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27
9월28일[연중 제2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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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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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cxtgY95h1U?si=Y-24S_x82gvTuIFF
(서울대교구 김병규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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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존재 자체로 기쁨과 희망, 위로와 은총의 표지이신 예수님!>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헤로데가 몹시 당황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묵상해봅니다. 루카 복음 사가에 따르면, 헤로데가 당황해 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선하고 통쾌한 말씀 선포를 통해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끝도 없이 밀려드는 수많은 군중 가운데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사람조차 다시 삶으로 되돌이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한 가지 한 가지가 모두 백성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건네셨던 좋은 일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기뻐하고 감사해도 모자랄터인데, 왜 헤로데는 몹시 당황해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최근 자신의 생일 잔칫날, 자신의 얼굴을 살리려다가 발생한 세례자 요한 참수 사건이 떠올라 당황해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었던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는데, 그가 곧 예수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당황해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비록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로마 식민지 체제하에서 쥐 꼬리 만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을 위해 뭐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백성들의 안위나 복지는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위태위태한 자리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 알량한 권위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입을 챙기며, 그렇게 비참한 군주로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권위도 없고, 품위도 없으며, 자신이 대체 뭘 해야 되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저 거들먹거리고 폼만 잡고 살아가는 폭망한 천박한 지도자서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엉뚱한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죽어나는 것은 백성이라는 것을 헤로데 역시 온 천하에 잘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죽고 예수라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가 왕으로서 자신이 해야 되는데 전혀 하지 못하는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으니, 헤로데 입장에서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을 생각지도 못한 봉사의 왕, 섬김의 왕으로서 신선하고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치니, 몹시 당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존재 자체로 선인들에게는 기쁨과 희망, 위로와 은총의 표지입니다. 반대로 악인들에게는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의 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앞에, 그리고 그분이 매일 건네시는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몹시 당황해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뻐하고 환호하고 있습니까? 설레는 가슴으로 그분 말씀에 행복해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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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모든 것이 지나가고>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는 오늘 제1독서인 코헬렛의 말씀을 묵상하며 여러 반성꺼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보면 큰 일 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한 마디로 ‘인생 뭐있어?’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 때와도 같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가나이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과거 ‘전도서’라 칭함)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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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솔직함이 주는 힘>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헤로데 영주입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 엘리야나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무성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며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 것까지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헤로데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나려면 요한의 목을 벤 사실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분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려면 자기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솔직해져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루카 2,35) 하시는 분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을 거부하면 의롭지 않은 사람임이 증명됩니다.
영화 ‘뮬란’(2020)은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실제로 남성으로 위장한 채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볐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진실’입니다. 영화에서는 ‘진실과 초자연적 힘’을 결합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힘을 지닌 여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는 여성은 얌전하게 시집이나 잘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뮬란은 이런 기존의 틀을 거부합니다.
뮬란은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대신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남성으로 속이고 모든 훈련을 감내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내재한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할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인 것이 발각되는 즉시 군에서 쫓겨나고 그러면 가문 전체가 불명예를 입기 때문입니다.
뮬란은 자신의 힘이 발휘되지 않으면 자신의 전우들이 죽게 될 것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숨을 내거는 결단이었지만, 그 진실함 때문에 자신 주위에 맴돌기만 하던 기(氣)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기는 우리로 말하면 성령님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구합니다.
사람이 왜 진실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다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같아지는 것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하느님 뜻보다 우선합니다.
그런 교만함은 죄를 짓게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그 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렵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이 주님의 존재를 느끼고 뒷걸음질 친 것과 같습니다.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평판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병자성사에 관련된 말씀을 하며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야고 5,16)라고 권고합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려는 겸손이 없으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남을 비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멀어지고 그분이 주시는 은총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고해성사 때 굳이 죄를 사제 앞에서 고백하게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헤로데는 “내가 요한의 목을 베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까이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 달 정도 어느 부대의 중대장 운전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제 기억으로 미스터 건국대였습니다. 대학에서 보디빌딩으로 일등을 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늘 자랑하였습니다. 그분은 30대 중후반이 되었고, 저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저는 운전병으로 운동할 시간이 많아서 근육이 한창 붙을 때고 그분은 빠져나갈 때였습니다. 그분의 대학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몸을 만드는 것을 좋아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우나에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저의 몸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멀리에서 해. 내 옆으로 오지마!”
