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14> 바닷길로 연행길 오른 사신을 위해 쓴 '이식(李植)'의 글
벌벌 떨며 비방을 두려워하고 탄핵을 꺼리다(慘慘惴惴 懼譏畏彈·참참췌췌 구기외탄)
폐백을 늘리면 재물을 유용하는지 의심하고, 수행 인원을 더하면 사사로이 함을 의심하고, 배에 기계를 더 설치하면 겁먹었다며 의심하고, 편한 길로 가려 하면 안일하다고 의심한다.
의심이 끊이지 않고 비방이 질풍처럼 일어나 사신으로 떠나는 대부로 하여금 참담하게 벌벌 떨며 비방을 두려워하고 탄핵을 꺼리게 하여 도리어 북경 가는 길이 얼마나 아득하고 바닷길이 얼마나 험한지조차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아! 이래서야 되겠는가?
增幣贄則疑其貨, 益傔從則疑其私, 加舡械則疑其怯, 取便途則疑其逸. 疑而不已, 謗詆飄起, 使夫行役之大夫, 慘慘惴惴, 懼譏畏彈, 反不覺燕齊之爲邈溟渤之爲險也. 嗚呼! 其可乎哉.
택당 이식(李植·1584~1647)이 1625년 성절사 겸 동지사로 연행길에 오른 전식(全湜·1563~1642)을 전송하며 쓴 글 ‘送聖節兼冬至使全公湜航海朝燕序(송성절겸동지사전공식항해조연서)’로, 그의 문집인 ‘택당집(澤堂集)’에 실려 있다.
전식이 정사(正使) 신분으로 사행길에 오른 당시는 후금이 요동을 점령하고 심양으로 수도를 옮긴 때라 요동벌을 관통하는 육로를 이용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1621년부터 1637년까지 황해 북단과 발해만을 잇는 해로를 통해 사신을 파견해야 했다. 바닷길 사행은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절단이 익사를 당하는 조난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다. 사행길의 사정이 이러한 데도 조정에서는 사행 비용 등을 둘러싸고 비방하는 공세가 심했다. 나라의 명을 받고 목숨을 걸고 떠나는 전식(全湜)에게 반대 당에서는 온갖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이식은 글의 앞쪽에서 성대했던 서주 시대에 사신을 파견하며 부른 노래인 ‘황황자화(皇皇者華)’를, 쇠퇴기인 동주 시대에 비방당하는 것을 꺼려 사신을 가는 대부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의 시 ‘북산(北山)’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식은 위의 글을 써 전식의 마음을 달래주고 비방 여론에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원장
국제신문(www.kookje.co.kr),
@ 전식 [ 全湜 ]
이칭별칭 | 자 정원(淨遠), 호 사서(沙西), 시호 충간(忠簡) |
유형 | 인물 |
시대 | 조선 |
생몰연도 | 1563년 ~ 1642년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옥천(沃川) |
관련사건 | 임진왜란, 병자호란 |
대표관직(경력) | 예조좌랑, 울산판관, 전라도도사, 예조정랑, 병조참의, 대사간, 예조참판, 대사헌 |
[네이버 지식백과] 전식 [全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식 [ 李植 ]
정의
조선시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좌의정 이행(李荇)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직된 이안성(李安性)이고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로 공조참판 윤옥(尹玉)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이식은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1613년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친 정7품에 해당하는 설서(設書)를 거쳐 1616년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선전관을 지냈다.
1618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계에서 은퇴하여 경기도 지평(砥平: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했다. 그 후에 남한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호를 택당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한다. 1621년 관직에 나오라는 명을 계속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교분이 있었던 친구들이 조정의 주요직에 진출하게 되자 발탁되어 이조좌랑에 등용됐다. 이듬해에 부수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625년(인조 3) 예조참의·동부승지·우참찬 등을 역임했고 다음해에 대사간·대사성(大司成)·좌부승지 등을 지냈고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역임했다. 임금의 종실을 사사로이 기리고 관직을 이유 없이 높이는 일이 법도에 어긋남을 논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간성현감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633년에 부제학을 거쳐 1636년에 대제학이 되었고, 1640년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식은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나라를 배척할 것을 주장한다고 하여 중국의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다. 돌아올 때에 다시 의주(義州)에서 청나라 관리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1643년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1644년 예조·이조의 판서 등 조정의 주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646년 별시관(別試官)으로 과거 시험의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그가 출제한 문제에 역모의 뜻이 있다고 하여 관직이 삭탈되기도 했다.
이식은 문장이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로 꼽혔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됐다.
문집으로는 『택당집』이 전하는데 한시의 모든 갈래에 두루 능숙했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체로 정경의 묘사가 뛰어나고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풍광을 읊은 시가 많다. 고체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오언율시에 특색을 발휘했다.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두시비해(杜詩批解)』 등을 저술했으며 『수성지(水城志)』·『야사초본(野史初本)』 등을 편찬했다.
김택영(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고문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는 「사간원차자(司諫院箚子)」 등의 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됐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86년 영의정에 추증됐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이식 [李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황황자화 [ 皇皇者華 ]
≪시경(詩經)≫ 소아(小雅) 6편 중의 한 곡(曲). 녹명(鹿鳴)•사모(四牡)와 함께 임금[天子]이 여러 신하와 귀한 손님에게 잔치를 베풀고 사신(使臣)을 송영(送迎)하는 데 쓰인 악가(樂歌)였는데, 그 후에 연례(燕禮)와 향음주(鄕飮酒)에서 쓰였음. 조선 세종 때 궁조(宮調)로 된 소아(小雅) 6편을 모두 조회아악(朝會雅樂)으로 채용하였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황황자화 [皇皇者華]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惨惨
① 초췌한 모양. ② 걱정하는 모양. ③ 암담한 모양.
@ 慘 참혹할 참, 우울해질 조
① (참혹할 참)
② 참혹하다(慘酷--)
③ 혹독하다(酷毒--)
@ 惴惴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
@ 惴 두려워할 췌, 꿈틀거릴 천
① (두려워할 췌)
② 두려워하다
③두려워 벌벌 떨다
@ 譏 비웃을 기
① 비웃다
② 나무라다
③ 기찰하다(譏察--: 행동 따위를 넌지시 살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