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성불하고도 여유가 있음”의 글
一句「南無阿彌陀佛」,
只要念得熟,成佛尚有餘裕,
不學密法,又有何憾?(三編下.覆周群錚居士書)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데 익숙해지기만 하면 성불하고도 여유가 있거늘,
밀교법을 배우지 않는다고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삼편하. 주군쟁거사에게 보내는 편지)
저는 자주 이 법어를 떠올리고 자주 이 법어를 가지고 강의도 합니다.
이것은 대사님의 그 시대에 많은 사람이 정토법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밀교가 더 수승하다고 여겨 밀교를 배우러 갔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어떤 제자가 대사님께 편지를 보내 질문하자 대사께서 그에게 이런 답장을 보내신 것입니다.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데 익숙해지기만 하면”: 무엇을 “부르는 데 익숙해진다(念得熟)”라고 말할까요? 바로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을 갖추고 일향전념하며 어떤 일에 부딪혀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욕해도 “나무아미타불”, 남이 나를 때려도 “나무아미타불”, 남이 “넌 미친 사람이야.”라고 말해도 “나무아미타불”……
이게 바로 한 구절 명호를 부르는 데 익숙해지면 어디서든 전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겁니다.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데 익숙해지면 성불하고도 여유가 있다”: 무엇을 “성불하고도 여유가 있다,”라고 말할까요? 당신의 성불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과 인연 있는 사람도 모두 성불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당신이 염불하면 서방정토로 가서 성불할 수 있고, 당신이 성불하면 중생구제를 할 수 있는데, 한두 명이 아닌 수많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성불하기 전에는 명호에 의지하여 스스로 수행하고, 이미 성불한 후에는 명호에 의지하여 중생구제를 한다.”라고 말씀드렸듯이 당신의 성불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와서 중생구제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성불하고도 여유가 있다”, 보세요,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간절하게 말씀하셨습니까? 당신은 또 뭐가 만족스럽지 못합니까?
“밀교법을 배우지 않는다고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당신이 이 진언 저 진언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유감이 있습니까? 유감이 없습니다.
《금강경》을 독송할 줄 모른다고 해서 무슨 유감이 있습니까? 《능엄주》를 모른다고 해서 무슨 유감이 있습니까? 밀교의 오체투지 십만 배를 못 했다고 해서 무슨 유감이 있습니까? 사대명산을 일일이 참배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유감이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이런 것을 다 했다면, 사대명산도 다 참배했고, 십만 배도 다 마쳤고, 《금강도》도 외울 줄 알고, 모든 진언을 다 알고, 천불만불도 다 예배했지만, 유독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데 익숙하지 않으면 당신의 유감은 너무나 클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렇게 많은 걸 배웠어도 혹업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지 못했으면 당신은 여전히 육도윤회를 해야 하므로, 이 유감은 굉장히 클 것입니다. 염라대왕 앞에 가서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큰 힘을 들여 이 세상에서 “노수행(老修行: 수행을 오래하고 많이 한 자)”라는 헛된 명성만 얻고 실질적은 과보를 얻지 못했으니 너무나 유감스럽겠지요!
첫댓글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성불하고도 남거늘, 밀교법을 배우지 않는다고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