다른 것은 몰라도 팔뚝은 제가 더 두꺼웠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근육 자랑을 하고 다녔는데 제가 조금 더 좋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 하는 사람은 자신과 비교될 만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물며 우리 죄의 민낯이 드러나게 만드는 주님께서 옆에 계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겠습니까?
내 죄가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나를 낮추기를 원해야 합니다. 낮아지기를 원치 않으면 주님을 가까이하기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원하고 그분이 주시는 성령의 힘을 받아 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하여서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여 겸손해지는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겸손이 은총과 진리를 부르고 지혜와 힘을 발휘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려면 솔직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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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평화신문 지면에서 수녀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꽃 피우지 않는 나무’입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 12년간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꽃을 피울까? 라는 전화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 나무를 좋아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10년이 넘도록 꽃 한 번 피우지 않는 나무를 누가 좋아하느냐며 장모가 준 것이라서 버릴 수 없어 억지로 키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상담원은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당신이라면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라고 되물었습니다. 상담원은 잠시 후 ’지금부터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그 나무한테서 좋아할만한 것들을 찾아보세요. 그 다음에 그렇게 멋진 나무가 당신 정원에 있어서 기쁘다고 이야기해 보세요. 그러면 꽃이 필 것입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상담원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혹시 몇 달 전 꽃 피우지 않는 나무에 대해 조언을 구하던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당신이 시킨 대로 했더니 글쎄 그 나무에 거짓말처럼 꽃이 가득 피었지 멉니까? 너무도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랍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고, 세상의 유혹에 빠져 산다면 신앙의 꽃은 피지 않을 것입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왜 우리가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는가? 왜 우리의 성전은 이방인의 손에 의해서 처참하게 파괴되었는가? 왜 우리의 신앙은 아름답게 꽃 피우지 못 했는가?’를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심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했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눈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만나면서 꽃을 피웠습니다. 페르시아 왕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 주변에도 사랑 받지 못해서 시들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2년 전에 아마존에서 구입한 차고의 천막이 바람에, 햇빛에 여기저기 찢어졌습니다. 새로 천막을 사서 덮어 주었더니 산뜻하고 아름다운 차고가 되었습니다. 싱크대의 수도꼭지가 나사가 풀려서인지 덜렁거렸습니다. 새 수도꼭지를 사서 달았더니 물이 시원하게 나왔습니다. 지하에 있는 배수관이 막혀서 물이 넘쳤습니다. 2년 전에 고쳤는데 다시 막혔습니다. 배관공을 불러서 다시 뚫었습니다. 물은 막힘없이 흘렀습니다. 차고도, 수도꼭지도, 배수관도 저의 사랑을 받지 못하니 낡고, 덜렁거리고, 막힌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손을 쓰니 다시 꽃이 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비슷합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건강하던 몸도 시들고 맙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면 가슴에 화가 들어와 살게 됩니다. 세상이 우울하고, 짜증납니다. 그러면 건강은 시들게 마련입니다. 음주와 흡연을 지나치게 하고, 폭식을 하면 당연히 몸은 시들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면 몸은 곧 긍정의 꽃이 피게 됩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를 하면 몸은 다시금 활력이 넘치기 마련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나를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아름다운 꽃이 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은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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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린 날 문구점에서 완구를 훔쳐서 집에서 장난감으로 조립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린 아들을 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족과는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감옥으로 보내 주십시오.’ 어머니는 문구점 주인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그 뒤로 정직하게 살기로 했고, 지금은 한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합니다.
