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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처럼 땅에 떨어지지 않는 예언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3) 땅에 떨어지지 않는 정확한 예언을 하려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해야 한다.
3)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는 것은 자기의 한계를 넘지 말라는 뜻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믿음의 분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바이블렉스 9"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때 읽은 내용을 더 길게 인용해드리겠습니다.
"아날로기아
비율, 부분, 몫, 정도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아날로기아는 아나와 로고스에서 유래했으며, '로고스에 일치하는'이란 의미에서 '일치, 조화, 균형, 비율, 부분, 몫, 정도'를 의미한다.
2.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아날로기아는 신약성경에서 롬 12:6에 한 번 나온다: '믿음의 [분수].' 예언의 은사는 믿음과 일치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일치의 근거가 되는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내용이나 신앙의 교리에 속하는 신앙 규범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3절)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6절)라는 이 두 문구의 병행에 의해 입증된다.
오직 신자는 은사를 행할 수 있으며, 은사의 능력은 각 사람에 적합한 믿음의 능력과 일치하는 것(아날로기아)이다. 이것은 모든 은사에 해당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은사들, 보기로 병 고치는 은사에 있어서 일치는 외적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은사의 능력이 믿음의 중단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진실성에 대한 특별한 시험(test)을 요하는 예언(고전12:10, 14:29)의 경우에는 믿음 없이도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속임수가 있다. 따라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은 오직 믿음의 분수 곧 믿음의 일치 및 정도에 따라 진실로 가능한 것이다(참조: Kittel)."
이 견해가 현재 가장 선호되고 있는 견해입니다. 참고로, 호크마 종합주석에도 같은 견해가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의 '믿음'은 객관적 규범이나 교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일반적 의미의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분수대로'는 3절의 '믿음의 분량대로'를 나타내는 헬라어 '메트론 피스테오스'와 6절의 '은혜대로'를 표현한 헬라어 '카타 텐 카린'과 병형구로 그 뜻하는 바가 같다(Bruce, Barmby, Gaffin)."
이 견해에 대해 토마스 슈라이너는 다음과 같이 더 잘 설명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러한 에언들이 '믿음의 분수'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구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된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피스티스'가 목적격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교리의 주요 부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구도에서 '아날로기아'라는 단어는 '표준' 혹은 '규칙'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문구의 개념은 예언하는 자들이 사도적 교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예언은 믿음의 규범이라는 한계 내에 있어야 한다.
이 해석이 매력이 있긴 하지만 또 다른 해석이 선호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간결하게 논의하는 것을 고려해볼 때 우리가 결코 확신할 수는 없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3절에 있는 '믿음의 분량'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나는 위에서 개인들이 소유하는 믿음의 양이 '믿음의 분량'에 대한 적절한 이해라는 것을 주장했다. 만일 그 해석이 옳다면 '믿음의 분수'라는 문구도 역시 예언하는 자들의 개인적인 믿음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 비록 바울이 어떤 예언도 사도적 가르침에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지만, 이곳에서 이러한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다. 이곳에서 바울의 목적은 예언이 각 사람의 믿음에 비례하여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날로기아'라는 말은 위의 '분량'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며, 또한 '비율'이라는 단어로 적절하게 번역될 수 있다. 예언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넘어서서 예언하고자 하여, 아마도 그들의 은사적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에 따라 예언하도록 권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 글들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믿음의 분량"(3절) 혹은 "믿음의 분수"(6절)는 동의어입니다. 때문에 저도 이 견해가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반드시 양자택일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로이드 존즈처럼 저도 두 가지 해석 모두를 취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굉장히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 견해는 어떤 면에서 크게 유익할까요? 이미 말했듯이 "믿음의 분량"(3절) 혹은 "믿음의 분수"(6절)는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3절에 나오는 "믿음의 분량"은 직분과 은사의 특성과 한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호크마 종합주석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믿음의 분량 - 이 표현은 믿음이 물질처럼 측정되는 양적인 것이라기보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기능들이 있어 각자 주어진 직분과 은사의 한계와 특성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고전12:4-13). ... 이런 믿음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것으로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이다. ... 본문의 '믿음'은 구원의 수단인 진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닌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의 성격을 알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브루스(Bruce)는 이를 '영적 능력'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의 경우 단순히 예언의 은사 자체로 그 한계를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치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나누어 준 것처럼 예언적인 은사와 기름부음에는 세 가지의 분량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는 바울의 말을 그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각각 자기 분량과 한계에 맞게 예언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고 자신이 선지자가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마음이 교만해져서 목회자들에게도 훈수를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선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로이드 존즈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지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초대 교회 사도들이 많지 않았던 것처럼 선지자들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는 분명히 보다 광범위하였습니다."
