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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속집 제15권 / 지리고(地理考) 15
산수(山水) 3 경계 바깥의 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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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도산(丸都山)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환도산은 조선 국성(國城)의 동북쪽에 있다. 한나라 때 고구려의 왕 이이모(伊夷模)가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진(晉)나라 때에는 모용황(慕容皝)에게 격파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환도산은 압록강과 파저강(婆豬江)
사이에 있다. 고구려 환도성조(高句麗丸都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정현(赬峴)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5년(244)에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고구려 왕 고궁(高宮)이 패해
달아나자 관구검이 이를 추격하여 정현(赬峴)에까지 이르러 온갖 신고를 겪으면서 환도성(丸都城)에 올라가
고구려가 도읍한 곳을 도륙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현과 환도산은 서로 이어진 것이다.
○ 요산(遼山) -지금의 혼하(渾河)가 나오는 장령(長嶺)이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소요수조(小遼水條)에 나온다.
○ 갈석산(碣石山)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의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진(秦)나라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살펴보건대, 장성은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횡단하여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터가 아직도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통전》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갈석산은 지금의 압록강 서쪽의 책(柵)을 세운 곳 동쪽 머리 지역에 있어야만 한다.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우갈석(右碣石)은 바로 황하(黃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평주(平州)에서
남쪽으로 20여 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은 지금 고려의 경계 안에
있는바, 이곳에서 말한 갈석과는 다르다. 고려 안에 있는 것이 좌갈석(左碣石)이 되는바, 《통전》에서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우공추지(禹貢錐指)》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태강지리지》를 보면, “낙랑의 수성현에 갈석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하였고, 《통전》에는
이르기를, “지금 고려의 옛 경계 안에 있는데, 바로 몽염(蒙恬)이 수축한 바로,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왕백후(王伯厚)는 이르기를, “고려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 좌갈석이
되고, 평주의 남쪽에 있는 것이 우갈석이 된다.” 하였는데, 이는 경문(經文)에 나오는 우(右) 자를 아래로
끊어 읽은 것이다. 김길보(金吉甫)는 고려에 있는 것을 좌갈석이라 하고, 사문도(沙門島)와 마주하고
있으면서 발해(渤海)의 입구에 해당되는 철산(鐵山)을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우갈석이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갈석은 한 곳일 뿐인데 어찌 우갈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렇다면
도산(導山)의 글에 우 자가 없는 갈석은 좌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길보가 취한 바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 주필산(駐蹕山)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19년(645)에 태종이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다.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서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을 크게 격파하고는 행차하였던 산의 이름을 바꾸어 주필산이라고 고쳤다.
○ 《자치통감》 주에 이르기를, “주필산은 구사(舊史)에 의거하면 본디 이름이 육산(六山)이다.”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산(首山)은 요양주(遼陽州) 서남쪽 15리에 있다. 해성현(海城縣)의 경계와 이어져 있는데, 일명 수산(手山)이라고도 하고, 또 주필산이라고도 한다. 《위지(魏志)》를 보면, “경초(景初) 2년(238)에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가 요동에 이르렀는데, 8월 병인 밤에 길이가
수십 길이나 되는 큰 유성(流星)이 수산의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襄平城)의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하였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요양부(遼陽府)에 주필산이 있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그
산꼭대기에 며칠 동안 주필하고서는 돌에 새겨 공을 기록하였다. 세속에서는 수산(手山)이라고 칭한다.
산꼭대기의 평평한 돌 위에 손바닥 모양으로 생긴 곳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 샘물이 솟아나는데,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구당서(舊唐書)》를 보면, “정관 19년에 태종이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다. 요동성(遼東城)을 격파하고 백애성(白崖城)의 항복을 받은 다음 안시성(安市城)으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는데, 고구려의 욕살(褥薩) 고연수와 고혜진이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이에
태종이 산에서 내려가 군사를 이끌고 임하자,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모두
항복하였다. 인하여 행차하였던 산의 이름을 주필산이라고 고치고는 중서 시랑(中書侍郞)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돌에 새겨서 그 공을 기록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곳에서 말한
주필산은 안시성에 있는바, 요성(遼城) 근방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사(遼史)》에서 말한 바는 《당서》와
맞지 않는다. 《방여기요(方輿記要)》를 보면, “개주위(蓋州衛) 동쪽 분수령(分水嶺)의 여러 산은 바로 당나라
태종이 주필한 곳이다.” 하였다.
