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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금요일. - 용서와 치유 중에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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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용서와 치유 중에서
연중 1주 금요일-2022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중풍 병자가 죄를 용서받고
치유까지 받는 얘기인데 우리는 여기서 왜 병을 치유하면서
주님께서는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시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 의문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기보다 용서와 치유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자문하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냐 하면 어제 여기 밥상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제가 오늘처럼 선택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는데
사랑의 하느님과 능력의 하느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하느님을 선택해야 할지 같이 얘기 나눈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자 능력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한분을 선택하면 두 하느님을 다 선택하는 것이 되지만
그래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왜냐면 사랑없이 능력만 있는 것을 선택한다면
악령을 선택하는 것과 진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권고 5번에서 얘기하듯 악령도 능력으로 치면 대단하기에
우리의 병을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악령의 하수인이 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면
우리는 죄의 용서와 치유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에 눈치 빠른 분들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답하실 테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용서가 아니라 치유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악령이나 의사에게 가면 됩니다.
그리고 치유만 받고 그 관계는 끝나거나 끝내도 됩니다.
우리는 병원에 가서 돈 주고 치유받고는 그것으로 끝나지요.
의사와 우리의 관계는 돈을 주고받는 관계지 사랑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려는 주님께
베드로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자 주님께서 그러면
너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게 된다고 하신 바가 있지요.
기실 우리의 모든 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죄이고,
그래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 말고도 죄의 용서를 선택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곧 건강을 위해서도 죄의 용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전에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지만
건강에는 육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 정신의 건강, 영혼의 건강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건강하지 않을 때는 건강을 회복하려고 하고,
그래서 병을 인정하고 나으려고 하고 어떤 치유든 받아들입니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처럼 심리적인 병도 인정하고 나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에 병이 있다거나 영혼에 병이 있다고 하면
대부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기에 고치려고 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육신의 병 때문에 자살하거나 남을 죽이지는 않지만
심리적, 정신적, 영적인 병은 자살하기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잖습니까?
사실 많은 병은 서로 유기적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말이 있고,
뒤집으면 건강한 정신과 영혼에 건강한 육체와 마음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관계의 회복일 뿐 아니라 영적인 병의 치유이고,
그래서 주님께 죄를 용서받을 때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뿐 아니라 영적인 건강을 되찾고 다른 건강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근원 치유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치유부터 해야 하고,
영혼의 치유인 죄의 용서부터 우리는 받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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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말합니다.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유다인은 예로부터 죄의 용서를 하느님의 고유 권한으로 여겼습니다(탈출 37,4;이사 43,25;44,22). 그런데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마르 2,11-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이들이요,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제거해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인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치유받았다고 해서, ‘들것’을 버리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들것’에 매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치유받았다고 해서, ‘상처’를 굳이 제거하고 없앨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매여 있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꺼이 ‘들것’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상처’도 그럴 것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 들고 집으로 가야 합니다. 마치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들것’ 위에 인류를 태워 아버지께로 들고 가셨듯이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서 ‘상처’을 받으시고 바로 그 ‘상처’로 보혈의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화해시키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들것’입니다. 그 ‘들것’ 위에는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표지입니다. ‘사랑’의 표지, ‘용서’의 표지입니다. 그러니 진정, ‘상처’에서 흐르는 용서의 피를 마실 때라야, 우리는 그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것을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됩니다. 용서야말로 진정한 치유를 가져오는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미 치유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서 사랑을 드러내듯,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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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은 명의이십니다
몸에 향수를 뿌리고 얼굴화장을 하여도 근본적인 몸과 얼굴은 변하지 않습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치장해도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겉모양이 달리 보일 뿐입니다. 마음은 그대로 두고 요란을 떨면 떨수록 본래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당신 앞에 내려놓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2,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외적인 중풍 병을 고치려고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원인을 치료시켜 주심으로 사람의 근본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평범한 의사는 상처를 다스리고 명의는 뿌리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바로 우리의 주님이 명의이십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뿌리에 생명을 더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또한 중풍 병자를 데려온 이웃 사람의 믿음을 귀하게 보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뒤틀린 사람이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고, 탓을 남에게 돌리며 투덜대기 좋아하는 사람, 정말 치유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처지를 다 꿰뚫고 계시니 그분 앞에 서슴없이 나의 모든 것을 열어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 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 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어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 환자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기도 안에서 치유 받기를 희망합니다.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합니다.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자 지붕을 벗겨내는 열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마르2,4).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해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담고 있는가? 또한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이웃이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웃사촌이라 하지만 요즘 세상은 서로를 너무 모르고 지내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길 청하면, 주님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사람들이 중풍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군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소신으로 가야 합니다.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요, 군중에 떠밀려 가듯이 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지붕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를 들것에 매달아 내려보냈습니다. 막히면 뚫고 걷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들 것에 누워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혹 누워있다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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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대림 때입니다. 