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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9. 묵상글 ( 대림 제1주간 토요일. - 잃은 양인가, 길 잃은 양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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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9. 대림 제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잃은 양인가, 길 잃은 양인가?
대림절의 독서와 복음의 구조는 이사야 독서의 예언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실현되었다는 복음의 구조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구조입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하게 되리라는 예언의 연속입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너희의 눈이 스승을 뵙게 되리라.”
“뒤에서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오늘 복음은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주님께서
병자와 가난한 자의 기를 살려주시고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은 기가 꺾인 양들의 목자입니다.
목자인 주님께서 오시기 전엔 목자가 없어서
양들의 기가 꺾여 있었는데 이들에게 주님은 참 목자이십니다.
참 목자는 우선 기가 꺾인 양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은 가엾은 마음이 드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크고 진실할수록 가엾지 않은데도 괜히 가엾게 봅니다.
그러니 아플 때는 얼마나 더 가엾게 여기고 돌봐주고 치료해주겠습니까?
아니, 병이 나기도 전에 그리고 몸의 병처럼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병과
기색을 살펴 기가 꺾여 있는지까지 살펴 몸과 마음의 병을 미리 예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목자들은 어떻겠습니까?
기를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기를 꺾을 것이고,
그러니 가엾은 마음은커녕 잔인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없을수록 그의 고통보다는 잘못을 보기 마련이고,
그러니 그런 그가 가엾기보다 밉거나 꼴 보기 싫을 것이며,
꼴 보기 싫으니 내 앞에서 꺼지라고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목자에게는 흩어진 양들이 잃은 양이 아니라 길 잃은 양입니다.
공동체가 품지 못해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
양이 못돼처먹어서 무리에서 이탈하고 그래서 길을 잃어버린 양이며
그래서 전혀 가엾지 않고 오히려 괘씸하여 찾지 않고 내버려 둡니다.
이렇게 해서 잃은 양을 찾으려고 참 목자이신 주님께서
하늘에서 오신 것이 육화/성탄이고 찾아다니신 것이 복음 선포 여행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만 찾아 돌아다니시지 않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자를 모으시고 파견도 하시는데
우리도 여기서 제외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문하게 됩니다.
너는 그런 능력도 없고 열성도 없고 자격도 없다고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를 이 모집과 파견에서 제외하시면 좋을까요?
반대로 주님은 우리를 복음 선포자로 부르시고 파견하려고 하시는데
우리가 그것 싫고 귀찮다고 거부하지는 않는가요?
우리에게 그들은 잃은 양인가, 길 잃은 양인가?
이런 성찰과 반성을 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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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9.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오늘 <말씀 전례>는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고 합니다.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도 “주님은 마음이 부서지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시 147,3)라고 노래합니다. <복음>에서는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마태 9,36)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지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 보여주듯이,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우리도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
그러니 우리는 그 마음을 ‘이미’ 우리 가슴에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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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9. 대림 제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늘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줄여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가정도 화목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이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됩니다. 내 일을 앞세우고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과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 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으로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영적 자산을 축적해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연장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돌보는 일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자로써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가 필요로 합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그 역할을 해야 하겠지만, 성직자, 선교사, 수도자들이 많이 양성되고 배출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하겠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분께서 무상으로 주신 은총이고, 나는 그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모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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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9.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홍보할 때입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문사의 어려운 형편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저도 ‘성냥팔이 소녀’처럼 약간은 측은한 모습으로 ‘신문팔이 소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저 자신도 측은한 생각이 들고, 어깨가 움츠려드는 것을 느낍니다. 다른 하나는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영화대사처럼 밝은 모습으로 홍보하는 것입니다. 저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처럼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많은 보물이 묻혀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보물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보물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미주지역 한인 가톨릭 공동체의 소식이라는 보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등잔에 ‘기름’을 준비한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겸손’이라는 기름이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는 ‘인내’라는 기름이 있습니다. 교우들이 가톨릭평화신문을 구독하는 것은 신문사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난번 LA ‘성 프란치스코 한인성당’에 홍보를 갔을 때입니다. 공지사항 시간에 본당신부님께서 가톨릭평화신문 홍보를 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학술지를 보는데 어느 날 학술지가 폐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좋은 논문과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는 학술지가 폐간된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학술지 대표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폐간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학술지라고 해도 독자들이 정기적으로 구독하지 않으면 폐간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주지역에 교회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톨릭신문이고, 다른 하나는 가톨릭평화신문입니다. 안타깝게도 2년 전에 가톨릭신문은 본국으로 철수하였습니다. 