한의사로 수련하는 과정에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서 침을 놓아 드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버지는 정신을 차렸고,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해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말씀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자식이 술 때문에 어려움을 겪자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되는 원인 자체를 없애시는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늘 책을 가까이 하였고, 서예를 하였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족자에 시편의 말씀을 써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사제는 책을 통해서 마음의 양식을 얻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성서의 말씀으로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상하였습니다. 대녀들을 잘 챙기셨습니다. 집안 어르신들의 기일, 생일을 꼭 챙기셨습니다. 사제는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제는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길을 보여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천상에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행복이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하는 것,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 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사는 것’들은 정말 헛된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께서는 말보다는 삶으로 예수님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었습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결국 꽃이 시들어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 진정한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 해야 할 일은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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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한 선교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께 대한 소문은 꽤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참된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하여야 한다. 내가 신앙을 가지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 신앙을 가지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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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여기서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 ‘예수’ 라는 분이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고 널리 소문이 퍼졌는데, 그 소문을 헤로데도 들었습니다. <아마도 신하들이 헤로데에게 그런 일이 있다고 보고했을 것입니다.>
“몹시 당황하였다.” 라는 말은, ‘미신적인 불안감’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귀신이 나타나서 해코지를 할까봐 불안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을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헤로데의 모습들을 모두 종합해서 생각하면,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기는커녕 기고만장해서 예수님마저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양심의 가책’과 ‘미신적인 불안감’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말은, 죽은 이들의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부활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예수는 ‘되살아난 요한’이 아니다.” <헤로데는 부활은 안 믿었어도 귀신의 존재는 믿은 것 같은데, 그것은 내세에 대한 믿음과는 상관이 없고,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다는 말은,
‘호기심’이 생겨서 예수라는 사람을 한 번 ‘구경’하고 싶어 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예수님과 헤로데가 만나게 되는데, 그때 헤로데는 또다시 죄를 짓게 됩니다.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며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6-12)
헤로데가 기대한 것은 ‘신기한 일’을 구경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술사의 마술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비슷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주님이신 분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것은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빌라도와 헤로데가 친구가 되었다는 말은, 두 사람 다 똑같은 ‘속물’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일과 예리코의 세관장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쓴 일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1-6)
자캐오가 들은 예수님의 소문은 헤로데가 들은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그 소문을 듣고서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고,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간절함’이 신앙의 출발점이고,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이라도 대기를 원했던 그 간절함도 좋은 예가 됩니다.(마르 5,25-28)>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은, ‘관광객’으로서 그 나라를 구경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서 살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마치 관광하듯이(구경하듯이)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헤로데처럼 만들어 버리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정말로 ‘간절하게’ 해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즉 온갖 정성을 다 쏟아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간절함이 없으면 정성도 없고, 형식만 남아서,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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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우리에게 전하여 줍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의 활동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많은 이가 그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알아보았지만, 헤로데는 그를 감옥에 가두고 목을 베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 뒤 예수님께서 마찬가지로 놀라운 행보를 보이시자 일부 사람들은 헤로데가 죽인 그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회오리바람에 실려 승천한 매우 특별한 예언자였습니다.(2열왕 2,1-18 참조) 말라키서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 곧 종말이 오기 전에 그가 돌아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예언합니다.(말라 3,23-24 참조) 이 말씀 때문에 엘리야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유다인들 사이에 강하게 생겼는데,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엘리야로 오셨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밖에도 예수님을 구약의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위의 세 의견은 모두 예수님을 예언자적 인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맞지만 정확한 인식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의 신분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 그분의 본모습을 베드로 사도는 제대로 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9,20)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가운데, 오직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터 그분의 모든 것을 목격한 유일한 인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알아보려면 그분을 따르는 제자 여정에 제대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따르다 말다를 되풀이하다 보면, 예수님을 띄엄띄엄 알아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대충 비슷하니까 괜찮다고 주장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도 ‘엘리야’도 ‘옛 예언자’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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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현대인의 많은 질병 가운데 하나가 신경 정신 의학에서 말하는 불안 장애나 공황 장애, 강박 장애 등 불안과 스트레스 관련 질환이라는 연구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 이웃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내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일 수도 있습니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요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함께 나누고 이해하며 사랑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유독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많다면, 스스로 성찰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나 배려 없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처럼 “하느님도 당신을 사랑하시는데, 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라는 물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는 헤로데를 만납니다.
