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지리전고)
-총지리(총지리)
우리나라 땅의 경계는 해좌(亥坐) 사향(巳向)인데 정동은 경상도의 영해부(寧海府)이니, 서울에서 7백 45리 떨어져 있으며, 정서는 황해도의 풍천부(?川府)이니, 서울에서 5백 35리 떨어져 있으며, 정남은 전라도의 해남현이니, 서울에서 8백 96리 떨어져 있으며, 정북은 함경도의 온성부(穩城府)이니, 서울에서 2천 1백 2리 떨어져 있다. 동과 서를 합치면 도합 1천 2백 80리요, 남과 북을 합치면 2천 9백 98리가 된다.
○ 고려 때에는 은병(銀甁)을 돈으로 썼는데 이것을 ‘활구(闊口)’라고 했으며,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활구의 제도를 보지 못하나, 대개 우리나라 땅 모양이 좁고 길어서 서울에서 남쪽으로는 장흥에 이르기까지 9백 75리요, 북쪽으로는 강계에 이르기까지 1천 3백 30리가 되며, 동북쪽으로는 경흥에 이르기까지 2천 3백 59리요, 서남쪽으로는 진도에 이르기까지 9백 리가 되며, 서북쪽으로는 의주에 이르기까지 1천 1백 40리요, 동남쪽으로는 울산에 이르기까지 9백 20리이며, 동쪽으로는 영해(寧海)에 이르기까지 5백 40리요, 서쪽으로는 고양(高陽)에 이르기까지 30리이니, 이것을 보면 활구가 둥글고 길쭉한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소문쇄록》
○ 전라도의 김제군 벽골제호(碧骨堤湖)를 경계로 해서 전라도를 호남이라 부르고, 충청도를 호서라고도 부른다. 또는 제천에 의림지호(義林池湖)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를 호서라고 한다.
○ 경상도의 고을들은 조령과 죽령 두 고개 남쪽에 있기 때문에 영남이라 부른다.
○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郡)이 단대령(單大嶺)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
○ 황해도는 경기해(京畿海)의 서쪽에 있으므로 해서라고 부른다.
○ 함경도는 철령관(鐵嶺關)의 북쪽에 있으므로 관북이라 부르며, 평안도는 철령관 서쪽에 있으므로 관서라고 부른다. 《역대아람(歷代兒覽)》
○ 우리나라의 도읍을 정했던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김해는 금관국(金官國)의 도읍이었고, 상주는 사벌국(沙伐國)의 도읍이었고, 남원은 대방국(帶方國)의 도읍이었고, 강릉은 임영국(臨瀛國)의 도읍이었고, 춘천은 예맥국(濊貊國)의 도읍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조그마한 지경을 점거한 것으로 지금의 소읍 같은 것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경주는 동경(東京)으로 신라 1천년의 도읍터인데 산천이 서로 둘러 있고 땅이 기름진데, 그 중에 문천(蚊川) 한 구비가 노닐 만하고 나머지는 별로 기이한 명승지가 없다. 평양은 기자(箕子)가 도읍했던 곳으로 팔조(八條)의 정치와 정전의 제도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의 외성(外城)이 그것이다. 그 후에 연 나라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었다가 또 고구려가 도읍한 곳인데, 그 국경은 남으로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 요하에 이르렀으며 군사 수십만을 거느린 가장 강한 나라이었다. 고려에서는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지금도 사람과 물자가 풍부한 것은 모두 그 남아 있는 교화 때문이다. 영명사(永明寺)는 바로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이니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으며 영숭전(永崇殿)은 고려 장락궁(長樂宮)의 터이다.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윗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 북쪽에는 내[川]가 없으므로 몽고 군사가 휘몰아 쳐들어왔고, 남쪽은 강이 둘렀으므로 묘청(妙淸)이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성문은 넓고 크며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ㆍ장경문(長慶門)의 두 문이,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의 두 문이,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이,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이 있다. 8도에서 오직 이 도읍터만이 서울과 서로 겨룰 만하다. 동쪽 10리 밖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의 옛터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별궁인 것 같다.
