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210. 묵상글 ( 2024년 2월 10일 설. - 행복의 근원으로부터. 등 )
----------------------------------------------------
240210. 2024년 2월 10일 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행복의 근원으로부터
설 명절은 우리가 우리의 시원을 깊이 성찰하는 날입니다.
시원(始原)이란 우리의 시작과 근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존재와 삶이 어떤 근원에서 시작되었는지 돌아보고,
우리의 존재와 삶이 시작된 근원이 어디인지 돌아보는 날입니다.
그리고 나의 행복의 근원은 어디인지,
하느님이 나의 행복의 근원인지 불행의 근원인지 돌아보는 날입니다.
사실 지금 내가 불행하다면 욥처럼 자기가 태어날 날을 저주하고,
자기를 배었던 어미의 태를 저주하고
마찬가지로 자기를 생겨나게 하신 하느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기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내가 태어난 날을 축하하고,
내가 왜 이렇게 행복한지,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누가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돌아보고 감사할 것입니다.
시원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행복을 근원으로부터 찾지 않고 자기 혼자 기를 썼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불교는 행복도 불행도 자기 업보라고 얘기하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복하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행복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느님께서 복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합니다.
오늘 민수기의 모세는 그래서 이렇게 백성에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와 생명이 그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했다면
한 해의 시작과 하루의 시작도 그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느님께서 복 주시기를 빌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게만 복 주시기를 빌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먼 데 있는 사람까지 하느님께서 복 주시기를 빌 것입니다.
사실 자기 행복만을 위해 비는 사람은 자기 행복에 급급한 사람이고
그러기에 자기도 행복하기 어렵거나 겨우 자기만 행복할 것이고,
멀리 있는 사람까지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이 크고 넘칠 것입니다.
저의 올해 목표도 복음 전파이고 행복 전파입니다.
같이 사는 공동체 형제에게 눈 뜨자마자 미사 드리면서 행복을 빌고,
우리 식당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행복을 빌어주겠습니다.
음식 맛에 끌려 우리 식당에 오지 않고
사랑에 끌려 우리 식당에 오고
오면 행복해지니까 우리 식당에 오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창피한 계획이지만,
올해는 복을 빌어주지 못할망정 저주는 비록 작은 저주일지라도 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저주란 염병할 놈이나 벼락 맞아 죽을 놈이라고 욕하는 것처럼
누가 진짜 불행해지기를 바라고 욕하는 그런 큰 저주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저 자주 정치인들을 보고 빌어먹을 놈들이라고 작은 저주를 퍼붓고,
자기밖에 모르는 얌체 족속들에게 못된 놈이라고 지나가는 욕을 퍼붓는 것인데
비록 그런 작은 저주와 지나가는 욕일지라도 올해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새해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셔서 부디 자신도 행복하고,
그 행복을 이웃과 나눠 이웃도 행복하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
240210. 2024년 2월 10일 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내가 그 어떤 어려움에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자는 진정 복된 자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레크)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축복을 빌어주는 이른 바 ‘축복기도’는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 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그렇게 축복기도를 하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렇게 할 때, 이미 자기 자신이 변한 것입니다. 거부하고 미워하던 그 상대를 축복해주는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자신 안에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서 그를 ‘위하는 마음’을 북돋으신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변화됩니다.
이 소박한 우리의 ‘축복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공간을 열어 드립니다.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주님!
깨어있게 하소서!
단지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임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리워하는 임을 이미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망을 품고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임이 나를 이미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 임이 날 그리워하는 희망 안에 제가 깨어있게 하소서! 아멘.
----------------------------------------------------
240210. 2024년 2월 10일 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고 건강 하시길 기원하며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길 빕니다. 아울러 오늘‘통,통,통,통’4 가지 복을 선물로 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 1.의사소통, 2.운수대통, 3.만사형통, 4. 쓰레기통입니다.
1.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통해야 하고, 이웃과 소통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과 잘 통하려면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상대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들어주려고 할 때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의사소통의 일차적 수단은 언어입니다. 고운 말, 바른말, 따뜻한 말을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일상 안에서 마음에 잘 담아놓아야 합니다. 친밀감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 벽을 무너뜨리고 잘 통하게 됩니다. 통하면 생명이 주어지고, 막히면 죽음이 드리웁니다. 혈관도, 바람도 통해야 합니다.
