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들도 우리의 희망도,
이미 ‘과학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는데,
사랑 역시 과학이 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SF의 기원 인조인간과의 사랑을 본격 소재로 하여 펼쳐지는 한 편의 장엄한 과학적 몽상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감독 오시이 마모루 등
수많은 작가들과 SF 마니아들의 뮤즈가 된 전설적 고전
“우리의 신들도 우리의 희망도, 이미 ‘과학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는데, 사랑 역시 과학이 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라는 책 속 구절이 애니메이션 <이노센스>의 오프닝으로 인용되어 유명세를 탄 고전, 그간 과학소설의 기원을 다룬 각종 문헌에서 중요 작품으로 언급되던 고전 《미래의 이브》(1886). 국내에서 유일하게 빌리에 드 릴아당 연구로 석사, 박사학위를 딴 번역가 고혜선의 4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다.
과학소설은 조반니 카사노바가 18세기에 쓴 《20일 이야기》를 시작으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 근대 과학소설의 선구자인 쥘 베른의 여러 작품들, 과학소설의 지평을 넓힌 H. G. 웰스의 《타임머신》(1895) 《투명인간》(1897)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쟁쟁한 작가들이 다양한 소재로 자신의 상상력을 시험해본 분야이다. 1877년부터 집필이 시작되어 퇴고를 거듭한 끝에 9년 만에 완성된 《미래의 이브》는 이 드넓은 분야에서 과학의 힘으로 만든, 인간과 매우 흡사한 인조인간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 단연 돋보인다.
안드로이드보다 더 인간에 가까운,
진정한 의미의 인조인간 ‘안드레이드’를 등장시킨 최초의 소설
환상소설이나 과학소설을 연구한 문헌에서 안드로이드를 처음 언급한 작품이 바로 《미래의 이브》라고 설명하는 것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일단 안드로이드라는 말은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 관련된 13세기 문헌에 처음 언급된다. 빌리에가 이 개념을 가져와 소설 속에 본격적으로 구현한 것은 맞지만, 그는 그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안드레이드(Andreide)’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안드레이드는 ‘-를 흉내 낸(-eides)’이라는 어미를 가져 ‘인간의 외양을 닮은’ 안드로이드보다 더 인간의 모습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흉내 낸다’는 뜻이 들어 있다. 빌리에의 시대에 안드로이드는 겨우 단순한 동작만을 하는 자동인형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쓴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볼 때 빌리에가 창조한 안드레이드는 요즘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진정한 의미의 인조인간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소설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꿈꾸는 이들에게, 야유하는 이들에게
과학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문학으로 과학을 풍자하다
《미래의 이브》는 산업과 과학이 급격히 발달하던 제3공화국 시절에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연재되었다. 그때 파리에서는 제3회 만국박람회(1878)와 제1회 국제 전기박람회(1881)가 열렸다. 이런 박람회들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던 기술과 산업의 변화들을 파리 시민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기회였다. 당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던 에디슨의 발명품들도 이 박람회들에서 소개되었는데, 빌리에가 에디슨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을 쓴 것도 이런 상황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온 세상이 ‘빨리’, ‘실용적으로’, ‘과학적으로’라는 모토 아래 굴러가고 있던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애인을 천재 과학자 덕분에 기계 애인으로 대체한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마치 과학지상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는 에디슨이 만든 영원한 여인 ‘아달리’의 기계 몸과 부속품들의 제작 방법, 작동 원리 등을 전체 분량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14개 장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 역시 표면적으로는 이 소설을 과학지상주의에 입각한 하드 SF로 보이게끔 만든다.
