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수상집 서 있는 사람들(2021.10.27.)
샘터(1986)
법정
1954년 입산출가
조계산의 불일암
저서 영혼의 모음, 무소유, 산방한담
편저 불교성전, 말과 침묵
역서 선가귀감, 숫타니파아타, 법구경, 부처님의 일생 외
책 머리에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둘레에는 부쩍 서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의 붐비는 차안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계층에서 제자리에 앉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똑같은 자격으로 차는 탔어도 앉을 자리가 없어 자신의 두 다리로 선 채 끝도 없이 실려가고 있는 것이다.
서 있는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이 아니다. 이 땅에 태어난 한 겨레로서 같은 뜻을 지닌 모국어를 쓰고 있는 우리 이웃들이다. 오염된 근대화의 공기를 마시면서 갈수록 구겨져만 가는 이 시대의 풍속권 안에서 함께 앓고 있는 선량한 시민이다.
그들의 체질은 유달라, 이웃이 겪는 고통을 모른 체하지 않고 같이 신음하면서 앓는다. 앉은 자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차마 앉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이따금 그들의 눈매에서는 달무리 같은 우수가 깃들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달력을 걸어둘 벽이 없다. 꿇어앉아 마주 대할 상이 없다. 계절이 와도 씨를 뿌리지 못한다. 남의 집 처마 끝에서 지도가 붙은 수첩을 꺼내 들고 다음날 하늘표정에 귀를 모은다. 그들은 구름조각에 눈을 파느라고 지상의 언어를 익혀두지 못했다. 그들은 뒤늦게 닿은 사람이 아니라 너무 일찍 와버린 길손이다. 그래서 서 있는 사람들은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먼길의 나그네다.
이 잡문집의 이름을 서 있는 사람들 이라고 붙인 것은 그런 선량한 이웃들을 생각해서다. 그들이 저마다 제자리에 앉게 되는 날, 우리 겨레도 잃었던 건강을 되찾게 될 것이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그 말뜻을 요 근래에 와서 내것으로 실감한다. 침묵이 깔리지 않은 말은 그저 그런 소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책을 꾸미려고 하니 다시 부끄러워진다. 산에 들어와 살면서 청탁의 글에 번번이 응하지 못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양해를 구하고 싶다.
봄이 내 뜰에 내리고 있다. 한밤의 잠자리에서 자주 깨어난다. 그때마다 목이 마르다. 이 봄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삽과 괭이를 들고 산밭을 일구리라. 맨발로 부드러운 흙을 밟아볼 일이다. 침묵의 땅에 봄씨앗을 뿌릴 것이다. 그리하여 새 움이 트고 잎이 펼쳐지는 생명의 신비를 지켜보면서 우주 질서를 배우고 익히리라. 추상적인 허공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지에 뿌리를 내리면서 컬컬한 이 갈증을 달래리라.
1978년 봄 불일암에서 법정 합장
산거집
숲에서 배운다
부엌훈
불일암의 편지
직립보행
차나 마시고 가게
침묵의 눈
해도 너무들 한다
도둑과 선
바닷가에서
서울 순대속
모기 이야기
옛 절터에서
일일시호일
빈뜰
소리없는 소리
다선일미
독감시대
무관심
소창다명
외화도 좋지만
90도의 호소
파장
우리 시대를 취하게 하는 것들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그 눈매들
혼돈의 늪에서
다래간한담
나무 아래서 서면
지식의 한계
눈과 마음
일에서 이치를
모두가 혼자
가을이 오는 소리
말없는 언약
책에 눈멀다
집행하는 겁니까
수묵빛 봄
시물
산을 그린다
최대의 공양
잦은 삭발
悲
불교의 구원관
호국불교
장의 불교
벽돌을 갈아 거울을
불교의 경제윤리
공동체의 윤리
절은 수도장이다
悲
출세간
출가
무공덕
현자의 대화
선문답
초주선사
나무에 움이 튼다
마하트마 간디의 종교
너 어디 있느냐
입산하는 후배에게
이 한 권의 책을
현전면목
시들지 않는 꽃
청백가풍
그들을 찾기 위해
승단과 통솔자
삭발 본사
삼보정재
중 노릇이 어렵다
중노릇이 어렵다는 것은 남의 복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심전이 시원치 않으면서 어떻게 남의 복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또 중노릇이 어렵다는 것은 승보의 기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승보란 무엇인가. 더 말할 것도 없이 남의 귀의처가 돠어야 한다는 뜻.
수행승의 본질적인 사명은 무명의 바다와 비리의 늪에서 시시가각 침몰해가고 있는 끝없는 이웃들을 건져내는 일이다. 그것은 공양의 대가로서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 이런 의무를 등질 때 우리는 복전과 승보 대신 놀고 먹는 중놈들 소리를 면할 길이 없다. 어디 한번 다같이 자문해보자. 오늘 우리들은 이 시대와 사회를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