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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디한인교회
 
 
 
카페 게시글
믿음의 사람 스크랩 루터의 아내
섬김과 나눔 추천 0 조회 20 20.07.18 01: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루터의 아내 

   주도홍

 

극적인 수녀원 탈출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많이 세상에 알려진 여인은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1499-1550)일 것이다.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루터의 아내로서뿐 아니라, 종교개혁자 루터를 향한 그녀의 만만치 않은 야무진 역할이 더욱 그녀를 소문나게 하였을 것이다. 과연 그녀는 16세기 당시 교회의 한 여인으로서, 게다가 그 유명한 종교개혁자의 아내로서 과연 어떠한 역사적 생애를 이룩하였을까?

1499년 1월 태어난 그녀는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재혼과 함께 독일 님브센(Nimbschen)에 위치한 수녀원에 들어갔고, 16살이 되었을 때는 비로소 공식적인 서원을 하여 수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을 위시하여 전 유럽에 열화와 같이 번져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개혁의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녀 역시 루터의 저술을 수녀원에서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마음은 과연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9명의 님브센 수녀들이 자신들의 가는 길에 의혹을 가지게 되었고, 함께 루터의 상담을 받게 되었다. 이에 루터는 말할 것도 없이 수녀원을 벗어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조언하면서, 이를 위해 루터 역시 나름대로 도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루터가 있는 독일의 작센(Sachsen) 지역은 신앙적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공작 게오르그(Georg)가 통치하는 지역은 여전히 카톨릭을 지지하며, 다른 한쪽은 루터의 친구이면서 또한 생명의 은인으로 역사 가운데 소문이 나있는 현공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통치하는 개신교 지역이었다. 그런데 카타리나 폰 보라가 소속되어있는 님브센 수녀원은 다름아닌 게오르그가 다스리는 카톨릭 영토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매우 강경하여 수녀원에서 탈출하는 수녀를 도왔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루터는 매우 신뢰할 수 있는 한 상인 토르가우(Torgau) 출신 레온하르트 코페(Leonhard Koppe)와 함께 특별한 수송작전으로 원하는 수녀들을 수녀원에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구운 청어를 담은 비린내나는 큰 통에 수녀들을 함께 넣어서 위장하여 수녀원을 탈출을 시키는 그러한 꾀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금 더 언급하면, 탈출하고자 하는 수녀들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부활절 그날 저녁에 수송작전에 참여하여 부활절이 끝난 다음 화요일에 루터가 사는 비텐베르그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 학생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흥미로운 편지를 보냈다. “며칠 전 여기에 도착한 한 마차 사건보다 더 흥미 진지한 이야기는 없다. 그 마차는 처녀들을 가득가득 짐으로 싫어왔다. ... 만약 하나님께서 그녀들의 신랑들을 책임지실 것이라면, 이 살벌한 기간에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루터 역시 이들의 장래에 대해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곧 이들이 다른 그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 수녀는 교사가 되었으며, 둘은 어느 가정에 집안 일을 돌보게 되었으며, 다른 여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 중에서 카타리나 폰 보라는 2년 동안 비텐베르그의 한 가정에서 가사를 도우면서 훌륭하게 가사를 몸에 익혔다.

 

매력적인 여인

사실 카타리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그 중 제일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당시 덴마크의 왕이 피신하여 이 곳 비텐베르그에 거하였는데, 그는 그녀에게 금반지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또한 뉘른베르그 출신 히에로니무스 바움개르트너(Hieronymus Baumg?rtner)는 25세의 귀족 가문의 청년으로서 당시 24세의 카타리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여 결혼하기를 원하였다. 가능한 한 빨리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기를 원했으나, 그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루터가 편지를 썼다. “여보게 빨리 일을 진행시키게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잃게 될 것이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총각 히에로니무스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총각의 태도를 루터는 나무라지 않았는데, 자식은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함이 옳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루터는 카타리나를 글라츠(Glatz) 박사에게 중매하였으나, 그녀는 루터의 그러한 호의를 박절하게 사양할 수 없어 암스돌프(Amsdorf) 박사를 통하여 거절하였다.