저는 주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대림시기에는 ‘대림성가’를 들으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대림시기에 성탄성가를 듣는 것은 수고하지 않고 열매를 얻으려는 마음과 같습니다. 대림시기에 성탄성가를 듣는 것은 출산의 고통 없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습니다. 대림시기에 성탄성가를 부르는 것은 상업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성탄시기에 찬양해도 좋습니다. 대림시기에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경건하게 대림성가를 듣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글을 읽은 후에 대림시기 동안 ‘대림성가’를 들으면서 지냈습니다. 주위 분들에게도 저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대림성가를 들으면 마음이 경건해지고, 차분해졌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듣고 대림성가를 주로 들었던 분들도 같은 느낌이었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대림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다리는 않는 이들에게 성탄은 1년에 한 번씩 다가오는 축제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임금’을 세워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외적의 침입을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이스라엘에 질서와 평화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임금이 있으면 갈등과 분쟁을 해결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임금이 있으면 벌어질 일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 대장으로 삼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고 수확하게 할 것이며, 무기와 병거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오. 그는 여러분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 제조사와 요리사와 제빵 기술자로 삼을 것이오.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사무엘은 임금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임금은 큰 권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할 수 있다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을 세워달라고 하였고,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 다른 임금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권한이 있지만 권한을 내세우지 않고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주고,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아픈 이를 치유해 주고, 굶주린 이를 배부르게 하는 임금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기꺼이 섬기는 임금입니다. 참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머무를 곳도 제대로 없는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유함 보다 가난함을 택하는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건강함 보다 아픔을 택하는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 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하는 임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임금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임금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새로운 임금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세상의 임금이 가지는 권한과 권력을 추구할 것인지, 하느님의 아들이 보여주신 겸손과 십자가를 추구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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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전, 아주 예전 ‘물은 살아있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의 기록은 물을 가지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던 기록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물을 담아두고 예쁜 말과 고운 말을 들려주었을 때의 입자 변화와 나쁜 말, 험한 말을 들려주었을 때의 입자 변화는 극명히 달랐습니다. 예쁜 말을 통한 입자 변화는 그 입자 또한 예쁜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쁜 말을 통한 입자 변화는 그와 반대로 험악한 입자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물은 살아 있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물에 대한 실험 결과를 이야기하자면 말에는 물의 입자를 바꿀 힘이 있다는 말도 됩니다. 즉 말에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따뜻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 안에는 분명 좋은 힘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말은 분명 어둡고 나쁜 힘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죄의식에 빠진 사람이라면, 몸의 병이 죄로 인한 결과라고 믿고 있었던 주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힘을 발휘했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힘을 발휘합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니 너무 아파하지 마세요.’라고 누군가가 말해준다면 죄의식과 그 죄의식으로 인해 고통받던 마음은 풀려날 것입니다. 자유를 얻을 것이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안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인사할 수 있기를.
‘너의 죄는 용서받았단다.’라고 자신에게 인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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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인데
그 모습 다른 이유는….
언젠가 낡은 구두를 들고 구둣방에 갔습니다.
구둣방 안에는 새 구두들도 있었지만
제 눈에는 낡은 구두에서 때어져 나온
낡은 구두 굽들이 보였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한 모습들
그래서 한켠 작은 상자에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구두 굽들
이름은 다 같은 구두 굽인데
닳아 있는 모습은
어찌 그리 각양각색인지요.
우리도 그렇겠지요.
다 같은 사람인데
그 닳아 있는 모습은 모두 다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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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신혼부부가 집들이로, 신랑이 결혼 전에 열심히 활동했던 본당 청년회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사실 이 초대는 아내가 먼저 제안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활동했던 남편의 친구들을 초대하면 남편이 좋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마음이 집들이하면서 좋지 않아졌습니다. 남편이 특별히 청년회 안의 여성들과 유난히 친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질투인가?’라는 마음도 들었지만, 남편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았습니다. 자기는 부엌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바쁜데 도와주기는커녕 한 번도 들여다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편 친구들이 도와준다고 들어왔지만, 남편은 자기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모두 간 후, 이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내가 먼저 “여자 친구들 오니까 너무 좋아하더라.”라며 빈정대듯 말했고, 이 말에 “네가 초대하라며?”라며 대꾸합니다. 남편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요. 그러나 너무 서운했고 화가 나는 등 부정적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문제일까요? 아내는 처음에 가졌던 좋은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의 호의를 대수로이 생각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둘 다 사랑 자체에 집중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뜻을 따르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자리에 사랑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고, 이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굳은 믿음을 통해서 완전해집니다. 우리 인간의 불안전한 사랑을 넘어 주님의 완전한 사랑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지붕을 벗겨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 병자와 함께 한 사람들과 병자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병자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 학자 몇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에,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중풍 병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당신 신성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께서는 사랑이 있는 곳에 당신 사랑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더군다나 중풍 병자를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사랑으로도 충분히 이웃을 도와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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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책임감을 가지는 일은 사랑을 하는 연습이다. 사랑이 피어오르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 속 두려움을 마주하고, 이해하고, 끌어안고, 감당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임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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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력의 지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속을 걷나이다.”(시편89,16)
현대사 공부를 위해 <서울의 봄> 영화와 더불어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다큐멘터리 기념영화 <길위에 김대중>을 보라고 권합니다. 예전에는 참 많은 반대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좌우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국내보다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상가 반열에 들 수 있는 참 탁월한 위인이요 말그대로 전설적 신화적 인물입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고 또 그렇게 정치했던 참으로 분별의 지혜를 지니셨던 분입니다.
