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중관계에서 줄곧 쟁점이 된 것으로는 조공과 사대정책을 둘러싼 해석을 우선적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소위 식민사관 문제와 맞물리다 보니, '일제에게 망한' 조선이 전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규정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조공과 사대를 보는 관점은 식민사관을 따르건 부정하건, 식민사관의 그림자에 강하게 구속되어 있는 분위기다.
일제강점기에는 사대를 망국의 원인으로 보는 해석이 대종을 이루었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 인식과 해석에서 거의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민족계열과 사회주의계열과 친일계열 모두 사대를 비판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사관을 대표하는 신채호(申寀浩;1880~1936)가 망국의 원인으로 유교적 문약과 사대주의를 꼽은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편 1920년부터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소위 '문화적 민족주의' 주창자들은 1930년대에 대거 친일지식인으로 전향했는데, 이들도 조선의 사대주의를 극력 비난했다. 이 두 그룹은 사대의 이념적 뿌리가 유교에 있다고 보아 유교지상주의와 사대주의를 함께 비판하고, 조선은 속히 그러한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가 하면,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들도 사대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한중관계에 대해 매우 조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정체성론(停滯性論), 타율성론, 지리적 결정론, 숙명론 등 소위 식민사관을 형성하는 네 개의 축에 모두 들어맞는 대표적 예증으로 조선의 사대주의를 꼽는 데 누구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역사를 다룬 세 그룹 모두 입장과 시각과 의도는 서로 달랐지만, 조선의 사대정책에 대해서만큼은 모두 비판적이었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광복(1945) 이후 식민사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학계의 노력이 다방면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추세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내재적 발전'이라는 큰 틀이 항상 놓여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내재적 발전 요인을 찾는 것이야말로 정체성과 타율성을 강조한 식민사관을 깨뜨릴 수 있는 좋은 반증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60~70년대에는 실학 연구가 붐을 이루었고, 1970~80년대에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맹위를 떨쳤으며, 80년대 이후로는 붕당정치, 조선중화론, 진경문화론, 중화계승론 등이 연이어 등장해 유행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이 밖에도 조선사회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신흥사대부론이나 사림론도 모두 마찬가지 배경에서 제기되어 유행했다고 할 수 있다...[중략]
1945년 이후 조선시대 한중관계에 대한 수정주의적 재조명 또한 바로 이런 맥락에서 등장했다. 정체와 타율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사대를 하나의 긍정적 외교정책으로 새롭게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그 결과,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행위는 실리를 위한 적극적 외교라는 해석이 대폭적으로 수용되었다. 그 근거로는 특히 조선 건국 직후 조선과 명 사이에 있었던 조공사행의 횟수 논란(3년1공 또는 1년3공) 및 조공에 따른 하사품 뿐만 아니라 사행에 수반되는 제반 무역 등 경제적인 손익만 따져보아도 조선에 그다지 손해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주로 언급되었다. 이런 수정주의적 해석 또한 이유야 어떻든 그 기저에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볼 때 조공은 역시 조선에게 큰 부담이었다. 또한 명의 징은(徵銀)을 미리 우려해 은광 개발에 미온적이었고, 여타 광산이나 산업개발에도 적극적일 수 없었던 부수적 역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요컨대, 조선이 조공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는 해석은 지나치게 민족주의 시각으로만 조공 문제에 접근한 초기 연구자들의 성급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 조정이 각종 조공품목으로 인해 부담을 느꼈다는 기록은 실록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명이나 청도 조선 사행단을 위해 지출해야 하는 경비 문제로 경제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적 측면만 놓고 볼 때, 조공은 '윈-윈'이라기보다는 '루즈-루즈(lose-lose)'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역시 조선 입장에서는 자국에 이익이 되니까 조공을 했음에 틀림없고, 명과 청도 자국에 이익이 되니까 그런 관계를 계속 유지했음에 틀림없다. 즉 종합계산서를 뽑는다면 역시 '윈-윈'인 셈으로, 이는 피차간에 경제외적인 이득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손실을 감수한 조공일지라도, 그것마저도 실리를 위한 조공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부담스러운 조공의 대가로 경제외적인 다른 무언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잦은 외침에 시달렸던 고려의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조선이 얻은 대표적 이익으로는 '명질서'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 자체로 북쪽으로부터의 침입을 예방하고 국방비를 절감하는 효과를 누렸을 뿐 아니라, 선진 문물(서적, 군수품, 사치품)의 수입이나 왕실의 정통성 강조 등 허다한 경제외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청에게는 치욕스러운 항복을 감수해야 했지만, 조선이 경제적으로나마 일단 '청질서'에 편입된 후로는 비슷한 이득을 얻었다. 왕조의 유지와 안정, 황제의 책봉을 통한 왕실의 안정, 각종 문물의 유입 등은 조공을 통해 조선이 감수한 손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득이었다. 심지어 강희제(康熙帝;1661~1722)와 숙종(肅宗;1674~1720) 때, 비록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조선이 극심한 흉년으로 고통을 받을 때 청으로부터 미곡 3만 석과 은 5만 7000냥을 유상무상으로 제공받은 바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록 이념적으로나 감정적으로는 청을 절치부심의 원수로 여겼을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안정된 청질서의 우산 속에서 왕조의 안녕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이다. 근대의 파고를 맞아 조선이 다른 외국에게 국권을 상실하기 전에 청일전쟁(1894~1895)의 발발과 청나라의 패배가 선행 조건으로 작용했던 사실은 결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계속](pp.59~63)
- 계승범,『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푸른역사, 2009)
첫댓글 조공과 사대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기보다는 중국중심의 화이론적 세계관이 반영된 유교성리학에 경도되어 탁상공론을 일삼고 상공업을 천시 여기고 문약에 빠져 상무정신을 결여한 것이 망국의 한 원인이 아닐까요? 고려시대 몽골간섭기 이전까지는 그래도 민족적 주체성이 확고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