2. 운수대통입니다. 운수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천운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 주신 길에 하느님 전지전능의 은총으로 하는 일마다 크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 되리라는 믿음 안에 지내시길 기도합니다. “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하느님께 의탁하는 우리의 삶에 그분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시고 항상 동행하십니다.
3. 만사형통입니다. 모든 일이 형통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욕심으로 내 뜻을 이루려고 하면 시끄러워집니다. 관계가 어려워집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 를 찾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라”(시편1,2-3). 주님께서 강복하셔서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언제나 잘 되길 바랍니다.
4. 쓰레기통입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성직자’랍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정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레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걸맞은 삶을 살아가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소중한 사람,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 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데에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 주고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습니다.
명절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 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116,12).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도 없고, 도움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축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른에게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 형제와 서로에게“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 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치레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6,38).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한결같이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210. 2024년 2월 10일 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설’날입니다. 2024년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복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적인 복입니다. 세상적인 복의 기준은 ‘재물, 건강, 장수, 인덕, 선종’입니다. 예전에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줍니다. 재물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 줍니다. 재물은 자선과 나눔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땀 흘려 공부하고, 일하는 것도 재물을 얻기 위함입니다. 2024년에는 모두가 이웃을 위해서 나눌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은 우리에게 활력을 줍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합니다. 재물을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있지만 건강을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건강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2024년에는 활력이 넘치는 건강을 유지하면 좋겠습니다. 장수는 모든 생명이 원하는 본능입니다. 진시황은 오래 살고 싶어서 ‘불로초’를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듯이, 장수는 오늘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입니다. 2024년에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인간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가 없다면 우리는 외로운 섬에 홀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는 인생삼락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부모가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고, 멀리 친구가 찾아와서 대화하고, 좋은 제자를 기르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재물이 많아도, 건강해도, 오래 살아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면 허망한 것입니다. 2024년에도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선종은 착하게 살다가 복된 죽음을 맞이하도록 올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선생 복종 정로'를 줄인 말입니다. 시작은 미미했을지라도 끝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선종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박해를 받아서 순교했을지라도, 하느님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을지라도 우리는 그 죽음을 ‘선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분들은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입니다. 우리 모두 선종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일반인이 생각하고 있는 이런 복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며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늘 깨어 지키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가장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깨어 있는 종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면서 시작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깨어 있고, 믿는 사람이 복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복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만남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복은 이 세상에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은 이 세상은 물론 하늘나라에서 완성되는 복입니다. 그렇기에 때로 시련도, 박해도, 고난도,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복입니다. 설날입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조상들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
240210. 2024년 2월 10일 설.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예전 광고 중에 “어 내 마음대로 또 있네!”라고 하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이 광고는 커피 광고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세상 사는 것 중에 내 마음대로 대는 것이 과연 몇 가지가 있는가? 특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죠? 태어남과 죽음이지요. 우리는 태어남도 죽음도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이면서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극복하고자 하느님께 기도 합니다.
죽음에 다가설수록 겸손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가 언제 죽음의 문에 도달할지 모릅니다. 이러한
복음은 우리에게 다가올 날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니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준비하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보물을 준비할까요? 돈을 준비할까요? 좋은 집을 준비할까요?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오늘은 설입니다. 설에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친지들과 가족들이 모여 새해 인사를 나누고 새해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조상들을 기리며 그분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정성과 사랑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은 바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새해에 건강을 빌어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빌어주고, 가족들을 사랑하고 소망을 나누며 지내는 모습. 또한 조상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빌어 주십시오. 그러면 성경에서 전하듯이 하느님께서 내가 복을 빌어준 이와 나와 내 가족에게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
금강산도 식후경
‘금강산도 식후경’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식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식사를 거르면 내 앞에 아름다움을 제대로 즐길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대로 식사하지 않으면 좋은 것을 좋게 즐길 수 없을 것입니다.
배고프면 짜증과 화가 밀려오는 분들은 위의 말을 더욱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활동과 봉사도 식사를 먼저 해야 합니다.