이상주의자냐 현실주의자냐? 좌파냐 우파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을 다 아우르기 위해서는 분별의 지혜가 절대적입니다. 서생적 문제의식이 이상주의적 측면이라면 상인적 현실감각은 현실주의적 측면입니다. 이 둘을 아우를 때 모두가 선망하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라 함은 이 둘을 아우른 경지라 할 수 있고, 바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한 성 베네딕도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 늘 전쟁의 위기속에 살아가는 남북의 지도자에게 참으로 절실한 분별의 지혜요 이런 양극단을 아우른 통합적 사고이겠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명심하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영성과 현실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란 말입니다. 신적일수록 인간적이요, 진정 이상주의자라면 현실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별의 지혜요 바로 예수님이, 성 베네딕도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그 모범이겠습니다. 지도자가 지녀야할 우선적 덕목으로 분별력의 지혜를 강조하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이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
분별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 일률적으로 한 잣대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잣대를 필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정의와 공정을 외친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시인이었음은 바로 이들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음을 입증합니다. 시인이나 예술가인 대통령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멋진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일 것입니다. 바로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운 전례은총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신자들이 되게 함을 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깊이 뿌리내릴수록 분별의 지혜를 지닌 예수님을 닮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일수록 디테일에 강해야 한다는 뜻도 이상주의자이면서 지극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습니다. 성 베네딕도 규칙을 보면 성인이 얼마나 디테일에 강한 섬세한 배려의 인물인지 감복하게 됩니다. 예수님 탄생시 하늘로부터 들려온 하느님 찬미도 생각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서의 하느님의 진면목을 대하는 듯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라면 땅에서의 평화의 현실주의자로 화답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70대 넘어서면서 집중해 보는 것이 자서전과 평전입니다. 참 감명깊었던 평전중 하나가 병자호란시 나라를 구한 충신, <최명길 평전>입니다. 당시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결이 참 치열했던 때입니다. 주전파이자 명분론자 김상헌이 있었다면 주화파이자 실리론자 최명길이 있습니다. 만일 주전파 김상헌의 말을 들었다면 조선은 신흥 강국 청나라에 초토화되어 재기 불능했을 것입니다. 아니 진작 분별의 지혜를 발휘했다면 병자호란의 참화도 막았을 것입니다. 천만다행 늦게나마 인조가 최명길의 편을 들어 나라를 살렸습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나라의 존망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오늘에 주는 교훈이 참 큽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셔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저렇게 할 수 뿐이 없을까 하는 회의도 듭니다. 그렇게 많은 무고한 국민들이 죽었는데... 승패에 관계 없이 모두가 패한 어리석은 전쟁입니다. 물론 추호도 패권국가 러시아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국가지도자의 우선적 책무는 안보요 전쟁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전쟁나면 일상의 모두가 정지되고 그 상처가 너무 깊고 오래갑니다. 정말 한반도는 역사상 너무 많은 피를 흘렸으니 더 이상 전쟁은 없기를 바라며 기상하자마자 부르는 만세칠창중 세 번째 만세입니다.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최명길 평전> 겉표지에 말마디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인 그의 업적을 요약합니다. “망국의 벼랑 끝에서 나라를 구한 외교관, 도탄에 빠진 백성을 살린 정치가”, 명분도 좋지만 살아야 명분도 있지 죽으면 명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제가 이런 묵상을 한 것은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내용 덕분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한 이상주의자 사무엘과 주변의 엄중한 상황에 위기 의식을 느낀 현실주의자 이스라엘 원로들의 의견이 첨예한 대립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나이가 많으시고 아드님들은 당신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있으니, 이제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 주십시오.”