○ 금산(金山)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건봉(乾封) 2년(667)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진격하여 금산에 이르렀다.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의 군사를 대파하고는 고구려의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巖) 등 세 성을
함락시켰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서남쪽 127리 지점에 황금산(黃金山)이 있는데, 설인귀가 고구려의 군사를 금산에서
격파하였다고 하는 금산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를 보면, 금산은 마땅히
흥경(興京)의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
○ 석성산(石城山)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석성산은 개평현성(蓋平縣城)에서 동북쪽으로 13리 되는 곳에 있는데, 일명 고려성산(高麗城山)이라고 한다.
세속에서 전해 오기를, 그 안에 용담(龍潭)이 있는데, 초하룻날 밤에 달이 보인다고 한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토인(土人)들이 이곳에 살면서 병란을
피하였다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이르기를, “석성산은 요양주(遼陽州)에서 동북쪽으로 57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 횡산(橫山)
《구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설인귀가 요동에 주둔해 있으면서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을 만나 횡산에서
싸웠다. 고구려 군사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자 10여 명을 석성(石城) 아래에서 쏘아 죽였는데, 설인귀가 산
채로 사로잡았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웅악성(熊岳城)은 고구려의 성인데, 당나라 때 설인귀가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과 웅산(熊山)에서 싸우다가
활을 잘 쏘는 자를 석성에서 잡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경통지》를 가지고 《당서》를 참고해 보면,
웅산은 바로 횡산이며, 석성산과는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산이다.
○ 백석산(白石山)
《수서(隋書)》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설세웅(薛世雄)이 요동의 전역(戰役)에서 우문술(宇文述)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패하였다. 돌아올 적에
백석산에 주둔하였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당하였는데, 설세웅이 격파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석산은 횡산(橫山)이라고도 한다.
○ 명왕산(明王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병산(東屛山)은 복주(復州)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명산(明山)이 복주위(復州衛)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며, 《원사(元史)》 지리지를 보면,
“명왕산이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고구려 왕의 아들을 동명(東明)이라고 하는데, 그
위에다가 장사 지냈다. 지역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아마도 바로 이 산인 듯하다.” 하였다. 지금 복주의
동쪽에 있는 여러 산들 가운데에는 명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없다. 그리고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은 복주의 지역이 아니다. 현지(縣志)를 보면, 또 지금의 동병산이 바로 명산이라고 의심하여 드디어는
동명왕묘(東明王墓)를 능묘조(陵墓條)에 끼워 넣었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요양부에 명왕산이 있다.” 하였는바, 반드시 요양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금의 명칭이 달라서 상고할 수가 없다.
○ 역산(易山)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23년(649)에 오호 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고구려 군사와 역산 -삼가 살펴보건대, 《신당서(新唐書)》에는 역산이
갈산(曷山)으로 되어 있다.- 에서 싸워 격파했다. 그날 밤에 고구려의 군사들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는데, 고신감이 또 격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역산은 마땅히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동남쪽
바닷가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천산(泉山)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겸모잠(鉗牟岑)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간(高侃)이 반군을 안시성에서 격파하였으며, 또 천산에서
격파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형(咸亨) 3년(672)에 고간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과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백수산은 바로 천산의 잘못된 표기이다.
○ 동모산(東牟山)ㆍ천문령(天門嶺)
《신당서》 발해열전(渤海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渤海)는 본디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나라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백성들을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 지역을 보존하였는데,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지역이다.
