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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0주일
<미사 때마다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하는 예방주사 같은 한 마디>
복음: 마르코 3,20-3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령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성령을 모독할까요? 성령에 자신 안에서 행하려고 하는 일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방은 100% 가능하지만, 일단 걸리면 100% 죽는 병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광견병입니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특이하게도 우리 몸의 면역세포를 다 피해 다닙니다. 뇌까지 도달하기 전까지는 세포도, 신경도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뇌에 도달하면 100% 사망입니다. 아직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지만, 광견병은 예방주사만 맞으면 100% 예방됩니다. 그런데도 한 해에 지구상에서 6만 명 정도가 광견병으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자기 몸 안에 광견병 예방주사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 광견병 바이러스는 무엇이겠고 또 그 광견병을 무력화시키는 예방주사는 무엇일까요? 광견병은 ‘공수병’이라고도 하는데, 물을 무서워해서 목이 말라서도 죽습니다. 사실 물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을 거부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성령은 마치 성모 마리아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십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긍정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잉태시키지 못합니다. 사람 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무라이가 된 천민 아이는 기둥에 들어가 죽은 어머니의 피로 도망치고 싶은 이기적인 자아가 죽었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의 자아, 곧 뱀을 죽이러 오시는데 그것을 긍정하고 있다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게 됩니다.
2002년 4월 29일, 독일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총기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에르푸르트라는 도시의 구텐베르크 김나지움(10~19세 학생들이 다니는 인문계 학교)에서 퇴학당해 앙심을 품은 한 학생이 교사 열두 명과 여학생 두 명 등 총 열여섯 명을 죽인 사건입니다.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떨어진 로베르트(19세)는 기말시험을 치르지 않기 위해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각되어 퇴학 처리되었고, 복수심에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한 교사가 나섰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총은 난사하는 그 앞에 60세의 라이너 하이제 교사는 복면을 쓴 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복면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가르친 학생 로베르트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이제 교사는 자기 가슴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총을 쏘고 싶으면 쏴라. 내 눈을 보고 방아쇠를 당겨보란 말이다.”
로베르트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오늘은 실컷 쐈습니다. 이제 재미가 없네요.”
로베르트는 순순히 총을 내려놓았고 하이제 교사는 그를 빈 교실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습니다. 잠시 후 로베르트는 교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 아래]
하이제 교사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임을 인정할 때 영향을 줍니다. 사실 퇴학 당한 것은 로베르트 자기 탓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마다 하는 “내 탓이요!”는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만들고 말씀과 성체로 오는 성령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기도입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원수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힘들고 암에 걸려 죽어가는데 그것이 어떻게 나의 탓입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수 같은 인가도 용서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고정원 씨 같은 경우입니다. 그는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탓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새워 기도했고 성령께서 용서할 힘을 주셔서 그를 양자로 삼게 하셨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분 앞에서 부족한 게 다른 사람 탓이라고 하면 그 선물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마르3,20-35: 사탄은 끝장이 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어 당신께로 돌아가게 하시려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다.오늘 복음에서 보면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 마귀가 들렸다느니,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22절)고 한다.아마 이것은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악마는 언제나 분열시키는 존재이지 일치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제1독서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하느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그들의 눈이 밝아져 알게 된 것은 자기들이 맨몸이었다는 것이며,그래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창세3,9)하실 때,주님께로부터 몸을 피하여 숨는다.아담은“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10절)하느님께서 아담을 추궁하신다.그러니까 아담은“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2,23)라고 했던 하와에게 그 탓을 돌리고 있으며,하와는 뱀에게 탓을 돌리고 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인간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며,그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리고,두 번째는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케 하며,마지막으로 자연과도 관계가 악화되게 만든다.이렇게 사탄은,베엘제불은 일치시키는 자가 아니라,분열시키는 자이다.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이렇게 먼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며(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나의 죄를 알지 않을까?생각),자연과도 관계가 악화(가시덤불과 엉겅퀴)된다.사탄으로 말미암아 단절된 이 모든 관계회복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셨는데,그 아들이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사탄을 물리친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억지이며,그것이 바로 당시 지도자들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사탄과 악령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은 성령 때문이었다.성령은 모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영광으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선물이었다고 말했다.성령의 첫 열매는 용서라고 하지 않았던가!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슬러 갈라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모아들이신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성령께서는 서로 맞서 갈라선 죄를 용서하시고,깨끗해진 사람들 안에 사신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었다.”(사도4,32)라는 말씀처럼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이러한 성령을 거슬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성령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라고 하였다.그러기에 우리가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나 자신을 그분 앞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작은 예를 들어보면,우리는 죄를 짓는 인간들이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이런 죄는 하느님께서도 용서해주시지 않을 거야!하면서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고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그분 앞에 언제나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가족이 된다.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다는 사실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서 더욱 복되신 분이시다.마리아는 말씀을 낳으셔서가 아니라,말씀을 지키고 실천하셨기에 더욱 복되시다.마리아께서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관계도 그 구원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고,당신을 낳으신 분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그 여인도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다.”(마태12,50;루카8,21)라고 하신다.진정 하느님 안에서,즉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살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가족이 된다.내가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말씀을 실천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라고 한 사람에게 주님께서는“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예수님의 형제들,즉 혈육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다.(요한7,5참조)그 혈연관계가 무슨 득이 되었나?마리아께서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잉태하였을 때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모시지 않았더라면,어머니라는 혈족관계도 마리아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참으로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제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나날이 새로워지는 내적인간으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으로 가야할 것이다.오늘 복음과 독서를 묵상하며 언제나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며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고 그렇게 기도하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생로병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지요. 인간이라면 이 네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뜻밖의 사건으로 ‘늙음’을 겪지 않는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모두를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生)’에 대해서는 기쁘게 받아들이지만(물론 이 역시 자기의 기쁨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쁨입니다), ‘로병사(老病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하려는 우리입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그 순간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본당에서 봉성체하며 만났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봉성체 갈 때마다 이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너무 아파서 못 참겠는데 자녀들이 병원에도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자녀들이 수시로 병원에 모시고 갔지만, 그때마다 의사는 아무런 병이 없다는 대답만 하셨습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이 미웠던 것입니다. 그 미움이 커져서 더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고통, 나 혼자 이를 이겨내야 하니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혼자면 더 아픕니다. 나눠야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만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 스스로 외톨이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프다고 가족들을 계속 욕하는데 과연 사랑으로 계속 받아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를 낮춰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낮춰야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겸손하라 명령하신 것은 우리 고통을 조금이나마 낮춰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또 율법학자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그들 모두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거부하려는 마음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모독한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을 모독한 죄는 모두 하느님께 대항하는 행위이기에 무거운 죄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한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할까요?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즉, 성령을 모독한 죄는 회개하지 않는 죄, 주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함께하려고도 하지 않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함께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탐욕은 모든 것을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한다(몽테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불을 끄고 눈을 감고 말씀을 곱씹는 순간
제 삶이 곧 렉시오디비나가 됩니다.
제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묵상의 소재고 재료입니다.
우리 모두가 걸어다니는 성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노트를 쓰는 시간이 적어도 저에게는
영적으로 살찌우고 목마르지 않을 샘물을 마시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주님의 말씀에 젖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미친 사람과
세상의 가치에 미친 사람 중
정말 미친 사람이 누구인지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김으로써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말씀이 참되다는 것은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모아진다는 것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복음말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0-3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