신디 제이콥스는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단순한 예언의 은사를 통해 전하는 예언은 ... 상세하지 않으며 미래의 일을 말하는 법이 거의 없다. 단순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하지만 미래의 다가올 일들에 대해 말하지는 않는다. ...
새로 나타나는 예언적인 사람들이 때때로 미래의 일을 포함하는 자세한 것들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 예언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은 수년이 걸린다. 어떤 지도자는,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예언의 직임을 세우시기 전에, 하나님의 훈련소에서 적어도 20년은 집중적인 가르침을 받게 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잭 디어 교수도 이것을 다뤘는데, 저와 똑같은 말을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비교적 소수의 예언자들이 이었고, 예언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거의 예언을 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는 성령 강림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이 요엘 2:28-32의 성취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예언자 요엘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2:17-180.
성령 강림과 더불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신자들이 예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남녀노소, 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교회 내의 모든 사람들이 예언하고 꿈을 꾸고 환상을 볼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예언을 하거나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경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복음을 전도하거나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경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언자가 되거나 복음전도자가 되거나 교사가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훌륭하게 행하는 사람들만이 예언자나 교사나 복음전도자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예언사역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탁월한 사역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은사들마다 그 강도가 다르며, 사역들마다 권위에 차이가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할 것이니라'라고 기록했다(롬12:6). 예수님도 달란트 비유에서 같은 것을 가르치셨다. 그 비유에서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다(마25:14-30). 어떤 복음전도자들의 사역은 매년 주일학교의 한 학급에만 제한되는 데 반해, 어떤 복음전도자들은 국제적인 사역을 한다. 같은 사실이 예언사역에도 적용된다."
이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분량이 다르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예언의 은사와 기름부음에는 어떤 단계와 분량이 있을까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존 에카트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기름부음 안에서 행하는 사역들 1』에서 예언을 "1. 예언의 영 2. 예언의 은사 3. 예언자의 직무"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오래전 제가 그것을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라는 책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 다시 한 번 그것들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 예언의 영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성령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했던 예언의 영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모든 신자들 안에 거하시므로 모든 신자가 예언의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사도들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가능합니다.
마태복음 10:19-20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가복음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예언의 영이 나타날 때 믿음으로 행하면 모든 신자가 예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단순히 말이 아니라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예언들처럼 성령의 감동 중에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예언입니다. 그래서 신디 제이콥스는 이것을 "단순 예언의 은사"라고 불렀습니다.
※ 예언의 은사
고린도전서 12:10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성령께서는 그 뜻대로 어떤 신자들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주십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예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예언을 합니다(고전14:3). 그래서 예언사역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선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예언의 은사 하나가 어떤 사람을 선지자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했습니다(고전14:1). 동시에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고전12:29)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과 선지자가 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 선지자의 직임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선지자는 원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만 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이 만세 전에 선지자로 선택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만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선지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선지자들에게는 예언의 은사 외에도 계시의 은사들 즉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과 영분별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이 중 두 가지 이상이 나타납니다. 선지자들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을 비롯해서 예언의 은사만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이상 여러분에게 1. 예언의 영 2. 예언의 은사 3. 선지자의 직무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드렸습니다. 제가 "믿음의 분수"에 대해 간절히 알고자 했을 때 성령께서는 이 세 가지를 떠오르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한계를 알고 벗어나지 않는 것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 예언들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될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 후, 저는 자료를 찾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존 에카트가 예언의 세 가지 단계를 소개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경계"라는 제하에 성령께서 제게 주신 깨달음과 똑같은 주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12:6)
나의 한 동료 사역자가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이 능력이 곧 우리의 한계'라고 말한 것을 좋아한다. 달리 말하면, 당신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의 분량으로 제한받게 된다. 모든 신자는 이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예언자의 영역에서 움직여야 한다. ... 당신은 자신의 은혜의 분량을 잘 분별하여 그 영역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모든 신자가 예언할 수 있겠으나 모두가 가장 높은 예언자의 영역, 즉 예언자의 직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교회가 이 영역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행할 때 비로소 성령이 주시는 가장 큰 결과들이 나타남을 볼 것이다."