○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대장군(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조칙을 내려 발해를 치게 하니,
대조영(大祚榮)이 도망쳤다.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모산은 영고탑(寧古塔)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
강역총론조(渤海疆域總論條)에 나온다. 천문령은 《대명일통지》에 의거하면 지금의 영길주(永吉州) 경계
안에 있어야 하는바, 지금의 장령자(長嶺子)인 듯하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주산(天柱山)은 승덕현성(承德縣城)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당서》를 보면,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자, 발해의 대씨(大氏)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모산 지역을 지키면서
스스로를 견고히 하였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이르기를, “심양위(瀋陽衛)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지금 -원문 빠짐- 정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는 없다. 그런즉 이 산이 바로 옛날의
동모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설은 매우 잘못되었다.
○ 녹산(鹿山)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가 녹산(鹿山)에 있다가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아 서쪽으로 연(燕)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다.
○ 주에 이르기를, “부여는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대개 녹산은 바로
그곳이다.” 하였다.
이상은 경계 밖에 있는 산(山)이다.
○ 보술수(普述水)
《후위서(後魏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주몽(朱蒙)이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도중에 큰 강 하나를 만났다. 그런데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이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주몽이 마침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 그들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른 다음, 거기에서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보술수는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의 강 건너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흘승골성조(高句麗紇升骨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비류수(沸流水)
《삼국지》 관구검전(毌丘儉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5년(244)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이에 고구려 왕 고궁(高宮)이 군사를
거느리고 비류수 가로 나아가 갈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고궁이 잇따라 패해 달아나자 관구검이 이를
추격하여 환도(丸都)를 도륙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비류수는 환도성의 서쪽 경계에 있는바,
동가강(佟家江)과 서로 가까운 강인 듯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르기를, “비류수의 상류에는
비류국(沸流國)이 있다.” 하였는데, 바로 이 물이다. 동사(東史)에서 성천부(成川府)의 비류강(沸流江)을
비류수에 해당시키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흘승골성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 염난수(鹽難水)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서개마현(西蓋馬縣)에는 마자수(馬訾水)가 있다. 마자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간다.
《명사(明史)》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화(成化) 3년(1467)에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건주여진(建州女眞)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자 조선의
왕이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강순(康純)을 보내어 1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과
발저강(潑豬江)을 건너게 하였는데, 구미(九獼)의 여러 채(寨)를 쳐부순 다음 많은 적을 참획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발저강(潑豬江)은 바로 파저강(婆豬江)의 잘못된 표기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가강(佟家江)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에서 남쪽으로 802리 되는 곳에 있는데, 통가강(通加江)이라고도
하며,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과 만나는데, 바로 옛 염난수(鹽難水)이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 하였고, 《당서》 고구려열전을 보면, “압록수는 서쪽으로 염난수와
합류한다.” 하였고, 《성경통지》를 보면, “동가강은 그 근원이 장백산 남쪽의 분수령에서 나오는데, 세 개의
샘이 골짜기 안에서 나와 모여 하나로 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합이민하(哈爾民河) 등 여러 물을
받아들이며, 압록강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명일통지》에 ‘대충강(大蟲江)이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남쪽으로 4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그 근원은 용봉산(龍鳳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지금 봉황성(鳳凰城)의 경계
안에는 대충강이 있다고는 들리지 않는바, 아마도 바로 동가강일 것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가강은 바로 파저강이다.