신앙의 식사는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
240210. 2024년 2월 10일 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음력 1월 1일로, 조상님을 기억하면서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어떤 분은 “또 한 살 더 먹는구나.”라면서 슬퍼할지 모르겠지만, 그 모두를 뛰어넘어서 또 새해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더불어 나를 이 세상에 존재케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인 오늘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덕담을 나누는데, 과연 주님께서는 어떤 덕담을 우리에게 전해주실까요? 책을 읽다가 미국에서 15년 동안 인류학을 가르친 어느 대학교수의 인상 깊은 체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대학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요즘의 대학생들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발표도 거의 하지 않고, 책도 미리 읽어오지 않고, 교수를 만나러 오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학창 시절과 다른 학생들의 이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수 생활을 한 지 7년 만에 맞이하는 안식년에 할 획기적인 결심을 세웁니다. 다시 대학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새내기 대학생이 된 교수님’은 1년 동안 기숙사에 살면서 강의를 듣고 과외활동하는 등 여느 대학생들과 똑같이 지냈습니다. 어떠했을까요? 교수 때는 학생들이 수업 준비를 제대로 안 해 온다고 생각했는데, 학생 입장이 되어 보니 여러 과목에서 동시에 내주는 자료를 다 읽을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학생들은 시간 관리를 하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는 진짜 알지 못하면서 퍼붓는 혐오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혐오와 대립과 갈등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닐까요?
앞선 교수처럼 역할을 바꿔서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는 데 초점을 맞춰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상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될 것이고, 이런 헤아림에서부터 사랑이 울려 퍼지는 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작은 바로 ‘나’부터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덕담을 전해주십니다. 어떤 준비이겠습니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입니다. 그 준비는 바로 사랑의 실천에만 있었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함께 살 수 있는 사랑을 해야지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세상에 펼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올해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랑하는 ‘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면 어떨까요?
-----------------
오늘의 명언: ‘바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데릭 시버스).
----------------------------------------------------
240210. 2024년 2월 10일 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화의 여정
-존엄한 품위의 삶-
“감사하십시오, 겸손하십시오, 깨어 있으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새해 첫날을 요약한 본기도가 참 깊고 풍부하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설날뿐 아니라 평생 매일 새해 첫날처럼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 하느님,
오늘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오니,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베푸시어,
저희가 조상들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새하늘 새땅의 새날이자 첫날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목적없는 무의미한 날이 아니라, 하루하루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성화 여정중의 선물같이 귀한 날들입니다. 삶은 선택이자 은총임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여 믿지 않으면 불교의 윤회설을 믿든지, 양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다음과 같은 인생관에 도달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인생은 무상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삶은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지의 이미지일뿐입니다. 실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얇고 연약한 베일일 뿐이며, 그 너머에는....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즘 읽은 양자 물리학이 말하는 텅빈 허무의 세계관이요, 여기에는 하느님의 자리가, 영혼의 자리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결코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삶의 여정을 말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물음만 있고 답이 없는 인생관입니다.
어제 수도공동체의 저녁식사 독서중 성규 “제7장 겸손에 대하여” 마지막 부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성화의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빛나는 희망의 표지처럼 생각되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의 이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승은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
성화 여정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기 까지 항구해야 할 세 덕목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감사하십시오.
감사의 사랑, 감사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민수기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성화의 여정중 첫째 덕목이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이 감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즐겨 하시는 일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음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축복입니다.
오늘 새해 첫날인 설날인 오늘 주님은 제1독서 민수기의 사제의 축복을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그대로 우리 교회공동체는 물론 하나하나에게 내리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바로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축복의 하느님입니다. 새삼 우리 모두 축복받은 귀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가난도 탐욕도 아닌 사랑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저절로 이에 대한 자발적 응답이 감사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감사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감사와 함께 가는 기쁨입니다.
둘째, 겸손하십시오.
겸손의 사랑, 겸손의 은총입니다. 제2독서 야고보서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도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일 때 교만이지, 진정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짧은 가르침의 요지는 겸손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시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만 보면 인생무상의 허무이지만 궁극의 배경이 되시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인격적 주님이, 기도와 소통의 주님이 계시기에 비로소 우리 삶도 의미를 지닙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 앞에 무릎 꿇는 흠숭과 경배의 자세가 겸손입니다. 말그대로 거룩한 겸손입니다. 이런 겸손과 함께 가는 온유(溫柔)입니다.
셋째, 깨어 있으십시오.
