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워낙 가슴이 뛰어서
오늘이 시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 문제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세시부터 이어진 끊임없는 잡념에도 문득 가슴 한 구석에 일말의 불안감이 들었던 건
아무래도 오늘의 경기가 원정팀들의 무덤이라는 앤필드에서의 경기였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앤필드는 첼시에게 악몽과도 같은 장소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작년 가르시아에게
골 아닌 골을 얻어맞고 탈락했을 때부터, 올 시즌 리그에서 2대0 참패를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앤필드에서 골을 넣어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항상 머릿속을 스치는 불안감은
모두 거기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골의 침묵.
앤필드에서의 리버풀은 정말 단단한 수비를 자랑하는 팀이었다. 단적인 예로, 일차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단단한 수비를 선보인 다니엘 아게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차전에선 거의 보이지도
않았던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는 어제 에프엠에서의 그런 움직임을 보였다. 필자는 그 원인을
아무리 생각해도, 'THE KOP'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스탠드를 비춰도 '님은 혼자 걷진 않음'
이라고 적힌 붉은 머플러가 보였다. 스탬포드 브릿지에서도 우린 그런 열광적인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울리는 서포터들의 함성 소리에, 마음속을 스치던 그 불안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충분히 예상되었던 대로 게임이 흘러갔다.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미드필더들인
클로드 마케렐레나 프랑크 람파드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게 당연하게 여겨질만큼, 앤필드는
위대했다. 그들은 경기를 지배했고, 전반 3~40여분 간 맹폭을 몰아쳤다. 그 와중에서 아게르에게
골을 허용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첼시는 이제 더 쫓기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한골만 넣으면 리버풀은 세 골을 넣어야 했다. 하지만 리버풀이 홈에서 올 시즌 5골밖에 허용하지
않았던 팀이라는 것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을 들게 했다. 전반 마지막으로 가면서
디디에 드록바가 정말 환상적인 기회를 맞았고, 그 때 발등을 완전히 꺾어 반대편 사이드로 찼으면
경기는 완전히 바뀌었고, 지금 이 글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올시즌 절정의 결정력을 뽐내며
신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에게서, 레이나의 정면으로 볼을 찰 수밖에 없게 만든 그 보이지 않는 힘이
바로 앤필드의 무서움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야유는 그 누구에게도 강한 심리적
압박감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후반엔 제발 칼루가 바뀌길 바랬다. 그는 경기 내내 보이질 않았으며, 어쩌다 찾아오는 공격 기회에도
한 템포, 두 템포 늦은( 혹은 너무 이른 ) 멍청한 패스템포로 공격을 망치곤 했다. 지난 볼튼전 그는
최고의 컨디션을 보였지만, 아직까지 첼시 클래스의 팀에는 적응이 덜 된듯한 모습을 보였다. 한 시즌
내내 그는 최고의 컨디션을 보인 다음 게임에선 닌자모드를 발휘하곤 했다. 그런 면에서 볼튼전이
끝나자마자, 로벤이 돌아온다는 뉴스는 큰 희망을 갖게 했다. 로벤 - 드록바 - 조콜이라면 지난 시즌
파괴력을 보였던 그 공격진이었기 떄문이다.
그러나 무링요는 결코 칼루를 바꾸지 않았다. 후반전의 후반을 향해가며 첼시는 분명 공격 기회를
잡았고, 조금 더 돌파가 성공했고, 조금 더 패스가 연결되었다면 경기는 90분 내에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돌파 저지와, 패스 연결 실패의 현장엔 살로몬 칼루가 있었다. 교체했어야 했다. 아르옌
로벤은 그 훨씬 전부터 몸을 풀고 있었으며, 비록 기복이 있긴 하지만 절정의 스피드를 뽐내는
숀 라이티도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 로벤을 투입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로벤 - 드록바 - 조콜의,
기존의 433 형태를 유지하면서 경기를 해 나가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벤의 투입이 너무 늦었다.
로벤이 부상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그의 경기력에 신뢰를 보낼 수 없었고, 부상의
재발 위험도 컸기 때문에 그를 쉽사리 투입할 수 없었던 건 인정한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4강전,
원정팀들의 무덤이라는 앤필드에서의 과감하지 못한 선택은, 결국 결과론적으로 탈락을 이끌어왔다.
연장전 로벤과 라이티가 보여준 스피드는 환상적이었다. 애초에 첼시는, 맨유의 마이클 캐릭이나
아스날의 쎄스크 파브레가스, 리버풀의 사비 알론소 같이 중원에서 짧은 스루패스를 세밀하게
넣어줄 수 있는 선수가 없다. 그런 선수가 없다기보단, 그런 공격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드록바의
포스트플레이는 세계적이다. 오늘도 캐러거와 아게르, 둘을 상대하면서도 제공권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첼시는 드록바가 떨어뜨려주는 볼을 쇄도하는 양 윙포워드들이 주워먹는 형식의 공격을 한다.
칼루나 조콜이 조금 더 사이드 쪽에서 수비 뒤를 돌아들어가는 플레이를 하고, 그 공간으로 스루를
찔러주는 것은 그닥 첼시의 스타일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람파드는 짧은 스루패스보다 긴 거리에서
한번에 때려주는 롱패스가 훨씬 더 수준급인 선수이다. 미켈이나 마케렐레는 확실한 홀딩으로 나와,
그럴 여지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연장전엔 그렇지 않았다. 로벤이나 라이티는 지친 리버풀의 수비의 뒤를 팠다. 스피드에선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연장전에 90분을 통틀어 합한 기회보다 더 많은 골기회가 났다는 것은 그걸
증명한다. 그렇기에, 칼루의 늦은 교체가 너무 아쉽다. 무링요의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본다.
승부차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로벤과 제레미의 키커 투입은, 제일 지치지 않고 제일 집중력이 좋을
수밖에 없는 키커를 투입한 것이었고, 그 선택은 전적으로 옳았다. 결과는 어쩔 수 없다. 페페 레이나의
선방이 워낙 좋았으니. 진 건 진 것이다.
그렇다. 진 건 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절실하지 않았음이,
조금 더 간절하지 않았음이,
조금 더 승리를 믿지 않았음이,
조금 더 기도하지 않았음이,
조금 더 리버풀을 경계하지 않았음이,
지금의 필자에게 큰 상처로 다가온다. 첼시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그 어느때보다 절실했지만, 막상
팬이었던 필자에겐 당장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아,
오늘 새벽에 집을 나서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다 내 탓이다라고, 세 번 되뇌이었다.
첫댓글 저도 지난시즌 앤필드 4:1 외엔 기억이;;
타팀팬이지만 좋은 리뷰네요. 확실히 칼루는 좀 빨리 뺐었으면 좋았을 거라는데 동감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아 블루스 아쉽네요 ㅜㅜ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