○ 소요수(小遼水) -남소수(南蘇水)를 덧붙인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驪縣)에는 요산(遼山)이 있는데, 요수(遼水)가 나오는 곳이다. 요수는 서남쪽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서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서북쪽으로 흘러 새외(塞外)를
지나간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소요수는 그 근원이 요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대량수(大梁水)와 합류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혼하(渾河)는 승덕현(承德縣)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새외(塞外)에서 나와 흥경(興京)
경계 안으로 흘러들어서 요양주(遼陽州)의 서북쪽에 이르러 태자하(太子河)와 만나는데, 바로 옛
소요수이다. 살펴보건대, 지금 혼하는 그 근원이 장령자(長嶺子)의 납록와집(納綠窩集)에서 나오는데, 이를
납록하(納綠河)라고 한다. 납록하는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흘러 들어와 갈상아하(噶桑阿河)와 만나 혼하가
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흥경 경계 안을 지나는데, 이곳에 소패하(小貝河)가 있어서
개원현(開原縣) 경계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하며, 또 소자하(蘇子河)가 있어 흥경 경계로부터
서북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소수(南蘇水)는 《대청일통지》에 의거하면 흥경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남소성조(高句麗南蘇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대요수(大遼水)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에는 대요수가 있는데, 그 근원이 말갈(靺鞨)의 서남쪽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로 안시(安市)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시는 바로 당나라 문황(文皇)이 공격하였던 성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하(遼河)는 봉천부(奉天府)에서 서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동쪽과 서쪽의 두 근원이 변경 밖에서
흘러와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개원현(開原縣)과 철령현(鐵嶺縣) 두 현의 서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승덕(承德), 요양(遼陽), 해성(海城)의 서쪽을 지나며, 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망평현(望平縣)에는 대요수가 있다. 대요수는 변경 밖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리를 흐른다.” 하였다. 《성경통지》를 보면, “요하는 구려하(句驪河)라고도
하며, 지금은 거류하(巨流河)라고 한다. 거류하는 그 근원이 새외(塞外)에서 나오는데, 두 개의 근원이 있다.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한 근원은 너무 멀어서 상고할 수가 없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 근원은 역시 장백산
서북쪽에 있는 여러 와집(窩集) 안에서 나와 흑이소하(黑爾蘇河) 등과 합류한 다음 북쪽으로 흘러 변경을
나가 서북쪽으로 흘러 등자촌(鄧子村)을 감돈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꺾어지면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하여 하나가 된다.
여기에서 마침내 서남쪽으로 흘러 개원현의 명안패륵둔(明安貝勒屯) 동쪽 10리 되는 곳에서 변방에서
흘러온 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흘러 철령현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청하(淸河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다시 쌍협구(雙峽口)의 서남쪽으로 들어가 두 물로 나누어지는데, 이를 내요하(內遼河),
외요하(外遼河)라고 한다. 다시 현의 서남쪽을 돈 다음 합해져서 하나가 된다. 개성(開城)에 이르러서
거류하가 되었다가 또 나누어 흐르다가 다시 남쪽에서 모여 해성현(海城縣)의 서쪽을 지나면서
태자하(太子河)와 합류하는데, 이곳을 삼차하(三汊河)라고 하며, 여기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하(河)는 바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나누어지는 곳이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진흙탕길 200여 리에
흙을 깔고 다리를 만들어서 건넌 곳으로, 지금도 이 지역 100여 리 이내에는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어
길을 갈 수가 없다.
강희(康煕) 58년(1719)과 옹정(雍正) 6년(1728)에 서로 잇달아서 길을 닦아 점차 평탄한 길이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지금 흑이소하는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서남쪽에 있는 고이낙와집(庫爾諾窩集)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변경으로 나갔다가 곧바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른다. 그 서쪽의 한 근원은 바로
서라목륜하(西喇木倫河)로, 그 근원이 고북구(古北口)에서 북쪽으로 5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몽고(蒙古)의
극서극등(克西克騰) 경계 안의 백이흑하이홍(百爾黑賀爾洪)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고북구 바깥에 있는
몽고의 여러 주목지(駐牧地)를 지나면서 북쪽으로는 객라목륜하(喀喇木倫河)를 받아들이고, 남쪽으로는
노합하(老哈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개원현의 서북쪽 변경 밖에 이르러서
흑이소하와 합류하여 변경으로 들어가서 요하가 된다. 《한서》 지리지나 《수경주(水經注)》에서 말한 요수의
근원은 모두 지금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한 지류에 대해서만 말하였으며, 동쪽에서 나오는 한 근원에
대해서는 《통전》에서 처음으로 말하였다.
○ 대양수(大梁水)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대량수는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소요수(小遼水)로
들어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자하(太子河)는 요양주(遼陽州)에서 북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로 옛날의 대량수로, 일명
동량하(東梁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살수선산(撒水禪山)에서 나와 위자곡(葦子谷) 동쪽에서부터 변방으로
들어가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주의 서북쪽에 이르러서 혼하(渾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해성현(海城縣) 서북쪽에 이르러서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양현의 대량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에 이르러서 요하로 들어간다.” 하였고, 《요사》 지리지를 보면, “동량하는 동쪽
산으로부터 나와 서쪽으로 흘러 혼하와 합류하여 소구(小口)가 되고, 요하와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또
태자하라고도 하며, 대량수라고도 한다.” 하였다.