그러나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이 작품이 단순한 과학소설에 머무르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빌리에는 알리시아에 대한 실망감을 늘어놓는 에왈드 경과 안드레이드의 기계 몸을 설명하는 에디슨의 입을 빌려 부르주아들의 저열한 물욕과 정신의 빈곤함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현실의 과학적이고 인공적인 요소를 통해 저 너머 세계의 참된 가치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상징주의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책 맨 앞에 쓴 “꿈꾸는 이들에게, 야유하는 이들에게”라는 글은 이러한 특징을 잘 요약하고 있다. 상징주의가 가미된 SF 환상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이상을 꿈꾸고 현실을 야유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줄거리
에디슨은 축음기와 마이크 등을 발명해 ‘세기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유명 과학자다. 어느 날 뉴저지의 멘로 파크에 있는 그의 연구실로 영국의 미남 귀족 에왈드 경이 찾아온다. 에디슨이 과거 가난에 쪼들려 보스턴의 길거리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서, 에디슨은 그를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에왈드 경은 자신의 애인 때문에 너무도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다. 알리시아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겉모습은 완벽한 비너스이지만 천박하고 저속한 정신 때문에 에왈드 경에게 실망감만을 안겨준다. 자살까지 암시하는 그를 염려한 에디슨은 과학의 힘으로 외모와 목소리, 행동까지 알리시아와 똑같고, 정신도 그녀의 겉모습처럼 고매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인조인간 ‘아달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하는데…….
서평
《미래의 이브》는 문학사에 있어 단지 초창기 과학소설로만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문학으로 과학을 풍자한 작품이다. _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빌리에는 이 소설에서 아이러니를 결정적인 대목까지 끌고 간다. _스테판 말라르메
빌리에는 현실을 몰아내는 사람이자, 이상으로 이어진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_레미 드 구르몽
“그녀의 아름다움도 똑같이 그대로인, 또 하나의 여자를 만드는 것입니까? 그 육체도, 그 음성도, 그 걸음걸이도, 요컨대 그 자태 그대로의 여자를 만드는 것입니까?”
“‘전자기’와 ‘발광 물질’을 사용하면 어머니의 마음이라 해도 속습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남자의 정열쯤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괜찮으십니까! 제가 이렇게 만들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12년이 지난 뒤, 그녀가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이상적인 자기의 복제를 보았을 때, ‘시기’와 공포에 질린 나머지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잠시 뒤, 에왈드 경은 생각에 잠긴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을 창조하려고 하는 것은 어쩐지 ‘신’을 시험해보는 일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승낙을 해달라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에디슨이 낮은 목소리로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거기에 어떤 종류의 지성 같은 것이 불어넣어집니까?”
“‘어떤 종류’의 지성이냐고요? 아닙니다. 지성 그 자체를 불어넣을 것입니다.”
이 거창한 말을 듣고, 에왈드 경은 발명가 앞에서 돌이 된 것같이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나의 내기가 제안되었고, 내기에 건 것은 과학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정신이었다. [149~150쪽]
“자, 그러면 이것은 어떻습니까?” 에디슨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 마녀 같은 여자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에왈드 경이 다시 물었다.
“같은 여자입니다. 단지 이쪽이 ‘진짜’이지요. 앞서 본 여자의 겉모습 속에 있던 여자입니다. 에왈드 경! 제가 보고 판단하기에 아무래도 당신은 현대의 ‘화장 기술’의 발전을 잘 알고 계시지 못한 것 같군요!” 에디슨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다시 열광적인 목소리로 돌아와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에케 푸엘라(Ecce puella)’! 이것이 저 빛나는 이블린 하발 양이 마치 나무에서 송충이를 떼어낸 것처럼, 매력적 치장들을 벗어던진 모습입니다! 정말 사람들이 저 모습을 욕망하다 죽을 만하지 않습니까! [……] 그러나 ‘화장’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여자들은 요정처럼 솜씨 좋은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요! 게다가 일단 첫인상이 생기고 나면, ‘착각’이 끈기 있게 달라붙어 가장 가증스러운 결점까지도 마냥 좋아하며 몰두하고, 마침내는 그 망상의 손톱으로 추악함까지 붙들고 늘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비록 그것이 ‘어느 것보다도’ 더 봐주기 힘든 추악함일지라도요. [263~264쪽]
우리의 신들도 우리의 희망도, 이미 ‘과학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되었는데, 사랑 역시 과학이 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잊힌 전설, 과학에 의해 경멸당한 전설에 나오는 이브 대신에, 저는 과학적인 이브를 드리겠습니다. 이 이브야말로 당신들이 제일 먼저 비웃는 감상주의의 잔재로 여러분이 아직도 ‘심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저 시들어버린 내장 기관에 유일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3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