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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통상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인(聖人)들의 축일은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분들께서 돌아가신 날, 다시 말해서 천상 탄일을 축일로 정해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천상 탄일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탄생 축일을 경축합니다. 그에게는 축일이 두 개입니다. 탄생 대축일과 수난 기념일.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등급이 높은 성인인 것입니다. 그를 성인 중에서 대 성인으로 인정하며 각별한 공경과 예우를 갖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0년 세월을 나자렛에서 조용히 지내셨듯이, 세례자 요한 역시 오랜 세월 광야에 머물면서 침묵과 기도 속에 내공을 닦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외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는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으로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헤로데 조차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혹시 이분이 왕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럴 때 마다 세례자 요한은 정확하고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오. 나는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 한 줄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례자 요한을 성인 중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그가 지녔던 탁월한 겸손의 덕 때문입니다. 이토록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신원의식은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무리 없이 연착륙하실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사제 수도자들, 그리스도인들 역시 때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너희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던질 때, 솔직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 같은 존재입니다. 주님 자비를 힘입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주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오늘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합니다. 저는 이 세상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외치는 광야의 소리일 뿐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원치도 않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는데, 때로 죽기보다 힘든 숙제입니다.
완전히 귀먹은 백성들을 향해, 이미 물 건너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돌아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거듭되는 외침에도 사람들의 몰이해, 그로 인한 박해는 계속됩니다. 결국 외로운 투쟁을 거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이 땅 위에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란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데,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에게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서 자취가 사라지지만 영혼은 더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우리는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오늘은 남북통일 기원 미사입니다. 남북통일은 우리가 하는 것일까요?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물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그 선물을 주십니다.
동서독의 통일되는 과정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통일은 정말 선물과 같이 왔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귄터 샤보프스키 의원이 동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동독인들이 해외여행을 위해 비자를 더 쉽게 신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샤보프시키는 일설에 의하면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새로운 규정의 세부 사항과 시기에 대해 충분히 설명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인은 샤보프시키에게 새로운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발표문을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다소 불확실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지체 없이 즉시 발효됩니다. 이 발언은 틀렸으며 동독 정부를 포함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해당 규정은 즉각 시행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시행되도록 의도됐습니다.
샤보프스키의 성명은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것을 요구하며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인구 유입에 대비하지 못한 국경수비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명확한 명령도 없이 늘어나는 군중에 직면한 그들은 결국 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고 이 물결은 더는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 협상과 외교적 노력이 강화되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통일의 물꼬가 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 주민들이 수없이 철책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기쁘게 맞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내가 왜 그 많은 통일비용을 내야 하느냐며 통일을 반대합니다. 앞으로의 치안과 전체적으로 나라가 가난해질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결혼도 안 하고 자녀를 낳지 않아 소멸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통일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면 새롭게 국민들의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고 통일을 반대하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북한과의 대립으로 우리가 소비해야 하는 군사비용이나 핵무기의 위협과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관광적으로도 기대되는 이익도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북한을 이용하기 위한 것 아니냐, 우리가 북한이 불쌍해서 통일해주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쌍방의 고마움을 전제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비굴해지느니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로마에 끝까지 맞서다 나중에 집단으로 자살했던 마사다 항쟁을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영화 ‘300’에서 자신은 관대하다는 페르시아 장군에게 목숨을 잃더라도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인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북한에게 다가갈 때는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선물로 통일의 물꼬가 트일 때 서독인들처럼 기쁘게 동독 사람들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나의 배우자가 “너 나 아니었으면 거지로 살았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래도 그 사람과 살겠습니까?
