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 시대에 열린 7번의 공의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공의회들은 교리와 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325년): 이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소집되었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의회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졌다고 선언하고, 니케아 신조를 채택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81년): 이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의 잔재를 제거하고 성령의 신성을 확립했습니다. 또한 니케아 신조를 확장하여 현재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탄 신조를 형성했습니다.
에베소 공의회 (431년):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반대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된 두 개의 별개의 자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 (451년): 이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합쳐져 있으며, 서로 혼합되거나 변형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에우티케스주의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2차 공의회 (553년): 이 공의회는 주로 이전의 공의회 결정들을 재확인하고, 몇몇 신학적 오류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3차 공의회 (680-681년): 이 공의회는 모노텔리테 논쟁을 다루었습니다. 모노텔리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있지만 오직 하나의 의지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의회는 예수님에게는 두 본성과 그에 상응하는 두 의지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니케아 2차 공의회 (787년): 이 공의회는 동방 정교회 내에서 벌어진 아이콘 파괴 운동, 즉 아이콘파괴주의에 대응했습니다. 공의회는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 아닌 존중과 기념의 대상으로서 아이콘 사용을 허용했습니다.
이 7번의 공의회는 기독교 신학과 교리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오늘날에도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에베소 공의회는 431년에 열렸으며, 이 공의회에서 마리아의 위치는 특히 중요한 논의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에베소 공의회의 핵심적인 결정 중 하나는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그리스어로 Θεοτόκος, Theotokos)라고 칭하는 것에 대한 확증이었습니다.
이 결정의 배경은 네스토리우스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으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된 별개의 자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Χριστοτόκος, Christotokos)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했는데, 이는 예수의 인간적인 본성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확정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의 인격 안에서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마리아가 예수의 인간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신적 본성의 어머니로도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결정은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성과 인성)의 통합에 대한 중요한 강조점을 제공했으며,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교회에서의 위치를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로 인해 마리아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고, 특히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그녀를 중시하는 교리와 전통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제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제2차 공의회라고도 알려져 있음
This council was primarily convened to address the issue of iconoclasm, which was a significant controversy in the Byzantine Empire. Iconoclasm involved the destruction of religious icons and images, as some factions within the Church argued that the veneration of icons constituted idolatry.
Key points about the Seventh Ecumenical Council include:
Condemnation of Iconoclasm: The council decisively condemned the practice of iconoclasm and upheld the veneration of icons. It declared that icons were to be honored but not worshipped, making a clear distinction between veneration (proskynesis) for icons and worship (latreia) which is due only to God.
Restoration of Icons: The council led to the restoration of the use of icons in worship and the public life of the Church. It affirmed that icons were a means of teaching about the Christian faith and venerating the figures they represented, such as Christ, the Virgin Mary, and the saints.
Theological Justifications: The council provided theological justifications for the veneration of icons, partly based on the Incarnation of Christ. Since Christ had taken a physical form, it was argued that it was permissible to depict Him in icons.
Impact on the Church: The decisions of the council had a profound impact on Christian liturgy and art. It influenced the development of religious art forms, especially in the Eastern Orthodox tradition.
Continuing Controversies: Despite the council's decisions, the iconoclast controversy did not immediately end and continued to have political and religious ramifications in the Byzantine Empire.
Recognition Across Christian Denominations: The council's rulings are recognized by the Eastern Orthodox, Roman Catholic, and many Protestant churches, although the latter generally do not venerate icons in the same way.
The Seventh Ecumenical Council was a crucial moment in Church history, particularly in how it shaped the use and theology of religious imagery in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