일찍이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헤로데는 자기 자신도 요한도 몰랐기에 예수님도 어떤 분이신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헤로데와 같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자신을 사랑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열린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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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비가 오는 날 우연히 돌 위에 있는 달팽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달팽이를 보면서 책에서 읽은 달팽이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글쎄 달팽이는 후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옆으로 갈 수도 없고 오로지 전진만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달팽이가 유일하게 하는 것은 그냥 앞으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그냥 멈추는 것뿐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생각하면 정말 별것 아닌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르게 보니, 자기 집 하나 짊어지고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잘 멈추기를 반복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실상 많은 것을 하면서도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때로는 우리에게도 달팽이와 같은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주님이라는 집을 짊어지고 주님 뜻에 맞게 묵묵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반대편에 있는 악(惡)을 피하기 위해 악 앞에서 과감하게 멈출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세상 것을 이것저것 다 하는 것이 잘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주님 것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주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의 기준만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결국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영주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했지요. 자신의 생일날,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내어준 것입니다. 사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의인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맹세를 지키려고 아무런 죄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는 당황하게 됩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악(惡) 앞에서 과감하게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안에서 비치는 자기 모습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악(惡)을 행하는데 거침이 없었고, 그 결과는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 살게 됩니다. 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죄 없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못된 영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달팽이처럼, 우리 역시 단순해야 합니다. 특히 악(惡) 앞에서 과감하게 멈추고, 선(善)을 향해서만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습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참 신앙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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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알고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당신 알고파>
당신 알고파
당신 곁으로
당신 알고파
당신 품으로
당신 알고파
당신 닮아서
당신 알고파
당신 되어서
당신 알고파
당신 따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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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우리가 있어야 할 곳>
오늘 독서 하까이서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입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다 헛것이라는 말씀이고, 아무리 애써도 다 헛수고라는 말씀이고 이것은 즉시 밤새 헛수고한 베드로 사도가 주님 말씀대로 그물질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얘기를 연상케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일생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한 사람인데도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것은 오늘 하까이서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면서도 그리고 이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고집스럽게 내가 하려고 하고 혼자 하려고 듭니까?
그런데 오늘 하까이 예언자를 통해 본래 하시려는 말씀은 이것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집은 무너져 있는데 재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집만 있으면 된다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성당은 없어도 자기 집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나무라시는 거지요.
성당은 없어도 되는가? 내 집만 있으면 되는가? 내 집에 기도방이 없어도 되는가? 내 집에 하느님이 안 계셔도 되는가?
이런 질문이 꼬리를 무는 오늘 우리에게 즉시 복음의 한 장면과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님께서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신 뒤
부모는 집으로 돌아갔고 당신은 성전에 남으셨지요. 이를 나무라시는 어머니께 당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냐고 되레 나무라셨는데 우리가 있어야 할 곳도 성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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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님 집의 파괴자들>
오늘 독서는 하까이서입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 상태인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집을 다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무라는 것이 오늘 얘기인데 프란치스칸인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특히 지난 9월 1일부터 프란치스코 축일인 10월 4일까지 교황님이 제정하신 "창조의 시기(Season of Creation)"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가 받은 소명은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허물어진 주님의 집이 무엇이냐 그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처음에는 그야말로 허물어진 성당들이었지요.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 허물어진 주님의 집은 고작 성당건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이고, 더 나아가 가톨릭 신자나 그리스도교 신자뿐 아니라 이슬람 신자나 무신론자까지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거라고 깨달음이 확장되었지요.