통일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 통일이 우리에게 더 좋다는 전반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오면 내분이 없이 바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이 더 좋다는 믿음이 먼저 있어야 그 선물도 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독에서는 통일의 이점이 어려움보다 크다는 것이 전반적인 공감대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몰려올 때 우리가 기뻐 뛸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통일의 준비가 된 것이고 이때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 마태 18,19-22: 기도와 용서
오늘 독서 복음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남북통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통일을 준비하는 자세가 담겨있다. 회개와 용서를 통한 사랑의 생활과 믿음의 기도로써 민족화합과 통일을 기원하자. 일제의 손에서 우리에게 광복을 주신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평화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사랑의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듯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며 분노와 욕설과 악의를 내어버리라고 한다. 북한의 위협적인 태도가 용서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북한의 어떤 주민이 “남한과 미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이대로 폭삭 망하는 것이 낫겠다.” 한 기사는 그들 또한 우리를 두려워하고 못 믿고 용서 못 할 자들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의 자유, 복지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안보 의식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상호 용서를 통해 민족이 화해할 때 그 이상의 안보와 평화는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먼저 마음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는 기도와 용서를 가르치신다. 기도는 통일과정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선택이다. 기도하면서 남북의 화해를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우리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못한 형제가 있으면, 이 미사의 은혜로 서로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또 화해하지 못하고 끝내 이 세상을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때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기도하던 중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와 화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냥 모른 척 부딪히지 않고 관심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와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랑하는 아드님을 통해서 나를 용서하셨고, 그런 나를 받아들여 주신 하느님 앞에 나는 그를 더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맞대고 손을 먼저 내밀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마음이 열리기를, 용기가 생기기를 기도하였다. 하루 이틀 미루던 중 갑자기 떠나버린 그를 앞에 두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어리석게도 ‘내가 화내는 이유는 너무나 정당한데 왜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꾸 던졌던 내게 하느님은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는가?” 하였다. 기회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은총의 때를 잘 알고 그 순간에 우리는 용기를 내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별 뚜렷한 근거 없이 낙관하는 통일관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장벽에 좌절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빼앗아 간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통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겸손과 인내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랑의 생활할 때 통일은 성큼 우리에게 다가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사회가 서로 용서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먼저 화해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북이 통일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먼저 우리 사이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래서 일치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여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나라의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결심하며, 오늘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단지 15분’이라는 연극이 있다고 합니다. 이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극 중 주인공은 몸이 이상해서 병원을 찾아갑니다. 여러 검사를 하고 나서 의사로부터 “당신은 15분 후에 죽습니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됩니다. 우울한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서는데 전화가 울립니다. 재산상속을 해줄 테니 얼른 서명하러 오라는 할머니의 전화였습니다. 15분 후면 죽는다는데 유산 상속 소식에 기뻤을까요?
잠시 후에 오랫동안 구애를 했던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청원을 받아들일 테니 얼른 자기 집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15분 후면 죽는다는데 결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곧바로 세계적 과학 학술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논문 게재가 확정되었으니, 게재료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15분 후면 죽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주인공은 15분 앞에서 세상의 모든 욕망이 의미 없음을 깨닫고 오열합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 하나였습니다.
‘남은 15분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유한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안에서 과연 중요한 것이 나의 욕망일까요? 그보다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사랑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삶을 통해 지금이 의미 있으며,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나의 전부가 있는 것처럼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욕심을 버리고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나의 삶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의 전쟁을 시작으로 남북한은 지금까지도 민족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였던 나라가 둘로 갈라져 너무 오랫동안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과연 중요한 것일까요? 아직도 우리 민족 간에는 거리감이 무척 커 보입니다. 좌파, 우파, 빨갱이, 보수라는 말 등으로써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민족 간의 간격은 너무나 커 보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삶을 통한 일치인데도 아군 적군 식의 편 나누기가 더 중요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의 주님이시만 동시에 이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따라,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즉,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인생의 3/4을 남의 인생을 살다가, 나머지 1/4은 내 인생을 살지 못했음을 후회하며 죽는다(쇼펜하우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기도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의 마음을 모으는 곳은
어디든
하느님 나라라네.
주님께서는
기도 안에 은밀히 숨겨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진실을
가만히 눈여겨보시고
일일이 화답해 주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단톡방)
작금의 현실은 외길 골목길에서 마주친 두 차와 같습니다.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둘 다 절대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화해와 평화가 찾아오려니
기대해 보지만 긴장과 갈등은 여전합니다.
오히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바뀝니다.
남과 북의 긴장은 날로 더해가고
몇몇 국가에서는 끝도 없이 무기 경쟁을 하며 전쟁중에 있습니다.
무기는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도구이기에
군비 증강은 중단해야 하고
전쟁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하는 법입니다.
절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버리게 해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것들은 온갖 악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드립니다.
그게 하느님을 본받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서로 용서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