사무엘이 언짢아 마음에 그대로 전달했을 때 주님의 반응입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백성이기는 하느님도 없는 듯 합니다. 왕정제도를 고집하는 원로들의 현실주의를 탓할수만도 없고, 하느님을 섬기고 따르는 이상주의를 고수하기도 힘드니 백성들의 처지가 참으로 진퇴양난입니다. 사무엘은 왕정제도의 폐단을 상세히 열거합니다만 백성들의 결정은 요지부동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주어라.”
하느님의 이상주의에 대한 백성들의 현실주의의 승리입니다. 폭군(暴君)이나 혼군(昏君)이 아닌 세종대왕 같은 성군(聖君) 만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오늘날 반복되는 역사 현실 아닙니까?
저는 오늘 복음에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극복대안을 찾았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참으로 날로 깊어가는 하느님 믿음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풍병자의 믿음 좋은 동료들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동료인 중풍병자가 주님을 만나 치유받는 것이 이상이라면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첩첩의 군중을 뚫고 주님께 이를 길이 없음이 현실입니다. 궁즉통(窮則通)! 바로 믿음의 기적입니다. 이상(理想)의 현실화(現實化)를 가능하게 한 믿음의 기적입니다.
네 동료들의 믿음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 이들의 믿음의 눈이, 지혜의 눈이 열려 이들은 주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내니 그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주님의 2차에 걸친 전인적 치유선언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동료들 덕분에 죄를 용서받듯이 교회공동체의 믿음 덕분에 죄를 용서받는 우리들입니다.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에 이은 육신의 치유이니 전인적 치유가 뒤를 잇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모두가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니 해피엔드로 끝나게 하는 믿음의 위력입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군중들의 믿음에도 큰 자극이자 도전이 됐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이 주님을 닮아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함을 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영적 중풍병을 치유하여 온전한 분별력의 지혜를 지닌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애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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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과 모독>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10)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람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니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이요
하느님의 사람임에도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모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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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마르 2,4)
기도의 장애물
그들은 그리스도께 중풍 병자를 데려가고자 했지만, 사방에서 밀어 대는 군중 때문에 가로막혀 버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영혼에도 종종 일어납니다. 육적 게으름으로 늘어져 벼린 다음, 천상 은총의 약으로 새로워지고 싶어 해도 묵은 습관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회복이 더딥니다. 영혼이 달콤한 기도에 빠져 주님과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는 동안에도, 종종 세상의 상념들이 군중처럼 몰려와 영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분심(分心)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군중이 아우성치고 있는 바깥으로 나가거나 아래로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곧, 성경의 높이에 다다르도록 애써야 하고, 시편 저지와 함께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해야 합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만물을 창조하고 계신 하느님은 그들을 창조하신다는 이유로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시고, 충고하십니다. 하느님은 만물에게 자신을 따르고, 자신의 말에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강물은 나온 곳으로 되돌아간다'(1,7)고 한 코헬렛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만물에게 그들의 근원인 자신에게로 서둘러 오라고 명하십니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가지고, 하느님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 모든 피조물은 자신의 끝을 추구함과 동시에 자신의 근원을 추구합니다.”
흘러 나옴은 흘러 되돌아감, 곧 귀환이기도 하다. 나옴은 들어감이고, 들어감은 나옴이다. 끝과 시작은 하느님 안에서만 일치한다. 말과 일, 말하기와 창조하기,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도 하느님 안에서만 일치한다. 우리와 같은 피조물을 위하여 변증법적인 여정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 여정은 성령 안에서의 삶을 구성한다.
만물은 흘러 나옴과 되돌아감에 몰두한다. 흘러 나옴과 되돌아감이 일어나는 것은, “만물이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모든 자연이 하느님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본디부터 하나의 목적을 위해 곧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흘러 나와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늘이 운행하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을 구하거나 하느님처럼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만물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자연은 만물 속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도 갈망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간에, 여러분이 알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연은 자체적으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100)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암브로시오
직무 수행자의 의무에 대하여
다윗이 이렇게 말만 했습니까? 자신이 한 이 말을 지켜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지켜 나갔습니다. 그는 시므이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발히는데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는 군인들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비난하지도 않았고 복수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스루야의 아들이 복수를 하려고 나섰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2사무 16,5 이하) . 그는 입을 다물고 겸손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살인자' 라고 부르는데도 그는 흥분하지 않고 온유하게 머물렀습니다. 그는 지신이 한 좋은 일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난들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모욕을 받을 때 즉시 흥분하는 사람은 그런 모욕을 받을 만한 사람이란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비난들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음을 알려주려고 하는 그 노력이 오히려 그런 모욕을 받을 만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에 대한 모욕들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들로 화를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모욕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 모욕을 무시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것들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은 그것들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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