《금사(金史)》 지리지를 보면, “동량하는 국명(國名)이 올로홀필자(兀魯忽必刺)이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태자하는 그 근원이 간라산(幹羅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500리를 흘러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북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이른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혼하에 이르러 합해져 소구가 된
다음 요하와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방여기요》를 보면, “태자하는 바로 옛 연수(衍水)로,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이 연수에 숨어 있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태자하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 오골강(烏骨江)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19년(645)에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자, 오골성(烏骨城)에서 군사
1만여 명을 보내어 백암성을 성원하였다.
○ 주에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부터 동북쪽 바다로 가면 오호도(五湖島)에 이르고, 다시 500리를 가면서
동쪽으로 바닷가를 따라가면 청니포(靑泥浦), 도화포(桃花浦), 행인포(杏人浦), 석인왕(石人汪),
탁타만(橐駝灣)을 지나서 오골강(烏骨江)에 이른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골강은 바로 오골성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강으로, 압록강에서 서쪽으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만 한다. 고구려
오골성조(高句麗烏骨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귀단수(貴端水)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영휘(永徽) 6년(655)에 정명진(程名振) 등이 고구려를 치고자 요수(遼水)를 건넜다. 고구려 군사들이
그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와 맞서 싸웠는데, 정명진 등이 격파하였다.
○ 살하수(薩賀水)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장(總章) 1년(668)에 이적(李勣)이 부여성(扶餘城)을 함락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부여성을 습격해 왔는데,
이적이 이들을 살하수(薩賀水) 가에서 격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설하수(薛賀水)로
되어 있다. 설하수는 개원현(開原縣) 근방에 있어야 한다.
○ 엄호수(淹淲水)ㆍ개사수(蓋斯水)
《후한서(後漢書)》 부여열전(夫餘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처음 북이(北夷)의 색리국왕(索離國王)의 시아(侍兒)가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왕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쳤다. 엄호수(淹淲水) -원주(原注)에, “지금 고구려
안에 개사수(蓋斯水)가 있는바, 이 강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였다.- 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떼 지어 물 위로 떠올랐으므로 동명이 이를 타고 건너갔다. 이어 부여(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엄시수는 개원현의 북쪽에 있어야 한다. 동사(東史)에서 지금의 대정강(大定江)을 그에
해당시키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개사수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홀한해(忽汗海)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왕성(王城)은 홀한해에 임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호이합하(虎爾哈河)는, 영고탑의 동남쪽이 모두 이 물가이다. 그 근원은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경계에서
나와 옛 회령성(會寧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90여 리를 흘러 영고탑성의 남쪽을 감돈 다음 다시
꺾어져서 북쪽으로 700여 리를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간다. 당나라 때에는 홀한하(忽汗河)라고
하였고, 발해 대씨(大氏) 때에는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였는데, 이 물로써 주 이름을 삼은 것이다.
《신당서》 지리지를 보면, “발해의 왕성은 홀한해에 임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금나라
때에는 또 금수(金水)라고 이름하였는데, 세속에서 금(金)을 안출호(按出虎)라고 하는바,
안출호수(按出虎水)가 이곳에서 근원하므로 금원(金源)이라고 이르며, 건국하고는 이를 인하여 국호를
금(金)이라고 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또 홀아해하(忽兒海河)라고 하였다.
○ 오루하(奧婁河)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걸걸중상(乞乞仲象)이란 자가 있었는데, 동쪽으로 달아나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쪽을 차지하고는 오루하(奧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굳게 지켰다. 걸걸중상이 이미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나라를 세우고는 발해라고 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루하는 승덕현(承德縣)에 있는데, 오루(奧婁)는 바로 읍루(挹婁)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루하는 태백산의
동북쪽, 홀한하와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성경통지》에서 승덕현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미타호(湄沱湖)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에서는 세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 미타호의 붕어[鯽]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미타호는 지금의
흥개호(興凱湖)인 듯하다.
