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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2) 성령님은 우리를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참되고 온전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3) 성령님은 오늘날의 사도들을 통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1세기 사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사도들처럼 우리에게 직접 진리를 계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경의 문맥을 통해 그 다음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영의 공명을 통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오늘날의 사도들을 통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을 듣고 왜 또 사도들이 필요하지? 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가 어떤 직임인가를 알아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도"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고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꼭 필요한 것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중 직임 중 가장 오해가 심한 것이 사도입니다. 전통적인 교회는 사도가 없다고 착각합니다. 영성운동이나 신사도운동은 오늘날도 사도가 있다고 인정하지만 옳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고, 신사도운동은 도리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사도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교회를 회복시킬 수 있는데 오해해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그럼 사도란 무엇일까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을 비롯해서 영성운동이나 신사도운동 진영에서는 사도의 자격을 두 가지로 꼽습니다.
고린도전서 9: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고린도후서 12:12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이 구절들에 근거해서, 사도의 자격이 예수님을 직접 본 것과 표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헤시 차브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표적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사람이 진짜 사도라고 생각하고 "피터 와그너가 무슨 사도냐? 그는 교수일 뿐이다!"라고 제게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다행히, 언제부터인가 신사도운동은 이 두 가지가 사도의 필수적인 자격이 아니라고 입장을 선회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엉뚱하게 700명 이상인 교회의 담임목사는 모두 사도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는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사도들의 자격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토대적인 사도들의 자격입니다. 왜냐하면 두 구절 다 바울이 자신이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토대적인 사도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둘은 비토대적인 사도의 자격이 아닙니다.
또, 성경에 보면 디모데, 실라, 유니아 ... 등 여러 명의 비토대적인 사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바울처럼 예수님을 보았을까요? 또, 그들이 11사도와 바울처럼 모두 강력한 표적과 기적을 행했습니까? 서신서와 특히 사도행전을 볼 때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도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는 토대적인 사도들의 자격이지 비토대적인 사도들의 자격이 아닙니다.
그럼 오늘날 존재하는 비토대적인 사도들의 자격은 무엇일까요?
제가 아직 하지 않은 설교 중에 "사랑하는교회 흐름을 타라!"는 시리즈 설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에 관한 설교입니다. 그 설교에서 저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표적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정확한 분별력과 이해가 사도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음 성구들이 그것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줍니다.
요한복음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6:12-13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서 3:4-5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사도는, 무엇보다 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도는 순전한 진리로 교회의 토대를 놓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토대적인 사도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과 진리 확립을 통해 교회의 토대를 놓은 것입니다. 즉, 신약성경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즉, 토대적인 사도는 아닐지라도 역시 사도인 오늘날의 사도들의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정확한 진리 분별을 통해 진리 위에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리가 오늘날의 사도들의 자격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표적이 강력하게 일어나도 이것이 없으면 사도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런 것이 없어도 이것을 갖추고 있으면 사도입니다. 이것이 제가 사도에 대해 오래전에 내린 결론입니다.
그런데, 저 혼자뿐이고 누구도 사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교회는 토대적인 사도들에 대해 저와 일맥상통하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의 사도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저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저도 때로는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와 그 뒤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에 대한 계시적인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이 설교의 서론에서 제가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예언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에게 꿈, 환상, 예언, 천사의 방문, 입신과 같은 것을 통해 미래를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A.D.와 B.C.가 보여주듯이 역사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가 중요합니다. 즉,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참 의미를 가르쳐주는 복음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진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가 바울이 그 받은 지혜로 바울서신을 썼다고 한 것처럼, 구약의 선지자와 달리 사도들에게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 복음과 진리를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예언이 아니라 진리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예언과 밀접한 선지자가 아니라 진리와 밀접한 사도라고 칭하시고, 사도들은 예언이 아니라 강력한 치유를 동반한 복음전파와 진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중심으로 한 이유입니다.