깨어 있음의 사랑, 깨어 있음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이 주는 가르침입니다. 깨어 있음이 기도입니다. 영성생활이 기도생활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 깨어 있는 삶입니다. 잠들어 있는 삶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있는 삶입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셋다 “깨”자 돌림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메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이 아들이 올 것이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닙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 소임상 책임을 다하고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기에 기쁘고 인내롭게 주님을 깨어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기다릴 분이 없으면 깨어 있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도대체 주님이 아니곤 평생 누구를 깨어 기다리며 살 수 있겠는지요. 애당초 기다릴 주님이 없으면 한결같이 깨어 있는 삶도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요 지혜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누구나 성화의 여정을,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삽니다. 주님을 따라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입니다. 성화의 여정과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성공적 성화의 여정을 원하십니까?
1.감사하십시오.
주님의 축복에 대한 당연한 자발적 응답입니다.
감사와 함께 가는 기쁨입니다.
2.겸손하십시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 갈수록 겸손입니다.
겸손과 함께 가는 온유입니다.
3.깨어 있으십시오.
희망의 주님을 기다릴 때 비로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 없이 깨어 있음은 불가능합니다.
도대체 주님 아니곤 누구를 평생 한결같이 깨어 기다릴 수 있겠는지요.
깨어 있음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수요 지혜입니다.
감사의 사랑, 겸손의 사랑, 깨어 있음의 사랑입니다. 결국 성화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의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새해 설날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
240210. 2024년 2월 10일 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설에 벗에게>
오늘은 설이니
주님의 축복이 되어
벗에게 스미어요
서러워서 설이라
설이 서러운 벗에게
따뜻한 품이 되어주어요
낯설어서 설이라
설이 낯선 벗에게
든든한 곁이 되어주어요
새해가 선다고 설이라
설이 설레는 벗에게
벅찬 희망이 되어주어요
한 살 더 먹어 설이라
설이 버거운 벗에게
기름진 밑거름이 되어주어요
사려야 한다고 설이라
설이 조심스러운 벗에게
바른 길이 되어주어요
오늘은 설이니
주님의 축복이 되어
벗에게 스미어요
----------------------------------------------------
240210. 2024년 2월 10일 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7-38)
낮과 밤중과 새벽은 인생의 세 시기를 나타낸다
우리는 하룻밤을 서너 단위로 나눕니다. 적의 움직임을 살피는 성벽 위의 파수꾼은 세 시간 또는 네 시간마다 임무를 교대하는데, 그 단위가 경입니다. 우리에게도 세 시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소년기, 두 번째는 장년기, 마지막 세 번째는 노년기입니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시기인 소년기는 아직 마음이 순진하고 이해력이 약한 까닭에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 야할 때가 아니고 잘못이 있어도 용서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기(장년기와노년기)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경건하게 살아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젊든 늙었든, 누구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비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을 테니까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우리가 자신과 남을 객체 내지 주체로 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계명에 따라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계와 그 거주자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우리의 행위는 공동체 전체를 섬기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웃의 아픔과 기쁨을 보고 응답하는 통전적인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려가 붙잡은 진리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한 몸이고, 하느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붙잡은 진리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한다. 이는 우리의 이웃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이웃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힘으로, 온 정신으로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루카 10,27). 실로 모든 피조물은 자신들의 근원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무른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117)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 책에서 중심 화두는 유일신 신앙과 종교 다원론의 관계이므로, 이슬람교의 역사적 발전과 자세한 신앙 내용이나 신학을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앞에서 살핀 간략한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의 내용을 살펴 보기로 하자.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 특징
첫째, 이슬람교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세적 야훼 유일신 신앙과 예언자들의 유일신 신앙 전통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천민 사상을 완전 탈피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론적 유일신 신앙과 많이 통하면서도, 삼위일체론을 부정함으로써 예수를 예언자 반열에 세웠다. 이슬람교는 글자 그대로 철저 한 유일신 하나님 한 분만 섬기려는 종교이다.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이사야 등과 같은 예언자, 예수, 조로이스터, 무하마드 등 모든 인물을 유일신이 부르고 파송한 예언자들이라고 본다.
흔히 아랍계 민족이 이슬람교를 아랍 민족의 종교인 양 자부하는 것은, 마치 야훼 신앙을 천민 이스라엘 민족 신앙처럼 생각하려 했던 타락한 유대교처럼 잘못된 것이다. 이슬람교는 어느 종족이나 인종이나 문명이나 지정학적 실체에 제한된 유일신 신앙은 참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고 본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이슬람교는 유일신 신앙의 원조를 모세나 예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족장인 아브라함에게 돌린다(8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