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적인 것의 특성은 무궁무진한 깊이의 표면이 된다는 데 있다.”(『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中) 이 글은 나타남 속의 은폐됨, 나아가 나타남을 가능케 하는 은폐됨의 지대를 탐구하는 메를로-퐁티의 ‘비가시적인 것’ 개념들 중 그의 존재론적 세계 기술의 핵을 이루는 ‘깊이’ 개념을 다룬다. 깊이는 메를로-퐁티의 전기 현상학적 시기로부터 후기 존재론적 시기를 관통하는 주제로서, 그의 사상이 현상학적인 것으로 부터 존재론적인 것으로 이행하면서 그 의미가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현상학적 시기의 깊이 개념은 고전적 감각개념의 ‘공간의 삼차원으로서의 깊이’ 개념에 전재된 객관적 편견을 드러내고 세계에 몸담은 주체가 경험하는 깊이의 실존적 의미를 되살린다. 그러나 존재론적 시기에 들어 깊이는 가시적인 것의 두께를 이루는 비가시적 차원으로서 가시/비가시의 얽힘(현전/부재의 얽힘)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개념으로 거듭난다. 가시적인 것이 그러한 바의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비가시적인 것으로서의 존재론적 깊이 개념은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의 핵심 개념인 살 및 가역성의 구조를 이르는 한편, 관념이 감각적인 것의 안감이자 한정된 부정성으로서만 존재하는 메커니즘으로 기술된다. 마지막으로 깊이 는 메를로-퐁티가 현상학적 시기로부터 주장한바 ‘완전한 환원의 불가능성’ 명제가, 환원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존재론적 환원의 공식임을 보여줌으로써 전기 현상학적 사유의 속에 난제로 남아있던 문제에 답한다.
이 글은 류의근의 저서 『메를로-퐁티의 신체현상학』에 대한 서평이다. 서평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바는 철학함과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찾기이다. 더불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 21세기 포스트휴먼 혹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타자의 등장과 함께 어떤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글은 저서의 구성방법에 따라, 몸과 살, 코기토, 신, 윤리, 정치의 문제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특히 이 글에서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저자의 메를로-퐁티 현상학이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신 문제이다. 메를로-퐁티 철학의 기조는 근대철학의 이분법적 구조 속에 나타난 폭력의 문제에 대한 반성이다. 철학이 진리를 드러내는 일, 특히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할 때, 철학이 밝혀보여주고자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메를로-퐁티는 살존재론에서 철학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그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끊임없는 교차와 얽힘 가운데 열어밝혀지는 존재열개이다. 따라서 살의 철학은 철학의 종말이 아니라 철학의 재탄생이다.
이 글은 메를로-퐁티의 사유에서 나타나는 ‘비가시적인 것’의 존재론적 의미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빛과 어둠의 구분 이전에 존재하는 근원적 ‘어둠’(obscurité)이 그의 현상학적 존재론의 중심에 자리함을 밝힌다. 육화된 주체의 체험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함으로써 감각과 지성,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던 메를로-퐁티는 후기에 들어 존재 발생의 문제에 주목함으로써 이분법을 보다 근본적으로 해체하고자 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의 존재론적 사유는 다름 아닌 현상적인 것 그 자체로부터 발원한다. 그는 가시적인 것, 다시 말해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가시적인 것 그 자체와 한 몸을 이룬 비가시적 존재와 맞닥뜨린다. 이렇듯 가시적인 것과의 얽힘 관계에 있는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 ‘외부’에 선재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직접 기술하려했던 전통형이상학의 존재론과 구분되는 ‘간접적 존재론’이며, 현상적인 것 안에 함축된 존재론적 깊이로 확장되는 ‘현상학적 존재론’이다. 이러한 현상학적 존재론 속에서 움푹함(creux), 주름(pli), 간격(écart) 등 어둠의 다양한 이미지로 나타나는 비가시적인 것들은 오직 존재자들의 얽힘과 교차를 통한 존재 발생, 곧 내재적 초월의 장을 보여준다. 존재론적 복시 속에 존재와 무를 양분했던 전통철학의 이원론을 넘어서서 사태자체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을 이룬 가시/비가시의 얽힘을 맞닥뜨리게 된다. 존재의 어둠 속에서 빛은 이 세계 너머의 다른 곳으로부터 비추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는 자와 보이는 것들 사이, 느낌과 느껴짐 사이, 그리고 기호와 기호들 사이의 간격과 분화 속에서, 어둠 속의 섬광처럼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