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69]아름다운 사람(19)-참스승 최규동崔奎東
세계위인전을 읽지 안했대도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스탈로치(스위스의 교육학자. 1746-1827) 이름을 모두 아실 터. 페스탈로치는 20세기초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어린이 사랑에 짧은 생을 바친 방정환(1899-1931) 선생보다 먼저, 어린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한 사상가였다. 페스탈로치의 묘비에는 ‘빈민의 구원자, 민중의 목자, 고아의 아버지, 민중학교의 창설자, 인류의 교사’라고 쓰여 있다는데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이름 위에 축복 있기를”이라는 마지막 구절이 무척 인상적이다. 이런 상찬의 묘비명이 어디 몇 개나 되랴.
이 새벽, 서양의 페스탈로치를 꺼낸 이유는 어제밤 동양에, 아니 우리나라에, 그것도 일제강점기에 ‘조선朝鮮의 페스탈로치’로 추앙받은 교육학자 최규동 선생에 대한 『백농 최규동 평전』(이명학 지음, 176쪽, 비매품)을 읽었기 때문이다. 수 년 전부터 그분의 성함은 알고 있었지만, 짧은 평전을 통해 그분의 생애와 사상을 제대로 알게 된 기쁨이 컸다. 어지러운 구한말, 1882년 경상도 성주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하다 신학문을 배웠는데, 최규동 선생은 그중에서도 산수算數의 마력에 빠져 수학선생님이 되었다(경상도 성주에는 또 한 분의 큰 인물으로, 백절불굴의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이 계신다). 1900년대초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과 뜻을 같이 해 평양 대성학교에서 수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1914년 폐교 위기에 빠진 중동학교(중동고등학교 전신)를 인수하여 시종일관 ‘민족 자제子弟의 교육’에 헌신했다. 오죽했으면, 3부제 수업으로 하루 13-14시간씩 1주일에 58시간 이상 살인적인 수업을 감행한 ‘노동적 교육가’라고 당시 신문이 기록했을까.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얼마나 평판이 좋았으면, 동아일보 1940년 1월1일자에 <一意精進의 今日>이라는 큰 제목으로 소제목이 <朝鮮의 페스타롯치 최규동씨崔奎東氏>라는 기사가 실렸겠는가. 평전에 실린 그분의 일화 몇 가지만 봐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민족교육에 생애를 불태웠다. 광복이후 1948년 그의 제자인 안호상 장관에 의해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천거되어 일하다 한국전쟁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돌아가셨다(명실공히 초대 총장이다).
일제치하 창씨개명을 끝끝내 거부하고, 일본인교사를 가장 적게 고용하고, 조선말로 가르치며 말하다 당한 남모를 수난이 무릇 기하였을까? ‘의리義理’하면 중동고를 떠올릴 정도로 동문들의 단합이 잘 되는 까닭은 평소 “의롭게 생각하고 당당하게 살라”고 가르친 중동학교의 실질적이자 진정한 설립자 최규동 선생의 ‘백농정신白儂精神’이 면면히 이어진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참고로, 필자의 모교 전라고등학교는 '조국을 품고 세계를 보라'이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중동인들이 그 역사를 잘 알고 그 정신을 체화體化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선생의 호 ‘백농’에도 백의민족의 자제를 올바로 가르쳐 나라를 되찾아 국가의 간성干城으로 올바르게 길러내겠다('나는 백의민족의 자제들을 교육농사시킨다')는 그의 교육철학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질 않은가.
1940년 동아일보 신년호(1월1일자)에 선생이 쓴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신년훈화>는 지금 읽어봐도 우리 학생들에게 교훈을 주는 좋은 글이다. 첨부한 사진 속 제목을 보라.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고리타분한 잔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自尊心이 강하라-새해부터 이것을 직히라(지켜라)”라는 큰 제목에 “男兒의 一言은 生命-信義와 氣慨잇는 快活한 사람되라”는 작은 제목을 보라. 태평양전쟁 막바지, 식민통치 억압에 지칠대로 지쳐 죽지 못해 살 때였다. 어린이가 미래이고 꿈이지 않은가. 이명학 중동고 교장(중동고 67회)이 수 년 동안 엄밀하게 취재하여 집필한 몇 편의 글을 추려모은 ‘평전 아닌 평전’을 읽으면, 선생이야말로 안창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진정한 ‘민족의 사표師表’이자 ‘민족의 교육가’로서 우리의 ‘참스승’임을 알 수 있어,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놀랍다. 우리에게도 전대前代에 이렇게 훌륭한 교육자가 계셨다는 게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중동인’이 아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중동학교 교장에 국한되지 않았던 선생이 이 땅에서 구현하고자 한 이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해 이 혼탁한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성찰해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2015년 교육부 주관으로 선생이 <이 달의 스승>에 선정되자, 일부에서 일제하 어느 잡지에 쓴 칼럼이 친일親日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은 '취모멱자吹毛覓疵'(털을 헤쳐가며 그 속의 흠집을 찾는다는 뜻)여서 안타까웠으나, 여러 사료가 잇달라 밝혀짐에 따라, 선생의 진가眞價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필자는 지난주 목요일 중동고 교장선생님이 교장실을 불쑥 방문한 불청객에게 “중동고 명예 69회”라고 부르며 『백농평전』을 주었기 때문에 이 졸문을 쓰는 게 아니다. 실제 나의 눈으로, 해외 각국에서 ‘중동인’들이 얼마나 ‘백농정신’을 체화하여 실천하고 있는지를 여러 번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백농정신'이 곧 '중동정신'인 것은 좋은 일이다. 으-리-으-리-한 중동. 중동고등학교 만세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