팬데믹을 지내면서 운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미주 지역에는 가톨릭평화신문 하나만 남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가톨릭평화신문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톨릭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어야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구독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미사 후에도 교우들에게 신문구독을 권하였습니다. 저보다 더 열심히 신문홍보를 위해서 앞장서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에 와서 5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떤 겨울은 팬데믹과 함께 시작하였습니다.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봄’은 어김없이 왔습니다. 어떤 겨울은 무릎까지 눈이 쌓였지만 ‘봄’은 또 다시 찾아왔습니다. 어떤 겨울에는 지붕에 누수가 있었고, 어떤 겨울에는 눈 폭풍이 불었지만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섯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매년 겨울이 지나면 선물처럼 봄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마치 겨울을 보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따뜻한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 한데 모은 듯하리라.” 얼마나 멋진 희망의 메시지입니까?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박노해 시인의 시 “별은 너에게로”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두운 길을 걷다가/ 빛나는 별 하나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구름 때문이 아니다/ 불운 때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네가 본 별들은/ 수억 광년 전에 출발한 빛/ 길 없는 어둠을 걷다가/ 별의 지도마저 없다고/ 주저앉지 말아라/ 가장 빛나는 별은 지금/ 간절하게 길을 찾는 너에게로/ 빛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니” 대림 시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빛의 속도로 우리에게 오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뜨거운 가슴으로 희망을 품고 빛나는 별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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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9. 대림 제1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오늘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골자는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너희가 가거라, 가서 너희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어 주어라.”라고 말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입니다. ‘찾아가라는 것과 거저 주어라.’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찾아가는 것은 쉬울지 모릅니다. 어느 누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지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저 주는 것이 쉬울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저 주는 것은 나 스스로가 거저 받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노력 없이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노력하며 부지런히 살았고, 또 살고 있기에 우리가 가진 것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하고 노력한 만큼 얻어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즉, 하느님이 나의 건강이나 가족의 평화나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저 받았다고 말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찾아가서 거저 주어라. 이 공식은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공식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여린 여인을 통해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셔서 우리에게 거저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이게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꾼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길을 함께 걷는 것입니다.
아킬레스
‘아킬레스’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에게 ‘약점’, 혹은 ‘급소’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아킬레스의 엄마는 테티스입니다. 테티스는 신이었지만 인간의 왕가 결혼하였고 그래서 아킬레스는 테티스의 불사의 능력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테티스는 아킬레스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해 저승을 흐르는 스틱스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이 강물에는 불사의 힘을 가져오는 힘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친이 아킬레스의 발뒤꿈치를 잡고 강물에 담갔기 때문에, 그 부분만 불사의 능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훗날 아킬레스는 불사의 능력을 얻지 못한 발뒤꿈치에 독화살을 맞아 죽게 됩니다.
불사의 몸이라고 자부하더라도 아킬레스는 있습니다. 오히려 아킬레스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들추고 싶지 않은 아픔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아킬레스입니다.
아킬레스가 약점이 아닌 서로 감싸 줄 수 있는 부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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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9.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떤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신을 믿는 사람을 어리석다면서 늘 비웃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등산에 갔다가 미끄러져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떨어지던 중에 간신히 나뭇가지 하루를 움켜쥐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사람 살려!”라고 외쳤습니다. 너무 외진 곳이라 그럴까요?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신이 없다고 주장했던 자신이었지만, 없다고 했던 그 신이 실제로 있어서 자기를 살려줬으면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살려 주세요. 만약 살려만 주신다면, 당신을 굳게 믿겠습니다.”라고 간곡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살려면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이 소리에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하느님의 음성이라고 믿고서 손을 놓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즉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미쳤어요? 이 나뭇가지를 어떻게 놓아요?”
현재 이 무신론자에게 나뭇가지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절대 놓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손에 힘이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이라고 믿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것을 쫓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붙잡을 수 있는 것, 또 붙잡아야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의 뿌리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논리는 내려놓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신앙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붙잡아야 하는 하느님을 붙잡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부르심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하십니다.
자기 편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를 많이 만납니다. 열심히 미사도 참석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집안일을 등한시합니다. 밖에서는 열심하고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말을 듣지만,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 그 자체입니다. 보이기 위한 신앙은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뜻에 반대되는 가짜 신앙일 뿐입니다.