존 에카트 역시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1. 예언의 영 2. 예언의 은사 3. 선지자의 직무" 중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분량과 한계를 깨닫고 그 경계를 지키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꼭 이 구절의 의미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이 구절에서 이런 교훈을 끌어내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체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명심하시고 반드시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을 수 있는가?』라는 탁월한 책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영역에만 머무른다면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격려할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예언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선지자가 장래를 예언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나도 예언을 한다. 그러니까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 가서는 안 될 영역으로 들어가버리게 됩니다."
또, 『성령과 성령의 은사들』이라는 책에서 다시 한 번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예언의 은사의 오용
예언의 은사의 오용은 신자들 가운데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예언을 사용한다면, 예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단한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의 계시를 듣고서 그들도 그러한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 예언을 하는(forth telling) 대신에 미래에 대한 예언(foretelling)을 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한번은 어떤 여인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두가 서로 안수하고 예언해주는 어떤 기도 모임에 참석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성취된 것이 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안수하고 나의 어머니가 6개월 내에 돌아가실 것이라고 예언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틀렸고, 나의 어머니는 아직도 생존해 계십니다.'
그 여인은 계속 말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나의 남편이 그해에 나를 떠날 것이라고 예언해주었지만 그 기간은 틀렸고, 남편은 아직도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많은 것들도 예언해주었지만, 그것들 중 어떠한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은사를 오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단순한 예언의 은사로 사역한다면 오히려 더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왜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해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또한, 왜 미래에 대한 예언들이 그토록 많이 틀리는지도 아셨을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와 기름부음에는 예언의 영, 예언의 은사, 선지자의 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분수를 알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언의 영'을 받은 모든 신자는 성령의 감동 중에 나누어야 할 분명한 내용이 주어질 때만 예외적으로 예언해야 합니다. 절대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처럼 예언사역을 하려고 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엉터리가 됩니다. 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성령의 감동 중에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내용의 예언이 주어질 때만 예언해야 합니다. 절대로 지식의 말씀을 흉내 내며 신령한 척하거나 선지자처럼 미래를 예언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이 주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해도 되지만, 절대로 예언사역을 하듯 주기적으로 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언들이 빗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예언하는 것이 곧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바른 예언사역이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언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예언사역자들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사역합니다. 선지자들처럼 계시의 은사들(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들 분별함의 은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또는 알아도 주의하지 않아서 자꾸 미래에 대해 예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예언들이 빗나갑니다.
그럼 예언사역자들만 문제고 선지자들은 문제가 없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선지자 직임에 대한 정의가 착각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긴 목사님은 예언의 은사뿐 아니라 계시의 은사들인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의 은사 중 두 가지 이상이 꾸준히 나타나는 사람이 선지자라고 정의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충분한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 있어서 많은 이들이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글을 읽고 '나도 미래에 대한 계시를 받은 적이 있으니까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가졌어. 나도 과거나 현재에 대한 계시를 받은 적이 있으니까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가졌어. 나도 환상을 보고 영의 세계를 보니까 영분별의 은사를 가졌어. 그러니까 나도 선지자야!'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몇 차례 이런 경험을 했다고 선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험을 자주 빈번하게 해야 선지자입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해긴 목사님도 설명을 하셨습니다. 해긴 목사님이 설명하지 않은 것은(어쩌면 상식적인 것이라서 설명을 안 하셨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영의 세계를 보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대한 계시들을 자주 받아도 그것이 맞지 않으면 참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예언의 은살를 받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점입니다.
신명기 18:20-22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아무리 미래에 대한 계시를 받아도 맞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환상 보고, 입신하고, 천사의 방문을 받고, 미래에 대한 계시들을 받는다고 자신을 선지자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이 받은 계시는 대부분 성취되지 않고 땅에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여러 가지 영적 체험들을 하니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선지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언을 마구 남발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예언들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교회에도 '겨자씨'라고 그런 이상한 여자가 있었는데, 오늘날 이런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제발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절대로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저는 사물엘을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방문을 받았으나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선지자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선지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선지자는 다릅니다. 구약의 참 선지자라 할지라도 간혹 실수할 수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걸핏하면 예언이 틀린다면 그는 참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시금석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살피고, 선지자로 착각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같은 기준으로 거짓 선지자나 자칭 선지자들을 분별하여 절대로 그들에게 미혹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