○ 속말수(粟末水)
《후위서》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 숙신국(肅愼國)이다. 물길국에는 큰 강이 있어 폭이 3리 남짓 되는데,
이름을 속말수(速末水)라고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속주(涑州)는 속말강(涑沫江)과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대개 속말강은 이른바
속말수(粟末水)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혼동강은 길림 오라성의 동남쪽에 있으며, 지금의 이름은 송화강(松花江)이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낙니강(諾尼江), 흑룡강(黑龍江) 등과 만나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로 옛 속말수(粟末水)이다.
《위서(魏書)》를 보면, “물길국에는 큰 강이 있어 폭이 3리 남짓 되는데, 이름을 속말수라고 한다.” 하였고,
《당서》를 보면, “속말말갈(粟末靺鞨)은 속말수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물의 근원은 태백산에서 나와 북쪽에
이르러 타루하(它漏河)로 들어간다.” 하였고, 《요사》를 보면, “성종(聖宗) 태평(太平) 4년(1024)에 조서를
내려 압자하(鴨子河)를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치게 하였다.” 하였으며, 《금사》 지리지를 보면,
“상경로(上京路)에 혼동강(混同江), 송와강(宋瓦江), 압자하(鴨子河)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를 보면,
“혼동강은 바로 송아리강(松阿里江)이다. 일명 압자하라고도 하며, 일명 속말강이라고도 하고, 일명
송와강이라고도 하고, 일명 송화강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이르기를, ‘혼동강은
개원성(開元城)에서 북쪽으로 15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온다. 옛 이름은
속말하(粟末河)이며, 세속에서는 송와강이라고 부른다. 북쪽으로 흘러 금나라의 옛 회령부(會寧府) 아래를
지나 오국성(五國城)에 도달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송화강은 개원에서
동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금나라의 옛
남경성(南京城)을 지난 다음 회배강(灰扒江), 혼동강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바,
이는 송화강과 혼동강을 두 강으로 여긴 것이다.
이제 살펴보건대, 요나라 때 압자하를 혼동강으로 고쳤는바, 혼동강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오며, 그 지방 사람들은 이를 송아리강(松阿里江)이라고 부른다. 《금사》 지리지에는 송와강(松瓦江)이
있는데, 이는 송아리강의 음이 와전된 것이다. 《대명일통지》에 나오는 송화강은 바로 송와강의 글자가
변한 것이다. 《금사》 제기(帝紀)를 보면, ‘혼동강은 일명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한다.’는 글이 있는데, 이는
그 하류의 두 강이 서로 만나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혹자는 이 강을 송화강이라고 하는데, 이는
살합련강(薩哈連江)을 혼동강으로 여긴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살펴보건대, 금나라 세종(世宗)이
강신(江神)을 책봉(冊封)한 글에 이르기를, ‘강의 근원이 장백산에서 나왔다.’ 하였는바, 이 강이 혼동강을
지칭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송와강이니 송화강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음을 따라서 글자를 취한
것으로, 이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강은 동쪽과 서쪽 두 개의 근원이 있다.
동쪽 근원은 장백산 산꼭대기의 연못에서 나와 여울이 되어 빠르게 흐르다가 천 길이나 되는 폭포를
이루는데, 세속에서는 이를 토랍고(土拉庫)라고 한다.