한편, 은사중지론은 잘못된 것이고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폐해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같은 수준의 계시는 아니지만 같은 유형의 계시가 오늘날도 주어집니다. 특히 지혜의 말씀은 사도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복음과 진리를 정확히 분별하고 정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비토대적인 사도들의 자격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교회를 토대적인 사도들이 만든 진리의 토대 위에 바로 세우는 것이 오늘날의 사도들의 사명입니다."
저는 이런 계시적인 깨달음을 통해, 복음과 진리를 성경 그대로 정확히 깨닫고 전파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도의 자격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에게는 제 말이 자기 합리화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또, 성경적이고 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추론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깨달음을 통해 저는 '아! 진짜구나. 이것이 정말로 사도의 자격이구나!'라고 느꼈고 확증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린 것처럼, 사도는 진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고 보낸 사람입니다. 이제, 왜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는 데 사도들이 필요한지 이해가 되시지요!
다음으로, 우리가 진리 가운데로 인도받기 위해 사도들이 필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 안에도 널리 퍼져 있는 사람의 계명들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6-9, 13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실 때, 신약성경은 없었지만 구약성경은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구약의 율법을 곡해해서 유대교를 망가뜨렸습니다. 유대교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 즉 잘못된 교리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율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곡해했을까요? 마태복음 5장 21절-48절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음은 그중 일부입니다.
마태복음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태복음 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지?'라는 생각이 드시지 않나요? 들어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십계명에 나온 그대로고 조금도 이상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잘못된 가르침인 이유는 그들이 제6계명을 가르칠 때, 예수님처럼 문자가 아니라 정신을 이해하여 화내는 것도 살인이고 욕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지 않았고, 제7계명을 가르칠 때도 예수님처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처럼 그런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간다고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죄를 심상히 여기게 되었고, 지도층들마저 부패했습니다.
마태복음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거의 대부분, 외식하는 자들과 독사의 자식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마태복음 23:27, 3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지도층이 이 정도니 일반 신자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더 심했겠지요!
마태복음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유대교는 이방종교가 아닙니다. 이단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두가 지옥에 가는 이런 참담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물론 유대교 안에도 남은 자라 불리는 신실한 이들이 있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시대의 마리아와 요셉, 사가랴와 엘리사벳, 안나와 시므온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대부분은 지옥에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점은, 이런 일이 개신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에 구약성경이 있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거스틴과 칼빈과 루터를 통해 이런 일이 개신교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또, 그들의 가르침에 세뇌된 수많은 교수와 목사들을 통해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개신교는 오래전부터 유대교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의 가르침이 유대교의 가르침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말로는 믿으라고만 하지 않고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말하고 그것을 궁극적인 구원과 관련지어 절대적으로 강조하진 않고 있습니다. 즉,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라고 말하지만 '오직 믿음'과 비성경적인 견인의 교리를 통해 그렇게 살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목사와 신자들이 그렇게 살겠습니까? 진실하고 열심 있는 소수는 그렇게 살지만 다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결과 다수가 명목상의 신자나 외식자가 되어버렸고, 교회 안에서 천국 가는 비율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신교에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 진리의 회복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거짓 교사에게 속은 목사와 그것을 분별한 초신자인 중국여인에 대한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책에 나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초신자도 영의 공명을 통해 진리를 옳게 분별할 수 있다는 것과, 반대로 목사와 교수들도 진리를 옳게 분별하는 일에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교수와 목사들이 이단사설을 상대로는 그렇지 않지만, 교리를 분별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바르게 정립하는 것은 세계적인 신학자들과 가장 유명한 강해설교자들이 거의 단체로 실패한 일입니다. 죄송한 말이긴 하나 일반 목사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진리 회복이 불가능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낸 사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목사들만 세우지 않고 사도들을 세우셨습니다.
