광이 된 나이부찌탄광 앞에 섰다. 그러나 이 시간의 간극은 메워지지 못한 채 75년이란 세월이 허망하게 흘러버렸고, 1세들의 삶도, 역사도 가뿐 숨을 몰아쉬는 1세 할아버지와 함께 허망하게 사라지고 있다.
사할린
일본 홋카이도 북단에서 40여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사할린(전체 면적 중 북위 50도 이남 지역)은 1905년(러일전쟁)부터 1945년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까지 일본 영토였던 곳이다. 수만 명의 조선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일터를 찾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할린으로 향했다. 탄광, 비행장 건설, 제지 공장, 철도 건설 등등. 처음에는 2년 계약으로, 이후에는 안정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가족을 불러들이게 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전쟁물자와 이를 생산해낼 노동력이 더 필요해졌고,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령이 내려져 모집, 관알선, 징용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해 나갔다. 급기야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사할린에서 일본 본토로 석탄을 수송해 가기가 힘들어지자 수천 명의 노동력을 일본으로 이동시켰다. 조선에서 불러들인 가족과 같이 지내던 조선인 탄부들은 가족을 놔두고 일본으로 재징용됐고, 일본의 패전 후 사할린의 가족과 영영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정확한 수를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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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향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코르사코프항구. [사진제공-이은영] |
전쟁이 끝나자 일본으로 이중징용됐던 이들은 부모가 있는 조선으로 갈 수 있었고 가야했지만, 사할린에 가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할린으로 가야했다. 모두 죽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뼈라도 가지고 와야 한다는 생각에 도둑배를 타고 다시 사할린으로 갔다. 한편 사할린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고향에 갈 생각에 배를 탈 수 있는 사할린 최남단 코르사코프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가는데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선을 거부당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소련지구 인양[引揚]에 관한 미-소 협정), 또 한 차례 1956년부터 1959년까지(일소공동선언), 30만 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배를 타고 떠날 때, 부인이 일본인인 사람을 제외한 조선인은 배를 탈 수 없었다.
코르사코프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망향의 언덕’이라 부른다)에서 고향에 실어다줄 배만을 기다리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미쳐죽은 이들!
일본에서 고향으로 갈 수 있었던 사람도, 사할린에서 배만 타면 고향으로 갈 수 있었던 사람도 결국 사할린땅을 떠나지 못한 채 4만 3천여 명의 조선인은 그렇게 버려졌다.
이들이 바로 사할린한인이다.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매일 폭염과 열대야, 런던올림픽의 열기까지 더해 더욱 더웠던 2012년 8월.
4일부터 11일까지 8일간, <제8회 재외동포NGO대회 in Sakhalin>이라는 이름으로, <사할린한인 역사기념관 건립>에 대해 논의하고, 사할린한인의 역사와 대면하기 위해 한국․일본․중국동포, 그리고 일본인으로 구성된 38명이 사할린 현장을 찾았다. 고등학생, 건축가, 교사, 연구자, 대학 교수, 변호사, 시민단체 활동가, 작가, 기자 등 17세부터 72세까지 다양한 연령과 정체성이 혼재해 있었다.
우리는 남쪽의 코르사코프부터 남서쪽의 포자르스코예(미즈호 학살 사건. 민간인에 의한 27인 학살 사건), 홈스크, 고르노자보드스크까지. 강제동원이 극심했던 브이코프에서 비포장도로를 7시간을 타고 가야하는 레오니도보(카미시스카 학살 사건. 일본 경찰에 의한 18인 학살 사건), 뽀로나이스크까지. 짧은 일정 동안 아픔의 현장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역사와 대면하고, 진행되고 있는 삶들과 만났다.
“여기가 갱도 입구고 탄을 파 내려가는데, 가장 깊게는 165m정도 더 내려가서 탄을 파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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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호로(현 고르노자보드스크) 탄광 갱도 입구. [사진제공-이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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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광 앞에서 묵념하는 참가자들. [사진제공-이은영] |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차로 2시간여. 본인의 아버지도 이곳 나이호로(현 고르노자보드스크) 탄광에서 일을 하셨던 강문수 씨는 탄광 입구부터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갱도 입구까지 가는 길에 이런 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 아버지가 나이호로탄광에서 일했다는 것과 창씨명이 다카야마(高山)였다는 옅은 단서만을 가지고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할린을 찾은 정태랑 씨(72세). 당시를 기억하는 대부분의 1세는 사망했거나 옅은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할머니들밖에 남지 않았다. ‘다카야마’라고 불렸던 사람이 찍힌 과거 사진 한 장만을 건네받고, 더 이상의 흔적을 찾지 못한 채 갱도 앞에서, 그리고 고르노자보드스크 공동묘지 앞에서 술 한잔과 절을 올릴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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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1세묘(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 [사진제공-이은영] |
일제시대 때부터 묘지로 사용됐던 이곳은 작년(2011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등 지원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KIN(지구촌동포연대)가 7,8월 두 달간 ‘한인묘’조사를 실시한 곳이기도 하다. 5만여 기의 러시아인, 한인묘가 혼재해 있었으며, 이 중 1,593기의 한인묘가 있음을 조사로 확인했다.