여기에서 두 개의 물줄기로 나뉘어 흐르는데, 동쪽에 있는 것을 대토랍고(大土拉庫), 서쪽에 있는 것을
소토랍고(小土拉庫)라고 부르며, 여기에서 수십 리를 가서 다시 합류해 흐른다. 그 동쪽에 또
낭목낭고하(娘木娘庫河)와 합극통길하(合克通吉河)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장백산의 동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들어온다. 서쪽 근원의 물 역시 두 개의 물줄기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을
액흑눌음하(額黑訥音河)라 하고, 서쪽에 있는 것을 새음눌음하(賽音訥音河)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장백산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동쪽 근원의 물 및 여러 샘에서 나온 물과 합해져 한 물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흐르면서 여러 하천에서 흘러오는 물을 모은 다음 주성(州城)의 동남쪽을 돌아
북쪽으로 흘러 변경으로 나간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백도눌성(白都訥城)의 서쪽을 돈 다음
다시 북쪽으로 흘러 낙니강(諾尼江)의 물과 합류하고, 다시 동북쪽으로 돌아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오는
호이합하(虎爾哈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600여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흑룡강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200여 리를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오는 오소리강(烏蘇哩江)과
합류하고, 다시 조금 꺾어져서 북쪽으로 흘러 걸륵아흑(乞勒兒黑)과 진비아합(眞飛牙哈) 등 여러 부(部)의
지역을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 이 강은 발원지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는 곳까지 총 3500여 리를 흐른다.
○ 흑수(黑水)
《구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서로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른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룡강(黑龍江)은 흑룡강성(黑龍江城)의 동쪽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고, 완수(完水)라고도 한다. 또
실건하(室建河)라고도 하고,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객이객(喀爾喀) 북쪽 경계의
긍특산(肯特山)에서 나오는데, 그 지방 토착인들은 오란하(敖嬾河)라고 한다. 여러 개의 작은 물을 모아서
동북쪽으로 흘러 이포초성(泥布楚城)의 남쪽을 지나 내지(內地)로 들어와 흘러 아극살성(雅克薩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흑룡강성을 감돈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과
합류한다. 《북사(北史)》 오락후국열전(烏洛侯國列傳)을 보면, “오락후국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류한다.” 하였고, 《구당서》 실위열전(室韋列傳)을 보면, “대산(大山)의
북쪽에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이 있으며, 그 부락의 곁에는 실건하가 있다. 이 물의 근원은 돌궐(突厥)의
동북쪽 경계인 구륜박(俱倫泊)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나하(那河), 홀한하(忽汗河)와 합류하고,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의 북쪽과 북흑수말갈(北黑水靺鞨)의 남쪽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조주(肇州) 시흥현(始興縣)에 흑룡강이
있다.” 하였고, 《원사》 태조기(太祖紀)를 보면, “1년에 황제가 알난하의 근원지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흑룡강은 개원성(開原城)에서 북쪽으로 25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흑수말갈이 예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흑수라는 명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시작되었으며, 흑룡강이란 이름은 《금사》에서
나온다. 그 상원(上源)은 《북사》에 나오는 완수이며, 《구당서》에 나오는 실건하이다. 지금의 오란하가
정원(正源)인데, 오란하는 바로 《원사》에 나오는 알난하(斡難河)가 음이 변한 것이다.
○ 약수(弱水)
《진서(晉書)》 숙신씨열전(肅愼氏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신씨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에까지 닿아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읍루는 바로 말갈인데, 말갈은 북쪽으로 흑수 지방까지 닿아 있다. 그런즉 약수는 흑수인 듯하다. 그리고
《후한서》에는 이르기를, “부여(夫餘)의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하였는데, 역시 이 물을 가리킨다.
이상은 경계 바깥에 있는 수(水)이다.
[주-D001] 이이모(伊夷模) :
고구려 산상왕(山上王)의 이름이다.
[주-D002] 고궁(高宮) :
고궁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이다.
[주-D003] 정현(赬峴)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제5에는 “동천왕이 이때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죽령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李丙燾)는 함흥(咸興)의 황초령(黃草嶺)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65쪽 주》
[주-D004] 갈석산(碣石山) :
갈석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낙랑군(樂浪郡) 수성(遂城)이라는 설, 난하(灤河) 하류의 노룡(盧龍)이라는 설,
상곡군(上谷郡) 역현(易縣) 방면의 수성(遂城)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D005] 왕백후(王伯厚) :
백후는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의 자이다. 왕응린은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을 지었다
[주-D006] 김길보(金吉甫) :
길보는 송나라 김이상(金履祥)의 자이다. 김이상은 《통감전편(通鑑前編)》을 지었다.