에베소서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것을 오중 직임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오중 사역자는 모두 교사입니다. 모든 목사는 기본적으로 교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디모데전서 3:2 "그러므로 감독(목사)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디모데후서 2:24 "주의 종(목사)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그러므로 잘 가르치지 못하면 목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설교가 약해도 너무 약한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진짜 목사가 아닙니다.
오중 직임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사도와 선지자가 첫 번째 그룹이고(엡2:20, 3:5),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가 두 번째 그룹입니다. 가르침에 있어서 두 그룹은 큰 차이가 납니다. 또, 사도와 선지자도 가르침에 있어서 차원이 다릅니다(고전14:37). 그래서 사도가 오늘날도 있다는 것을 아는 많은 목회자들이 자기가 사도이길 원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원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만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또, 중요한 것은 부르심과 은사는 고정적이고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래서 아무리 구하고 노력해도 부르심 이상의 말씀의 은사가 부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정립할 수 있는 자들은 사도들뿐입니다. 여러분, 이제 왜 성령님께서 성경의 문맥과 영의 증거와 더불어 오늘날의 사도들을 통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시지요!
한편, 이것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목사가 필요한 것처럼 목사들에게도 사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로 부름받지 않은 한, 목회자들도 말씀의 한계가 분명합니다. 교사나 목사나 복음 전하는 자나 선지자로 부름받은 사람이 똑똑하고 공부를 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로 부름받지 않은 자는 학자로서 연구하든, 설교자로 연구하든 반드시 분명한 한계에 봉착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세계적인 수많은 학자들과 유명한 강해설교자들을 통해 충분히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사도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말씀에 정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로 부름받지 않은 목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지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히 자신에 대해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그럼, 성도들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겸손히 배워햐 할 사도들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보낸 사도들 중 제가 특히 추천하고 싶은 분이 몇 분 있습니다.
첫째로, 존 웨슬리입니다. 특히 그의 표준설교집 상하권과 논문집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찰스 피니입니다. 일부 걸러내야 할 것이 있지만 그의 책들은 영적인 보화이고 필독서입니다.
셋째로, 썬다 싱입니다. 특히 썬다 싱 전집의 『그 발 앞에 엎디어』가 탁월합니다. 그러나 사후체험 간증은 분별 혹은 선반에 올려놓아야 할 내용이 일부 있습니다.
넷째로, 사도는 아니지만 선지자인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들도 엄청난 영적인 보고입니다. 해긴 목사님의 책은 『다가오는 회복』이라는 소책자만 빼고 전부 읽으시기 바랍니다.
다섯째로, 부족하지만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쓴 책들입니다. 특히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정경의 권위』, 『터』, 『길』,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 『노후준비보다 중요한 사후준비!』, 『이기는 자가 가는 나라!』, 『능력으로 관통되는 복음!』, 『나는 팔복의 사람인가?』, 『나는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의 복음은 바울의 복음인가?』, 『개신교의 아킬레스 건이 된 칭의의 교리』,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너 자신을 알라!』는 필독서입니다. 여러분 모두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외에도,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조셉 얼라인의 『회개』, 토저 박사의 『거듭난 자의 생활』,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의 『제자입니까』, 찰스 프라이스의 『진정한 그리스도인』, 데이비드 포슨의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권연경 교수의 『행위 없는 구원?』, 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 양용의 교수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 필독서입니다. 또, 캐더린 쿨만의 책은 물론이고 존 비비어의 책들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하지, 존 스토트, 로이드 존즈, 더글라스 무, 토마스 슈라이너, 홍인규, 길성남 교수의 책들도 교린적인 부분을 걸러내고 읽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은 저와 여러분을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를 통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첫째로, 성경을 읽을 때 문맥을 통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둘째로,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을 때 영의 공명을 통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셋째로, 오늘날의 사도들의 설교와 책들을 통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이 셋 중 하나도 간과하지 마십시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모두 따라가십시오. 그래서 이단사설뿐 아니라 정통의 탈을 쓴 사람의 계명에 속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목회자는 성도들을 구원의 길로 잘 인도하고, 성도님들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