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토(客土)
정여송
“그때는 왜 죽자고 일만 했는지 몰러.”
“그러게나 말여. 요즘 세상에 옛날같이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돼?”
“세상 참 좋아졌어.”
삼사십 년 전 젊었던 시절에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일했던 노인들에게서 듣는 넋두리다. 그가 마음에 담아두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그때는 설을 쇠고 입춘이 지나 언 땅이 풀릴 때쯤이면 들판 논배미마다 땅심을 증진시키기 위해 객토를 하였다. 모래땅에는 다른 성질의 차진 황토 흙을, 차진 땅에는 모래흙을 섞어서 토질을 개량하려고 대대적으로 사업을 벌였다.
집집마다 노약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괭이와 삽을 들고 황토와 모래흙을 파내었다. 남자들은 지게에 담아 등에 짊어지고, 여자들은 양은 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들판 논두렁을 걸어서 운반했다. 기껏 사오십에서 이삼십 킬로그램에 불과한 분량이었으나 둥개지 않았다. 수백의 사람들이 며칠씩 겨끔내기 없이 일해야만 하던 것을 요즘에는 굴착기 한 대와 대형 화물차 한두 대만 있으면 몇 시간 만에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감이다.
그러나 오직 사람의 힘이지만 억척스럽게 일했던 모습들. 그것이 오늘 같은 좋은 세상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노인들의 이야기는 한 페이지의 소박한 역사가 된다.
귀 기울여 열심히 듣고 있던 그가 가을 파종을 결심한다. 봄 시기를 놓쳤기에 알맞은 씨앗을 골라 뿌릴 요량이다. 먼저 객토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적 영농법을 적용해 보려고 깊은 생각에 골똘한다. 창작하는 일에만 열심이어도 만족스러울 테지만 가르친 사위가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늦게나마 새로운 수확을 올리려는 생각이 가상키도 하다. 하지만 땅만 적당히 갈아엎는다고 소출이 저절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농사라면 몰라도 학문에 있어서는 희망 사항으로 끝날 개연성이 클 수도 있다.
군걱정이다. 굳은 심지가 있는 그는 토양을 바꾸더라도 자신이 하는 수필이 주체임을 명심한다. 탐구의 기승을 타고 장르 구분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 또한 삼가야 할 수칙임을 잊지 않는다. 일종의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지키려는 것이랄까. 작품의 질에서도 마찬가지다. 기후와 토양을 불문하고 씨앗을 분별하지 않은 채 마구 뿌려선 곤란하다는 것을 간파한다. 아무리 많은 창작을 일구어낸다 해도 작품의 수준이 낮으면 허사가 되니만큼 질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작심도 끝까지 밀고 나간다. 땅심에도 생각을 기울인다. 작품이 듬직하게 자라나도록 인내해야 하는 것을 근본과 원칙으로 삼는다.
그는 옛날 방식대로 흙짐을 져 나른다. 한 짐 두 짐…. 무게를 지탱하는 두 정강이가 걸음마다 무겁다. 그럴 도리밖에 없는 것이 꼬두람이 동생이나 조카뻘 같은 사람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까닭이다. 생각에 무게는 있으나 둔탁하고, 깊이는 있으나 반짝거림이 적으니 그들과 발맞추기가 제곱으로 힘이 켠다. 오뉴월 하루 볕도 무섭다는데 십 년 세월이야 천양지차다. 늘어진 보폭을 당겨 서둘러 걷고, 그들이 곤한 잠에 빠져들 때도 홀로 깨어 독서삼매에 매진해야 한다. 아난다(阿難陀)의 기억력을 보쌈해야 할 판이다. 세대 공감을 가지려면 문자메시지의 답장을 곧바로 챙기고, 긴장감을 곧추세워야 뒤처짐이 없다. 그들은 윗사람의 말에서도 오류를 찾아내는 명석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덩달아 그들을 통해 오류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지혜로움을 지닌다.
무엇을 바라고 어떤 것을 위한 객토인가.
무서운 날카로움으로 발전해가는 기계문명 속에서 아직도 한 군데 남아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가 있는 문학지대로의 도피이다. 시곗바늘을 되돌리고, 뮤즈의 미소도 발을 멈추는 곳으로의 정행이다. 어쩌면 살아갈수록 안정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더 복잡해져 가는 인생의 정답을 캐 보려는 행보일 수도 있다. 이것도 아니라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나’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사실 내 안의 나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을 더 힘들게 하고, 고문을 가하는 것이며, 진저리를 일으키는 일이다.
스님이 설법을 하던 중 탁자를 ‘탁’ 치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고 해보자. 경청하던 많은 사람들이 ‘뭘까’하고 생각에 잠기는 가운데 쥐 죽은 듯 조용하다. 경청은 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양 흩트림 없는 침묵이 이어진다. 순간 방바닥을 ‘탁’ 치는 것으로 응답하는 ‘나’라면 기대해 볼 만하다. 하지만 그토록 열려 있어도 알고 보면 대단치 못하고 그저 밍밍한 한 중생이라는 것 외엔 그 무엇도 아닐 테지만.
그는 객토를 하면서 깨달음 한 올을 집어 올린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태 동안 대학원에서 석학들의 학식을 즐겼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접하게 된 일이지만 책을 벗 삼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발하는 빛을 읽는다. 객토를 강도 있게 실행하지 않았더라면 보상받기 어려운 보람이다.
인간관계에서 오가는 말들은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적잖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주어서 받기도 하고 스스로 받기도 한다. 거침없는 상처야말로 자질구레한 것부터 가슴에 박히는 대못이 되어 빠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쓴 서적은 사람이 썼지마는 다르다. 일방적으로 베풀고 헤아리는 마음을 고집하는가 하면 깔축없다. 소리 없는 깨우침과 정신을 선사할 뿐이다. 구순하기에 독서상우(讀書尙友)가 이루어진다. 도원(桃源) 같은 곳이라면 과언일까. 그래서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형용하기 어려운 빛이 난다.
그의 행보는 일상적인 ‘나’ 대신 본질적인 ‘나’를, 무의식적인 삶 대신 의식적인 삶을, 세속에 적당히 타협하려는 처세훈 대신 자신에 도달하려는 자아실현에 성실하려는 마음이다. 농한기 없는 부지런한 농부가 되는 목적이라고 해야 할까.
객토.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을 구체적으로 긍정하려는 가을 파종을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