 

루터에게 향하는 카타리나

사실 카타리나의 마음에 드는 신랑감으로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 그토록 호의를 베푸는 루터와 암스돌프가 바로 그러한 남자들이었다. 카타리나는 루터나 암스돌프를 가까이 하면서 여러 면에서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두 남자들은 아직 독신들이었으나, 자신들과 카타리나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연령차로 인하여 결혼은 아예 생각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의 나이 차는 루터가 16세나 연상이었다. 루터가 이러한 그녀의 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결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과연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독신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를 숙고한 끝에, 루터는 혼자 살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루터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주게 된 것은 외적인 원인 때문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7년 후에는 결혼을 하여 아버지가 될 것이다’고 말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큰 너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1520년 루터가 프리드리히 현공의 도움으로 농부로 변장하고 바르트부르그(Wartburg) 성에 칩거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소문은 비텐베르그에서 몇몇 수도사들이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때 루터는 “오 하나님! 우리 비텐베르그 사람들이 제발 나에게는 결혼을 강요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사한 사건이 1524년에도 있었는데,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Argula von Grumbach)가 루터에게 결혼을 통하여 복음의 확신을 제시하기를 강요하였을 때도 루터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 때 루터는 그녀에게 “나는 결혼을 아직 생각하지 않았소”라고 말하면서, “내가 나무와 쇠로 만들어져서도 아니며, 나의 육체와 정욕이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결혼을 나는 아직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이단이라도 된 것처럼 무서운 죽음의 위험이 시시때때로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타리나를 루터 부모에게

그런데 42세의 루터가 다른 생각을 하게되면서 카타리나를 부모에게 소개하게 되었을 때, 루터의 아버지는 얼마나 놀랐을까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수도원에서 독신서원을 한 아들이 결혼을 한다는 말에 아버지는 충격적이었으나, 반면 이제 손자를 볼 수 있게 됨을 생각할 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루터를 향하여, “그의 아버지는 행복하였을 것이며, 교황은 아주 화가 났었을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은 즐거워하였을 것이며, 사탄들은 통곡하였을 것이다. 그의 결혼은 복음의 음성을 들은 루터의 확신에 찬 증거임이 틀림이 없다”는 말은 적절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루터의 결혼에로의 결단은 엄격히 볼 때, 그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앞섰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당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여기 저기서 혼인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적 과시적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잘못된 카톨릭의 이원론적 결혼관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성경적 결혼관에 동의하면서 이에 따른 신앙고백적 행위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루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 찾아온 부부간의 사랑은 얼마간 살고 난 후 였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친구에게 한 루터의 말을 통해서도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도 아니했고, 내 마음이 그녀를 향해서 뜨거워지지도 아니하네. 그럼에도 내가 나의 아내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캐테(카타리나의 애칭)를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뺏길 수는 없네. ... 하나님께서 그녀를 나에게 선물하셨고, 나를 그녀에게 주셨기 때문이네. ... 다른 여인들과 나의 캐테를 비교할 때 다른 여인들에게서 나는 보다 많은 결점들을 발견하게 되네. 물론 그녀 역시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훨씬 큰 덕성들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네.”


“하나님의 선물”