[주-D007] 그 산꼭대기에 …… 주필하고서는 :
원문에는 ‘駐蹕其嶺數日’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8에 의거하여 ‘駐蹕其巓數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 백석산(白石山) :
어느 곳인지 자세하지 않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백석산이란 지명은 후세의 역사서나 지리서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금도서집성》 등을 보면 해성과 수암 사이에는 백산, 활석령, 백사산 등 백석산과
관련되는 산들이 있다. 그 가운데 백석산과 가깝다고 생각되는 산으로는 해성과 수암의 중간 지점에 있는
백사산이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8쪽》
[주-D009] 동모산(東牟山) :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 예전에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오동성(敖東城)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였으나, 최근에는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을 동모산으로 보려는 견해가 우세하여
굳어지고 있다.《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 신서원, 1994, 85쪽 주》
[주-D010] 천문령(天門嶺) :
천문령의 위치는 정겸(丁謙)의 장광재령설(張廣才嶺說),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승덕현(承德縣) 서쪽설,
송정등(松井等)의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渾河)의 분수령(分水嶺)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설 등이 있다.《발해의
대외 관계사 85쪽 주》 북한에서는 요령성 창무현 서쪽 산간 지대에 있는 고개라고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21쪽》
[주-D011] 백제(百濟) :
이곳에서의 백제에 대해 《동사강목》에서는 백제는 고구려의 오류인 듯하다고 하였고,《東史綱目 附錄 卷上
考異》 이병도 역시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너무도 거리가 맞지 아니하므로 고구려의 오기(誤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21쪽》
[주-D012] 보술수(普述水) :
《삼국사기》에는 ‘모둔곡(毛屯谷)’으로 되어 있다. 비류수(沸流水)와 같은 말이다. 동가강(佟佳江) 상류라는
것이 통설이다.
[주-D013] 큰 강 :
《양서(梁書)》에는 엄체수(淹滯水)로 되어 있는데, 엄체수는 소요수(小遼水)로, 오늘날의 혼하(渾河)로
비정(比定)된다.《삼국사기》에는 엄호수(淹淲水)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의 소주(小註)에 “일명
개사수(蓋斯水)이니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주-D014] 흘승골성(紇升骨城) :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 위치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으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환인현(桓仁縣)의 혼강(渾江) 일대로 비정되는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15] 비류수(沸流水) :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이다. 《고려사》에서는 이를 평양의 동북쪽으로 추정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평안도 성천(成川)으로 비정하였으나,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며, 동가강의 상류라는 것이 통설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4쪽 주》
[주-D016] 갈구(梁口) :
이병도는 갈구(梁口)를 동가강(佟佳江)과 그 지류인 부이강(富爾江)이 합류되는 곳인 지금의
부이강구(富爾江口)로 비정하였다.《국역삼국사기 263쪽 주》
[주-D017] 염난수(鹽難水) :
지금의 파저강(婆豬江)이다.
[주-D018] 구미(九獼) :
원미(元彌)의 잘못된 표기이다.
[주-D019] 귀단수(貴端水) :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20] 엄호수(淹淲水) :
엄니수(掩泥水), 엄시수(掩施水)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기되나, 이는
엄니수(掩泥水)를 잘못 쓴 것으로,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가 틀림없다.
엄리는 큰 물이라는 뜻인 ‘엄내’로서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나 또는 송화강 상류의 휘발하(輝發河)를
지칭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21] 색리국왕(索離國王) :
이병도는 색리(索離)는 고려(高麗), 혹은 구려(句麗)를 달리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22] 오루하(奧婁河) :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이다. 읍루하(挹婁河), 홀한하(忽汗河)라고도 한다.
[주-D023] 속말수(粟末水) :
길림성(吉林省)의 송화강(松花江)을 가리킨다.
[주-D024] 약수(弱水) :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약수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오며, 후대의 사서(史書)에는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이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병도는, 약수는 송화강(松花江)을 지칭하는 듯하다고
하였고, 북한에서는 흑룡강(黑龍江)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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