이런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하게 응답해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하여 나를 버리는 이런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이런 사랑에서 우리는 복된 삶과 더불어 세상에 나온 보답을 얻으며 세상의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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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9.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 치유의 여정
-우리의 평생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예수님-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9년전 2016년 스승의 날에 수도원을 찾았던 지금은 56세, 60대에 접어든 옛 초등학교 제자 소화데레사가 작은 액자 안에 “스승의 은혜”라는 연필로 쓴 가사가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조용히 영원한 평생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만세육창후 불러봤습니다. 지금도 거의 10여년 동안 매해 스승의 날 전후로 옛 제자들이 수도원을 방문하여 불러주는 노래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참 스승이자 주님인 예수님이요 자주 주님을 생각하며 자주 불러보는 노래입니다. ‘어머니 은혜’대신 ‘성모님 은혜’로 불렀던 노래처럼 말입니다. 선생은 많은데 스승은 없고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없다는 말은 하두 많이 들어 이젠 진부하게 생각되는데 사실이 그러합니다.
도대체 보고 배울 어른이, 스승이 없다는 한탄들입니다. 모두가 보고 배웁니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스승은 필수입니다. 인생은 유한한데 정말 보고 배울 것은 끝이 없습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진실도 선함도 아름다움도 겸손도 기도도 순종도 침묵도 경청도 참 보고 배울 것들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배움에 있어 모든 이들은 초보자요 평생 배움의 열정을 지닌 평생학인으로 평생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길을, 희망을, 꿈을, 빛을, 삶의 중심을, 삶의 의미를,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곧장 뒤따르는 영혼의 병, 정신의 병, 마음의 병입니다. 그러니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참 스승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필수의 정답(正答)입니다. 사실 회개와 겸손으로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영원한 스승인 예수님을 반영하는 삶의 스승들입니다. 바로 스승중의 참스승, 영원한 스승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스승이 없다 탄식은 금물입니다. 참으로 평생 주님께 배워야 하는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주님의 평생 학인이자 제자인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야 평생 진리추구, 지혜추구의 영혼 건강의 수행자로, 구도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배움의 여정이나 배움에 지칠줄 모르는 열정은 필수입니다. 자비하신 연민의 주님이야 말로 우리의 평생 스승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해 주시리라.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들으리라,”
바로 이런 스승이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또 오늘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일상의 삶을 통해 만나는 예수님이요, 평생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이자 친구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스승이자 친구인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영적우정은 얼마나 중요하겠는지요! 그래서 끊임없는 한결같은,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와 회개, 깨어 있는 삶입니다.
참 자랑스럽고 고마운 것은 주님은 우리의 평생 스승이요 우리는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제자요 평생학인에다가, 주님은 우리의 평생 치유자 의사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스승이자 치유의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소개되는 치유자 주님이십니다. 바로 대림시기 치유의 은혜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들이 생기리라.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
대림시기 밝아오는 주님 치유의 빛은, 마침내 주님 성탄날에는 절정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인 동시에 치유자 의사인 것입니다. 평생 치유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치유보다는 힐링이라는 영어가 더 많이 회자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힐링의 주님, 치유의 주님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나 수도원은 주님 힐링의 집, 힐링의 센터이며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힐링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힐링에 호들갑을 떨지만 우리 천주교회는 이미 그 예전부터 최고의 진짜 주님의 힐링센타로 자리 잡아 온 것입니다. 배움과 치유가 동시에 이뤄지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가르침의 스승이자 병을 고쳐주시는 연민의 사랑이 가득한 치유자 의사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서두가 단적으로 착한목자 예수님은 스승이자 치유자로 그 신원이 환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바로 이런 스승이자 치유자의 역할은 그 제자들을 통해 그대로 전수됩니다. 당대의 제자들만 아니라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치유요 평생 주님과 만남의 여정, 치유의 여정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진리에 굶주린 세상, 영육으로 병든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1.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2.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3.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4.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주님을 닮아 주님의 제자이자 치유자 역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살아 있는 하늘나라의 현존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삶의 중심을, 삶의 길을, 삶의 희망을, 삶의 빛을 잃어 영적으로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영적으로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영적 나병 환자들을 깨끗이 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화답송도 우리를 격려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길 없네.”
과연 마귀들이 악령들이 괴물들이 들끓는 작금의 세상입니다. 현대판 무수한 소비주의, 쾌락주의, 금전만능주의, 물질주의, 세속주의, 각자도생-승자독식의 이기주의, 가치관 상실, 탐욕, 중독, 광신의 이념들을 통해 끊임없이 준동하며 우리를 유혹하는 온갖 악의 세력들을 쫓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치유자이신 주님과 함께 하나되어 살 때 천하무적, 백전백승의 삶이겠습니다. 이런 주님을 모시는 이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희의 스승, 저희의 치유자이십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희망, 저희의 기쁨,
저희의 길, 저희의 빛,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하나되어,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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