토마스 뮌쩌(Thomas M?ntzer,1490?-1525)가 이끄는 농민전쟁의 회오리바람이 한참 불어닥치고 있는 1525년 6월 13일 네 명의 증인 앞에서 루터는 케테와 소박하게 그러나 역사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두 주 후에 울려퍼지는 나팔소리와 함께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을 축하하는 거리축제가 열렸다. 풍족한 향연이 베풀어졌는데, 이 축제에 루터의 부모도 기쁨으로 참석하였다. 루터의 행복한 결혼과 사랑스런 부부를 바라보며 독일의 교회사가 마틴 브레히트(Martin Brecht)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을 향한 신앙고백적 행위였다. 케테는 의식 있는 인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꺼이 남편인 루터에게 소신을 말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였다. 1526년에 태어난 요한네스를 위시하여, 1527년 엘리자베트, 1529년 마그달레네, 1531년 마틴, 1533년 파울 그리고 끝으로 1534년 마가레테가 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 엘리자베트는 1528년에 마그달레나는 1542년에 아깝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났다. ... 점점 규모가 커져 가는 집안 일을 활동적이고 규모 있는 이 여인은 무엇보다도 더 잘 감당하여야만 하였다”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루터가 그녀와 결혼한 후 1년 정도 되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상냥하며, 모든 점에서 순종하며, 내가 바랬던 그 이상으로 예리하고 영특하여, 이제 나는 나의 가난을 대부호로 소문난 크레수스(Kr?sus) 왕의 부귀와도 바꿀 마음이 전혀 없네”라고 말하였다. 그녀를 자신의 은사(Carissima)로 칭하기까지 했던 루터는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캐테”라고 불렀다.

루터의 명성이 커짐과 동시에 수많은 친척들과 수시로 찾아드는 손님들 그리고 적지 않은 학생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나약한 이 여인이 지혜와 신앙으로 기꺼이 감당하였던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당시 프리드리히 현공은 루터의 생명의 은인이자 동시에 루터의 추종자로서 후한 생활비와 함께 당시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쓰던 40개의 방이 있는 큰 건물을 루터의 가정을 위해 내놓았다. 그럼에도 엄격히 볼 때 수많은 식솔들 때문에 그렇게 생활은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카타리나 부인은 이 큰 규모의 살림을 잘 감당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하겠다.

 

비난의 편지들

그렇다고 루터의 결혼을 마냥 축복스럽고 흐뭇한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케테와 부부생활을 시작한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케테 앞으로 비난의 글이 전달되었다. 사실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루터와 수녀원의 수녀 출신인 카타리나가 독신서원을 깨고 함께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당시 루터를 원수처럼 여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절호의 비난거리임과 동시에 세상사람들에게는 이야기 거리가 족히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유혹에 빠진 계집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네가 빛에서 어두움으로, 수도원적인 거룩한 신앙에서 저속하고 추잡한 생활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 없는 삶으로 타락되었다는 단지 그러한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 너의 그러한 사악한 삶의 모델을 통하여 아직 때묻지 않고 가련한 어린아이들을 역시 이러한 비참함으로 이끌어서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더욱 가련하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없이 많은 핍박 가운데서도 이 두 사람은 결혼은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축복이며 질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더욱 깊고 거룩한 사랑으로 돈독한 부부애를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신선한 유모어를 잃지 아니했으며 격려와 용기를 아낌없이 서로를 향해 쏟아 부었다. 예를 들어 루터는 크나큰 살림을 감당하는 아내를 향하여 한 번은 “우리의 여 주인장 케테, 여 주방장님”(Unsere Herrin K?the, Oberk?chenmeisterin)이라고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유모러스하게 쓰고 있음은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루터 역시 아내의 수고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게다가 루터는 그녀를 “케테씨”(Herr K?the)라고 편지들 가운데서 종종 부르고 있는데, 물론 농담 섞인 호칭인 것은 분명하지만, 루터는 그녀의 탁월성을 염두에 두면서 그 어떤 남자 못지않은 여인이라는 존경의 의미로서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케테는 여러 면에서 강한 생활력으로 활약을 했는데, 밭을 사들이고 경작하며, 가축들을 치며, 시장을 보고, 맥주를 담그는 등의 행위를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카타리나가 많은 밭을 샀는데, 만약 남편이 죽었을 때 혼자서 아이들을 먹여 살릴 것을 생각하면서 준비하였다. 당시 혹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남편 없는 위기 상황을 예비하면서 그녀는 가장 안전한 준비인 토지를 사들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이러한 점은 하나의 부담이기도 했다. 루터 역시 토지를 팔거나 농사를 지을 때 축복스런 부로 이해했지만, 그저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행위를 기꺼 하지 않았다. 루터에게 있어서 많은 곡식은 황금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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