그런데 깨달음의 확장과 주님의 집의 확장은 이제 인류를 넘어섭니다. 프란치스코의 형제애는 지구뿐 아니라 우주 끝까지 가고, 인류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갑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사명을 받을 때 "가서"라는 말은 지나치고 "나의 집을 고쳐라."는 말만 중시했는데 깨달음이 확장되면서, 주님의 집을 고치되 "가서" 고치라는 말씀으로 알아 듣게 되었고, 그래서 형제애는 우주까지 그리고 피조물에게까지 가게 되었으며 주님의 집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이루는 것이 되었지요.
그래서 교황 프란치스코도 우리가 사는 지구를 <공동의 집>이라고 하고, 이 공동의 집을 우리가 함께 잘 가꾸어야 한다고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는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 에서 가져온 거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공동의 집을 보살피기는커녕 오히려 마구 파괴하고, 프란치스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에 대해 별 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하까이서처럼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그런데 우리도 그리고 프란치스칸들도 다른 환경 파괴자들처럼 공동의 집을 파괴한다는 말에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발끈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분들은 더 그러실 겁니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지구를 살리지 않으면 파괴하는 것이고, 그런 적극적인 의식 없으면 파괴하는 것이며, 깨달음과 의식이 프란치스코처럼 모든 피조물에게 가지 않으면 파괴하는 것이고, 소비를 지금보다 현격하게 줄이지 않으면 저를 포함하여 모두 파괴자들이라고 저는 오늘 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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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9)
<돌아가자!>
오늘 복음(루카9,7-9)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말씀'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해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관한 소문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한 소문은 이러했습니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루카9,7.8)
아마도 헤로데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는 소문에 몹시 당황해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죄짓고 못삽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요즘 예레미야서를 필사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완전한 타락의 시기, 곧 멸망의 때에 파견되었던 눈물의 예언자인 예레미야가 하느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이렇습니다.
"배반자 이스라엘아, 돌아오너라. 나는 자애로우니 영원히 진노하지 않으리라. 단지 네 죄를 시인하기만 해 다오. 네가 주 너의 하느님을 거슬러 반역했다고.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내가 너희 배반을 바로잡아 주리라."(예레3,13.14.22)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죄짓고는 못 삽니다. 이제와 영원한 벌이 죄지은 이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즐거운 추석명절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추석명절 잘 보내시기를 빕니다. 민족의 고유명절을 보내면서 그동안 가족들 사이에서 풀리지 않은 어떤 앙금이 남아 있다면, 나의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위해 이 앙금이 풀리는 명절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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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KVd7to546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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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올바르지
않는 것을
멈출 수 있는
지혜가 참된
지혜이다.
헛소리와
침묵사이에
우리가 있다.
그림자와
실체사이에
우리가
살아간다.
듣지 말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우리들
세상이다.
그야말로
절제가 필요한
세상이다.
절제란
떠도는 소문을
서로에게
옮기지 않는
언어의
침묵이다.
올바르지 않는
소문은 소중한
한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한다.
헐뜯는 험담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인색한 마음
안에서는
소문만
무성할뿐이다.
소문이 아닌
참된 만남이다.
소문의
그 사람이 아닌
진짜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소문과 오해는
참된 만남을
언제나
방해한다.
빠르게 판단하고
서둘러 단정하는
우리들이다.
사랑에는 언제나
성찰이 필요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소문을 성찰하는
시간이 되어야한다.
말(言)의 순교가
필요한 때이다.
순교는
절제이다.
순교의 길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절제이다.
절제는 소문의
자리가 아닌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겸손이다.
교만과
소문사이에
우리가 있고
그 교만을
치유하는
절제와 반성이다.
소문의
예수님이 아닌
참된 예수님을
우리 내면에서
만난다.
소문이 아닌
소중한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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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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