해방 후 66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63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할린한인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흘러버린 시간만큼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독신자들의 묘. 그나마 주변에서 돌봐주던 이들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묘들은 1,593기의 묘 중에서도 ‘한인추정묘’로 기록될 뿐 다른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은 공동묘지가 남사할린 전역에 52개가 더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로써 남은 과제는 선명해졌다. 하지만 공동묘지 이외에 마을과 산들의 이름 없는 묘지들은 포함이 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더 많이 있을지 알 수 없으며, 이름 없는 묘에 대한 조사는 실태조사 이외에 여러 증언을 토대로 한 발굴과 조사가 병행돼야 할 것이다.
사할린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한인 부부. 영주귀국한 부부는 방학하고 놀러 온 손주들을 사할린으로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마침 큰 손주 결혼식도 8월 말에 있어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사실은 내가 태어난지 6개월 정도 됐을 때 친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셔서 내 진짜 부모가 누군지, 내 고향이 어딘지.. 모릅니다... 돈 주는 것(위로금)도 나는 못 받죠. 호적이 없으니...”
부인인 양모 씨는 친아버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강제동원 피해 유족도 될 수 없다. 양모 씨의 친부모와 양모 씨 모두 존재했고, 존재하지만 ‘피해자’로 분류하는 범위에서는 없는 사람이 돼 버렸다. ‘그나마 영주귀국을 했으니 다행이네...’라고 위안 삼으면 될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은 채 온갖 제도적 차별과 불이익(주1)을 감내하면서까지 소련 국적도 취득하지 않고 기다렸던 한인1세들. 하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한 채 차가운 사할린땅에 묻힌 한인 1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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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호로탄광에 바친 꽃다발. [사진제공-이은영] |
이젠 ‘기억’조차도 희미해져버렸고, ‘기록’조차도 선명하지 못한 사할린한인의 역사. 우리는 이런 사할린한인의 역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저 지나가버린 과거의 역사로 치부하고, 산 사람들이라도 잘 살 수 있게 하면 되는 걸까.
우리는 ‘역사’나 ‘과거 청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과거 없이 현재는 없고, 현재 없이 미래도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의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 안고 실천을 해야 한다.
역사를 증언해 줄 당사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책임져야할 당사자(일본, 한국 정부)들도 ‘인도적 지원’으로 책임을 다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지금. 이분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를 담아 꽃이라도 바치는 마음들이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사할린 희망 캠페인> ‘사할린 피징용자 현지 위령시설 및 역사자료관 건립’을 위한 범국민모금
<사할린 희망 캠페인단>은 사할린 잔류1세 지원 및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등에 대한 지원을 위한 ‘사할린한인 지원 특별법’ 제정과 ‘사할린 피징용자 현지 위령시설 및 역사자료관 건립’(이하 ‘사할린 역사자료관’)을 위한 범국민모금을 기본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8월 5일(일) 사할린한인문화센터에서 <사할린한인 역사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제워크숍>(KIN(지구촌동포연대), 사할린주한인협회 공동주최)을 진행하였다.
워크숍에서 임용군 회장(사할린주한인협회)은, 사할린한인의 역사에 대한 보전과 전승, 문화시설 및 전파 등의 역할을 할 기념관의 필요성과 시급함에 대해 호소하였다.
한국에서 참가한 건축가 김원 대표(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유명한 기념관들과 각 각의 특징, 성격 등을 소개하면서 사할린한인 역사기념관이 가야할 방향에 대한 다양한 조언을 했다.
마지막으로 박신의 교수(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는 “기념관이란 역사적 교훈을 전파하고 그것의 현재와 미래적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며, 역시 다양한 사례에 대한 소개를 통해 사할린한인 역사기념관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번 <제8회 재외동포NGO대회>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한국, 사할린, 일본에서 각각 <사할린 희망 캠페인 추진위원>(가칭)을 발족해 ‘사할린 역사자료관’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사할린 피징용자 현지 위령시설 및 역사자료관 건립’을 위한 범국민모금 계좌 - 국민은행, (사)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033-01-0448-023
※ 자세한 내용은 <사할린 희망 캠페인단> 홈페이지(www.sahallin.net) 참고
[문의] <사할린희망캠페인단> 사무국 - 전화 : (02)706-5880 / 전송 : (02)706-5881 - 이메일 : sahhope2009@gmail.com - 홈페이지: www.sahallin.net | |
--------------------------- (주1) 비공민(소련국적 미취득자)의 경우 제한된 지역 이외로 이동할 경우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사할린을 벗어나 대륙으로 대학 진학할 경우는 물론, 사할린 내에서의 친척 방문이나 장례식 참가 등 일상적인 활동에도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