성천(成川)은 송양국(松壤國)의 도읍이었고 옛 강동(江東)은 양양국(陽壤國)의 도읍이었는데, 비록 지형은 좁으나 산과 물이 좋아 경치가 좋고 그 중에도 용강산성(龍岡山城)은 가장 웅장하여, 지금까지도 높이 솟아 허물어지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로는 용관국(龍官國)이라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터로 탄현(炭峴) 안에 반월성(半月城)터가 아직도 뚜렷하다. 비록 백마강으로 참호를 삼았으나 좁고 얕아 왕자가 거처할 곳은 되지 못하니 그렇기 때문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전주는 견훤이 점거했던 곳이나 오래 못 가서 고려에 항복했는데, 지금도 고도의 유풍이 있다. 철원은 궁예가 점거했던 곳으로서 태봉국(泰封國)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겹성[重城]의 옛 터전과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으며 봄이면 꽃이 어지러이 핀다. 땅의 형세가 험하고 막혔으므로 강을 따라 물건을 운반하기가 어렵다. 오직 송도만은 왕씨(王氏)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5백 년 기업을 튼튼히 한 곳이다. 곡봉(鵠峯)을 주산으로 하고 줄기가 뻗어 산세가 둘러 있으니, 비록 작은 산이라도 모두 구역이 정해져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방방곡곡에 놀 만한 곳이 많다. 고종 이후로 강화에 도읍을 옮겼는데, 이곳은 바다 속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서 도읍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다. 우리 태조가 개국하면서 도읍을 옮길 뜻이 있어 먼저 계룡산 남쪽에 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서울의 규모를 생각하다가 얼마 안 되어 이를 중지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술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공암(孔巖)이 앞에 있다는 참언이 있고 삼각산이 서쪽으로 서역평(曙驛坪)에 연해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라 했더니 뒤에 다시 보니, 모든 산이 밖을 향해 달아나는 형세이므로 백악 남쪽과 목멱산 북쪽이 제왕 만대의 땅으로서 하늘과 함께 무궁할 것이다.”고 하였다. 세속에 전하기를, “송경(松京)은 산과 골짜기가 사면을 쌓고 있어 서로 감싸고 감추어 주는 형세이기 때문에 시대마다 세력을 부리는 권신들이 많고, 한도(漢都)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은 낮기 때문에, 큰 아들이 가볍게 되고 작은 아들이 무겁게 될 형세이므로 오늘날까지 왕위의 계승과 명공(名公)ㆍ높은 대신에는 대개 작은 아들이 많다.” 하였다. 《용재총화》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땅을 골랐는데, 비류는 미추홀(彌趨忽)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했다. 뒤에 온조(溫祚)는 도읍을 남한산성 곧 지금의 광주(廣州)로 옮겼다가,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 지금의 한양인데, 그가 정한 명당(明堂)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터라는 것이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 써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남경(南京)을 한양에 세워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李氏)의 성을 가진 사람을 골라서 이씨를 부윤(府尹)으로 삼았다. 임금도 또한 해마다 한번씩 순행하고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지세를 눌렀다. 내가[서거정(徐居正)] 일찍이 《고려사》를 상고해 보건대, 한양의 명당은 다만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자리라고만 쓰여 있고 어디라고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경복ㆍ창덕 두 궁(宮)의 정전(正殿)이 모두 임좌 병향인 것을 보면, 고려 때 말한 곳이 아마 이 두 궁(宮)터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근래에 술사 최양선(崔揚善)은 승문원 옛 터가 바로 명당이라 했고 어느 사람은 또 종묘의 낙천정(樂天亭)이 명당자리라고 하나 모두 얕은 소견이며 믿을 수 없는 말들이다. 《필원잡기》
○ 세조가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노래[歌]로 찬송했는데 그 법제는 동(銅)을 부어 24위(位)의 그릇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구리 기둥을 세우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 그 위에 구리 저울을 놓고 낮추고 올리면서 보게 하였으니 이것을 규형(窺衡)이라 불렀다. 땅을 측량할 적에 영구(靈龜 지남철)로 사방을 바로잡았으니, 오시(午時) 초일각(初一刻)이 어느 표(標)에 멀고 가까운가를 알려고 하면 먼저 묘시(卯時) 초일각이나 혹은 유시(酉時) 초일각에 표를 해서 엿보게 하고, 다시 묘시와 유시에 표한 곳을 먼저 법에 의해서 사방을 바로잡아 정오(正午) 초일각에 표한 곳을 어느 방위 몇 각(刻)으로 정한다. 이렇게 한 뒤에 명당으로부터 끈으로 앞의 묘시(卯時) 초일각까지 재어서 1천 1백 척에 표하면 세 곳의 오정(午正) 일각(一刻)의 표가 3천 3백이 될 것이니, 이것으로 24위를 바로잡고, 가로 세로와 구부러지고 바른 것을 모두 이것으로써 바로잡았다. 임금이 일찍이 이륙(李陸)ㆍ김유(金紐)ㆍ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서, 이 법을 강론하고 후원에서 시험하게 하였더니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곧 영릉(英陵) 사산(四山)을 측량하였으며, 그 뒤에 또 경성의 지형을 측량하도록 명하고 모두 이 법을 쓰게 하였다. 그러나 경성은 민가가 즐비하여 측량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이륙 등의 어리석은 의견을 썼으니 한 성 안에 무릇 표를 세운 곳은 모두 이 법을 써서 바로잡고 원근ㆍ고저ㆍ대소ㆍ평험(平險)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이에 베끼고 그 속에 24위를 정하고,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 하나를 측량하고 이를 줄여서 작은 자로 하면, 다시 땅을 재지 않아도 이 자로 땅 위에 그은 곳을 재어 보면, 번거롭게 걸으면서 재지 않아도 산하와 천지와 성곽과 집들이 모두 제곳을 떠나지 않으면서 원근과 고저가 자연히 추호도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청파(靑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